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우는 선지자 (6: 1- 5)

 


(
6:1, 개역)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6:2, 개역) 스랍들은 모셔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그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그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6:3, 개역) 서로 창화하여 가로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6:4, 개역) 이같이 창화하는 자의 소리로 인하여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집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1, 새번역)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나는 높이 들린 보좌에 앉아 계시는 주님을 뵈었는데, 그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6:2, 새번역) 그분 위로는 스랍들이 서 있었는데, 스랍들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가지고 있었다.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나머지 둘로는 날고 있었다.

(6:3, 새번역) 그리고 그들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며 화답하였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의 영광이 가득하다."

(6:4, 새번역) 우렁차게 부르는 이 노랫소리에 문지방의 터가 흔들리고, 성전에는 연기가 가득 찼다.

(6:5, 새번역)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네 맞습니다. 바로 앞의 글 사도요한이 일곱인을 뗄 자가 없어서 우는 장면과 일치 합니다.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여 라고 찬양하는 가운데서

정작 선지자는 웁니다.

 

왜 울까요?

! 기뻐서 웁니다.

오로지 이 눈물만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니까 말이죠.

 

즉 울음은 1234로 슬픈 원인으로 인한 결과물로써의 눈물이 아니라

그 반대로 미래완료로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그 원인 없는 결과로써

미래완료에서 현재로 처들어 와서 눈물 곧 성령의 놀라운 탄식(꼬끼오×3)으로써

성령이 덮쳐져서 우는 겁니다.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다른 것은 주의 책에 기록이 되지 않습니다.

오로지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만

닭의 울음만 기록이 된다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만 기록이 되지

 

인간이 성화 되었다는 둥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는 둥

저 탕자와 같이 않게 아버지 말씀을 다 지켰다는 것이 기록이 되지 않고

 

도리어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을 쳐다보고서

자기를 노예로 삼아 달라고 우는 그 울음만이

아버지의 용서가 덮쳐진 그 울음만이 생명책에 기록이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 마치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천군천사들이 기뻐 찬양하는 것처럼

 

미리 알고서 천사들이 거룩하다 거룩하다 외치고

이사야 선지자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라고 울고

 

(15:7,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1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10, 공동) 잘 들어두어라.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할 것이다."

(15:7, 현대인) 이와 같이 하늘에서는 회개할 필요가 없는 의로운 사람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 것을 더 기뻐한다.

(15:10, 현대인)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원인 없는 결과가 떳기 때문에

 

즉 이사야서의 본문으로 따지면 남겨진 씨가 떳기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우는 겁니다.

 

즉 잘못을 해서 그 다음에 뉘우치고 울고 불고 하는 회개나 눈물 울음이 아니라

그 반대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남겨진 씨가 떳기 때문에

무조건 이유 없이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 되어서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고 우는 겁니다

 

즉 주의 눈물(꼬끼오×3)만 주의 병에 담겨 생명책에 기록이 되기 때문에 말이죠.

 

안식(일곱)의 주인이 등장했기 때문에 손마른 자가 되어서 즉 죄인이 되어서

안식의 주인을 증거하기 때문에 즉 손마름을 고침을 받는 안식의 의미를 보여주도록 되어 있기에

 

그러니 손마른 자는 누구를 외칩니까?

자신의 죄인 됨을 손마름을 자랑할까요? 아니면 안식의 주인을

저 안식을 지키는 우상숭배자 곧 살인자들 앞에서 안식의 주인을 외칠까요?

왜 하필이면 다른 요일은 안 되고 꼭 안식일날에 고쳐주실까요?

 

안식의 주인을 말하기 위한 기능이기

우는 자로써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나의 하나님은 너거 하나님과 다르다 라고 외치는 겁니다.

이것이 이사야의 하나님입니다.

 

이 기능으로써 저들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과 대 충돌을 벌리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유대인(바리새인)이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써 대 충돌을 벌리듯이 말이죠.

 

마침 어제 어머니와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욥의 세친구의 하나님은 엘로힘 하나님이고

욥은 전혀 낯선 하나님 곧 전쟁의 하나님인 여호와이고

 

하나는 존재로써의 하나님이고

인간 자신의 존재의 투사로써의 하나님이고

 

또 하나의 하나님은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전쟁이라는 기능으로써의 여호와

전쟁의 하나님이고

 

이 전쟁이 바로 마귀에 대한 것인데

이 마귀가 가시화 되지 않기 때문에

마귀의 증상물로써의 욥의 세친구 마치 바리새인의 하나님처럼

이들과의 대 충돌로써의

 

이 둘의 차이를 벌리시더라 말이죠.

욥도 베드로처럼 저들 존재의 하나님에서 빠져나올길이 없다 말이죠.

그래서 존재를 없애 버리는 겁니다.

심판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죽은 것이다 말이죠.

 

그럼

오늘 본문처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다 말이죠.

이것이 심판 받은 자로써 하나님이 보좌에서 샘이 넘쳐나듯이

영광이 넘쳐나는 것을 본 자의 기능이 나타나는 겁니다.

이미 죽었기에

죽은 자로써 드디어 외치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십니다 라고

 

마귀는 헌 옷을 붙잡고 즉 죽은 베드로를 붙잡고 시체를 아무리 고소해 본들

이미 앙꼬 즉 새것이 된 베드로는 예수님의 품에 안겨 버렸기 때문에

헛 짖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런 식으로 마귀의 정체를 들추어내시는 전쟁의 여호와

즉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나타내시더라 말이죠.

 

아무리 마귀가 욥을 지근 지근 밟아도

욥의 시체를 밟는 것 밖에 안된다 말이죠.

정작 생명은 못 건드리는 겁니다.

 

욥은 이 생명을 증거하는 증거자로써 우는 자가 되는 겁니다.

?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이 떳기 때문에

장대 높이 달린 인자를 쳐다본 자로써

불뱀에게 물린자로써 장대 높이 달린 예수님을 쳐다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순서가 역순이다 말이죠.

 

그래야 저들 엘로힘을 믿는 하나님에서 도저히 빠져 나올수 없기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그 엘로힘 하나님 세계에서 쫄딱 망하게 하고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다고

전쟁의 하나님 여호와의 세계로 빼내셔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이 구원을 볼려면

이 구원자를 볼려면

죄인 곧 망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

기능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늘 본문처럼 이사야 선지자는 울지 않을 수가 없는 겁니다.

? 주의 병에 담을려고 즉 기록된 것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밖에 없다고

 

그러니 졸지에 하나님이 둘로 갈라져서

이사야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증거하도록 되어 있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거짓선지자는

욥의 세 친구처럼 기존의 하나님을 우려먹는 식으로써

 

마치 예수님의 하나님과 바리새인의 하나님의 대 충돌이 벌어지듯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닌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는 마귀와 직접 싸울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로써

어서 구원해 주세요 라고

다른 주인을 외치는 겁니다.

 

뻔히 주인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주인은 너가 아니고 저분이야 라고 외치면

듣는 주인 기분 나빠 할꺼다 말이죠.

 

그러니 전쟁을 요청하는 마리아의 기도처럼

우는 겁니다.

 

? 이미 승리했기에 말이죠.

 

이사야는 바로 흑암의 백성 자리에서

사망의 그늘에 폭 삭 주저 앉은 자의 자리에서

개같은 이방인의 자리에서

 

(4:10, 개역)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4:11, 개역)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4:12, 개역)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4:13, 개역)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4:14, 개역)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4:15, 개역)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4:16, 개역)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4:17, 개역)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하시더라

 

(9:2, 개역)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1:79, 공동) 죽음의 그늘 밑 어둠 속에 사는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주시고 우리의 발걸음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주시리라." / 이사 9:2, 58:8, 60:1-2.

(1:79, 킹흠정) 어둠과 사망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을 주고 우리 발을 화평의 길로 인도하셨도다, 하니라.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자리에서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의 울음을 쳐다보는 겁니다.

 

마리아가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고 전쟁 요청의 기도를 한 뒤에

자기는 그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고 얍삽하게 빠져 버립니다

 

자기의 전쟁이 아니거든요. 김의 전쟁 곧 주의 전쟁이다 말이죠.

그리고 관람자로써 주를 찬양하는 겁니다.

본인은 정작 전리품으로써 빼내주세요 라고 외칠 뿐이다 말이죠.

새 주인을 새 남편을 미리 앞당겨서 찬양하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말이죠.

그러니 기존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이 전쟁에서 미리 다 무너지고

심판 받아 마땅할 뿐이라고 본인이 그 심판의 자리에서

죄인의 자리에서 구원자에게 뽀빠이 살려주세요 라고

구원자를 부르는 겁니다.

 

너희는 가만히 서서 여호와의 구원을 바라보라 라고

자신을 어떻게 구원하시는지를 구경하는 겁니다.

 

이사야가 그렇게 외치는 겁니다.

이미 다 완성된 새 이스라엘이 남겨진 씨로 인해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에

기존의 이스라엘을 어떻게 바닥 뜯어내시는지에 대한

임마누엘의 활동을 보는 겁니다.

 

다른 것은 기록이 안되었거든요.

 

오로지 예수님의 눈물만이 생명책에 기록이 되었거든요,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

 

이 닭의 울음이 아니면

 

이 이사야 선지자의 눈물이 아니면

 

이 차이를 알 길이 없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하나님 곧 사단의 회와

예수님의 하나님 곧 이사야의 하나님

피로 사신 일곱의 하나님

안식의 주인을 우리는 알길이 없기 때문에

손마른 자의 자리에서

이 안식의 주인을 증거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웁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자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봐 버렸구나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마치 눈물을 흘리면서 기쁨으로 단을 거두는 것처럼 말이죠.

 

(56:8, 개역) 나의 유리함을 주께서 계수하셨으니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 이것이 주의 책에 기록되지 아니하였나이까

 

울어서 복이 아니라

희년이라는 기쁜소식이 덮쳐졌기 때문에

미리 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되도록 되어 있는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의사가 떳다고 외치는 기쁨의 새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십자가의 다 이루셨다고 외치는 주의 눈물만이 주의 병에 담겨 기록이 되기 때문에

다른 것은 기록이 되지 않기에 말이죠.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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