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수 복을 입고서 피를 외치다 (6: 5- 8)

 

(6:5, 개역)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6:6, 개역)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6:7, 개역)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6:8, 개역)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은즉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6:5, 새번역) 나는 부르짖었다. "재앙이 나에게 닥치겠구나! 이제 나는 죽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인데, 입술이 부정한 백성 가운데 살고 있으면서, 왕이신 만군의 주님을 만나 뵙다니!"

(6:6, 새번역) 그 때에 스랍들 가운데서 하나가, 제단에서 타고 있는 숯을, 부집게로 집어, 손에 들고 나에게 날아와서,

(6:7, 새번역) 그것을 나의 입에 대며 말하였다. "이것이 너의 입술에 닿았으니, 너의 악은 사라지고, 너의 죄는 사해졌다."

(6:8, 새번역) 그 때에 나는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었다.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내가 아뢰었다.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저를 보내어 주십시오."

 

 

복음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것이다 말이죠.

그럼 우리는 복음과 상관없이 따로 따로 국밥처럼

별개의 것으로 취급해 버려야만 하는가?

(그럴 인간도 없을뿐더러 어떻게 해서든 역어볼려고 단절성을 누리는게 아니라

억지로라도 복음과 연관될려고 복음을 대상으로 삼고자 합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존재로써의 의미보다

기능으로써 예수님 자신을 위해서 동원이 된다는 점에서

연관성이 있다는 겁니다.

즉 내가 복음을 대상으로 삼는게 아니라

복음이 나를 대상으로 삼아서

긍휼의 그릇이든 진노의 그릇이든 토기장이 마음대로 하신다 말이죠.

즉 그 어떤 인간도 복음에서 벗어날수가 없습니다.

기능적으로 다루어 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하기 때문에 기능이 아닌

존재로써 도리어 복음을 대상물로 삼을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사람의 일입니다.

 

 

자 그럼 복음은 왜 우리에게 복음을 제시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예수님 자신만을 위한 복음을 왜 제시하는가?


바로 생명이다는 이유입니다.

그것도 유일한

그렇다면 이 외의 것은 생명이 아니다는 거죠.

 

마치 십계명의 첫 계명처럼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듯이

다른 신이 없다면 구지 언급할 필요가 없는데

마치 다른 신이 있다고서 오히려 더 유도를 하듯이

나만 바라봐 라고 하시면서

의외로 시샘이 가득한 모습이다는 겁니다.

 

시기 질투 말이죠.

 

이것은 주님 쪽에서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을 염두하시고서

시기와 질투를 발 하신다는 점입니다. 곧 심판 입니다.

 

저는 사실 고3때 예수님을 알게 되었는데

물론 어떤 교육환경에서도 인간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었다 라고 교육 받은 적이 없습니다.

또 중간에 교회 다니다 보니

성경을 처음부터 읽지 않는 이상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었다는 사실을 알길도 없고

교회 다니고 나서도 한 참 뒤에 알게 되었다 말이죠.

 

자 그 정도로 성경 말씀이 알려 주지 않는 이상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었다는 사실을 알 길이 없었다 말이죠.

 

바로 이 점을 예수님은 그 수천년 전의 일을 계속 캐묻고 있었다 라는 겁니다.

즉 심판 받아 마땅한 자임을 그 심판의 근거를 제시하는 점에서

또 아무런 상관이 없는게 아니라 상관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 점에 대한 시기와 질투 이거든요

 

아니 세상 어디에도 또 누구도

이것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가진 자를 봤습니까?

 

오히려 그 반대죠 선의 달인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막나가자 라는 식으로 악의 달인이거나

아니면 이 양쪽을 취해서 자기유익을 챙기거나

그 대표적인 자들을 오늘날 법관이나 소위 종교지도자들

정신적인 지주들

소위 지도층들을 보면 이런 식이기 때문에

그 어떤 누구도 여기에 대한 시기와 질투를 가진 자를 본 적이 없다 말이죠.

 

맞습니다. 우리는 이 상관성 즉 관계성을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해 유리한 입장에서

연관성을 생각했지

우리의 유익(우상)과 전혀 무관한 입장에서의 연관성

즉 심판성은 오히려 심판받아 마땅함의 연관성은 추호도 생각지 않았다는 겁니다.

이것을 바로 사단에게 사로 잡힌 입장인 상태라고 성경은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점을 계속해서 추궁하시는 겁니다. 시기 질투 하십니다.

아주 아주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는 점입니다.

그러니 괜히 피로 사신게 아니다는 거죠.

자기 목숨을 걸었다는 겁니다.

아끼지 않고 자기 목숨을 내어주셨다 말이죠.

 

(8:6, 개정)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6, 개역)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8:6, 새번역)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기세요. 도장 새기듯, 임의 팔에 나를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저승처럼 잔혹한 것, 사랑은 타오르는 불길, 아무도 못 끄는 거센 불길입니다. / 또는 '주님의 불길 같습니다'

(8:6, 공동) 가슴에 달고 있는 인장처럼 팔에 매고 다니는 인장처럼 이 몸 달고 다녀다오.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시샘은 저승처럼 극성스러운 것, 어떤 불길이 그보다 거세리오?

(8:6, 바른) 당신은 나를 도장같이 마음에 두고, 도장같이 팔에 남겨 두세요. 참으로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며, 질투는 스올같이 잔혹하고, 그 불꽃은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여호와의 불 같습니다.

(8:6, 현대인) 여자: 당신은 나를 인장 반지처럼 당신의 마음에 간직하고 도장처럼 당신의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며 질투는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처럼 타오릅니다.

(8:6, 쉬운말) 임이여, 도장 새기듯 임의 마음에 나를 새겨 주세요. 도장처럼, 임의 팔에 나를 새겨 두세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사랑의 시샘은 무덤처럼 잔인하여 맹렬한 불길마냥 거세게 활활 타오르죠.

(8:6, 쉬운) 나를 옥새같이 그대 마음에 두세요. 나를 도장같이 그대 팔에 새기세요.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그 질투는 무덤같이 끈질기니, 그 사랑은 불꽃처럼, 강력한 불길처럼 타오르네.

(8:6, 우리말) 나를 당신 마음에 도장처럼 새기고 나를 당신 팔에 도장처럼 새겨 두세요. 사랑은 죽음만큼이나 강하고 질투는 무덤만큼이나 잔인해 불꽃처럼 거세게 타오릅니다.

(8:6, 가톨릭)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가슴에, 인장처럼 나를 당신의 팔에 지니셔요.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정열은 저승처럼 억센 것. 그 열기는 불의 열기 더할 나위 없이 격렬한 불길이랍니다.

(8:6, 킹흠정) ¶ 나를 도장같이 네 마음에 새기고 도장같이 네 팔에 새기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질투는 무덤같이 잔인하니 그것의 숯은 극히 맹렬한 불꽃을 지닌 불붙은 숯이니라.

(8:6, 한글킹) 네 마음에 인장처럼, 네 팔 위에 인장처럼 나를 새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하고 질투는 음부처럼 잔인하니, 그 곳의 숯은 불타는 숯, 곧 심히 맹렬한 불길을 가진 것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달리 다른 것을 드릴 입장이 못 된다는 점에서 답이 없게 되니

아무리 인애와 자비를 원하시는 주님이라고 해도

이 인애와 자비를 인간 쪽에서 갖출수 있는 자가 없기 때문에

 

인간은 자꾸 그 빈자리를 견디지 못해서

사람의 일 곧 자기가 예수님을 절대로 부인 하지 않겠다는 둥

십자가의 죽음까지 끝까지 따라가겠다는 둥

자꾸 자꾸 생명 되신 예수님이 죽음을 격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는 둥

그 빈자리를 채울려고 하지만

 

이것은 시기 질투인 죽음 보다 강한 사랑이 아니다는 점에서

사람의 일이고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런 사람의 일의 상대적인 모습으로써

 

친히 주님 쪽에서 직접 이 번제와 제사의 달인인 마귀를 넘어서

이 죄 문제를 해결 하시는 사랑을 완성 하시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하나님의 일과 사람의 일을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오시지 않는 이상

이 차이를 알 길이 없는 겁니다

 

마치 번제와 제사와 그리고 인애와 자비의 차이를

우리는 그게 무슨 차이가 있냐 라고 어물쩡 대충 넘어가겠다고 하지만

주님 쪽에서 감사하게도 일체 양보하시지 않고

이 차이를 또렷하게 밝히 보여줌으로써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로

지혜를 추구하는 헬라인 이방인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함으로 작용케 해서

저들 쪽에서 거부하도록 만들어 버리=시는

십자가 사랑이

 

우리에게는 도리어 영광이 되게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어디서 감히

되도 않는 번제와 제사로 복음을 대신할려고 사기를 치느냐 라고 한다 말이죠.

 

인간 쪽에서의 일체 그 어떤 것도 안 받고 거부하시고

오로지

졸지에 자신의 피를 발라서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와는 상관없는 복음이지만

복음이 우리를 가만히 두질 않고

반드시 피를 발라서 의미를 부여하시는데

그것이 피 발랐다 라는 피의 증상물로써

예수님 자신의 피 복음을 위해 우리를 연관시킨다는 점입니다.

 

피를 발라야 만 할 정도로 우리는 안된다는 겁니다.

즉 죄인이라는 겁니다.

심판의 자리에 놓여져야 하는 겁니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도다를 외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즉 생명을 외칠려면

구원자를 외칠려면

죽음의 자리

환자의 자리 죄인의 자리에 놓여져셔

죄수복을 벗는게 아니라

죄수복을 입은채로 저 분이 이런 죄수인 우리를 용서했다고

저 분을 외친다는 겁니다.

 

이것을 천사들이 흠모하지

? 이것이 선물 곧 은사이기에

곧 피로 사신 바 된 신부의 고백, 교회의 고백이기에

 

죄인 이라는 기능이 아니라

죄인이라는 존재가 되면

은혜를 더할려고 죄를 더 짖겠다는 완악함과 똑같다 말이죠.

음녀와 다를바 없다 말이죠.

 

그런 점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즉 오늘 나오는 본문의 표현처럼 제단숫불로 부정함을 제거했다는 겁니다.

 

피로 사셨다는 겁니다.

 

누구에게? 부정하다 라고 외치는 이사야에게

오늘날로 치면 원수인 우리에게

제단 숯불로 부정한 입술의 부정함을 제거하듯이

머리에 숯을 얻어져

주린 원수에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른 원수에게 마실 것을 주시는

바로 인애와 자비 때문에

화목제물 때문에

우리는 원수로써

죄수복을 입은 자로써

이 피 용서를

이 특별사면이라는 피 도장을 외치는

죄인으로써 죄씻으신 분을 외치는 겁니다.

 

 

의인으로써 외치면 왜 안되는데?

기능이라는 선물 자체가

예상치 못한 원인 없는 결과인데

의인으로써 예수님을 외친다는 것 자체가

또 의 가 되기 때문에

육의 자랑에서 벗어날수가 없다 말이죠.

그게 바로 유대인 아닙니까

수건을 때려죽어도 안 벗어요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을 한 자들이 다 이래요

소위 기적을 체험 했거든요,

유대인은 그 기적을 수시로 체험했기에

절대로 수건을 벗을 이유가 없다 말이죠.


구원은 따 놓은 당상인 선택받은 민족임을

누가 보장한다? 하나님 자신이 보장한다 말이죠.
성경 말씀이 보장하고 있으니까 말이죠.

문제는 구약은 그런데

신약이 안그렇다는 겁니다.

 

아니 왜?

 

유대인이 누굴 죽였다

선지자를 죽이는 겁니다.

예수님도 죽였습니다.

 

신약의 예수님이 글쎄 유대인에 대한 구원에 보장을 단 한번도 안 해주더라 말이죠.

존재가 아닌

기능의 이스라엘을 새로 구성하는데

놀랍게도 유대인이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자들을 아예 유대인 보랍시고 이스라엘로 삼아서 구성하니까

이건 거리껴도 보통 거리끼는 걸림돌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 라는 걸림돌을 아예 대놓고 제거 했다 말이죠.
십자가 처형으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를 형성 합니다.
즉 너희도 이 꼴 나니 안 죽고 싶으면
나대지 말라꼬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말이죠.

하나님의 저주로써

나무에 달려 죽는 자는 하나님의 저주이니까 말이죠.
철두철미하게 각인시켰다 말이죠.
이게 바로 번제와 제사 입니다. 사람의 일이다 말이죠.

 

아 그런데 오히려 걸림돌을 제거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커지다 못해

유대인들 보다 더 커져 버렸다 말이죠.

밟으면 발을수록 오히려 더 커진다는 것을 알고 아예

외면해 버리는 겁니다.

 

그래서 자신들만의 하나님을 따로 구성하지

열국의 주님이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오히려 자기들이 싫어하는 그 예수님의 죽음이

도리어 열국의 주님을 외치는데 있어서

열국들이 반응을 하더라 말이죠.

 

오히려 그런 결과에 원인 없는 결과에

유대인들은 아직까지도 수건을 벗지 않는 완악함을 드러내고 있더라 말이죠.

이것이 성경 말씀 신약에 기록이 된 것 조차도 인정하려 들지 않더라 말이죠.

 

? 구약만이 진짜이고 신약은 가짜이기에

주인공이 예수가 되어버리면

자신들이 못 박아 죽인 그 십자가 사건을

스스로 인정하는 회개를 하게 되니

회개의 달인들이

회개로 먹고 사는 장사꾼들이

글쎄 다른 회개인 십자가를 인정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인간 쪽 즉 모든 인간의 대표성인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잘못 한게 없으니까

 

유대인의 잘못으로 추궁하는 예수님을 무조건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이유가 없어요

그냥 무조건 이다 말이죠.

 

주님은 이것을 이렇게 말씀 하십니다.

 

뭔가 잘못 되었다 말이죠

무엇이 잘 못 된 것일까요?

 

분명 좋은 씨를 뿌렸다 말이죠,

그럼 좋은 씨를 뿌렸다면 좋은 열매만 맺도록 되어 있는데

어찌하여 다른 열매가 나왔냐 하는 점입니다.

 

여기서 주님은 사단을 언급하시는 겁니다.

인간은 이 사단을 의식하지 못하나

주님만은 하신다 말이죠.

그래서 알곡과 가라지를 그냥 같이 내버려 두신다 말이죠.

추수때 까지 말이죠.

추수때에 알곡은 곳간으로

가라지는 불못으로 말이죠.

이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사람은 이런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없고

즉 종말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역사만 즉 행함만 관심이 있더라 말이죠.

모든 것을 다 갖추었는데 딱 하나

하나님의 일 하나만 빼 먹어버린다는 겁니다.

곧 십자가의 사건 말이죠.

 

여기에 상대적인 아버지의 말씀을 다 지킨 맏아들의 상대적인 탕자는

다른 것은 일체 단 하나도 갖춘 적이 없는데

오로지 딱 하나 십자가의 피 용서 만큼은 갖추게 되었는데

그것도 예수님의 반칙으로써 갖춘 것이지

탕자는 그저 심판의 자리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쳐다본

긍휼을 바라봤을 뿐이였다 말이죠.

 

그러니 말도 안된다 라고 어떻게 좋은 씨를 뿌렸는데 다른 열매가 나느냐만 따진다 말이죠.

이것은 자신의 행함만 의식하고 있지

주님의 일하심에는 관심이 없다는 겁니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의 일과의 차이성으로써 하나님의 일을 제시합니다.

 


마침 주일에 말씀을 나누는 중에 어머니께서

왜 이사야가 망해야 하는데 라고 물으셨다 말이죠.

월요일에도 다시 언급해서 나누었지만

우리는 생명을 외칠려면 생명을 가진자로써 생명의 자리에 놓여져서 생명을 외칠려고 하는데

성경은 정작 그 반대이다는 겁니다.

 

의를 외치기 위해서 의인의 자리에서 의를 외치는 것이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인간을 상대하지 않고

마귀에게 이미 장악당한 인간이기에

예수님은 마귀만을 상대로 하신다 말이죠.

 

마귀가 바로 광명한 천사로써

거짓선지자로서 바로 저런 것만 주장하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 말이죠.

 

인애와 자비를 원치 않아요.

 

교회 어디를 다녀도

인애와 자비를 원하는 교회는 없어요

모조리 다 저 마귀처럼

번제와 제사를 원하는데

너무 너무 노골적으로 아예 배 째라는 식으로 원하더라 말이죠.


교회나
불교나

갓바위나

성당이나

뭐가 다르냐 말이죠

결론은 돈으로 귀결 되더라 말이죠.

이런 입장에서 우리는 늘 예수님과 비교해야 합니다.

인간과 인간 끼리의 비교는 무의미 하다 말이죠.

 

예수님과 늘 비교해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늘 누구를 의식하시느냐 라는 겁니다.

누구와 싸우시느냐?

마귀죠.


인간 끼리의 싸움에서의 승리는 의미 없어요

마귀와의 싸움에서의 승리를 계시록에서는 천사들이 찬양하고 있다 말이죠.

그럼 찬양자는 혈과 육의 싸움을 하는 자가 아니라

주님이 누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셨는가만을 외친다 말이죠

그것도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바를 말이죠.

그러니 누가 꾀냐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말이죠.

 

그래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의를 외치기 위해서 의인의 자리에 서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의를 외치기 위해서 부정함의 자리에서 의를 외친다는 겁니다.

그래야 숨어있던 마귀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어머니께 축복산 그리심산과 저주산 에발산 이야기를 잠깐 했꼬

손가락이 가리키는 달 이야기를 통해서

 

왜 망한 자리에서 누구만이 승리했다를 찬양자는 말하는지

찬양자 본인의 찬양솜씨를 배제하기 위해서

전적으로 저분이 홀로 다 이루신바를 말하기 위해서

오히려 찬양자는 찬양자인데

벙어리 찬양자가

외친다는 점에서

 

오히려 벙어리 아니다고 하는 자에게서의 찬양은

전혀 하늘에 올라가지도 못하고 있음을 밝히 보여주는 겁니다.


대로(큰 길)에서 기도하는 기도가 올라가지 않고

골방에서 하는 기도가 하늘에 올라간다고 하니

이게 말이 되냐 말이죠.

기도의 기능이 기도의 사람으로 만든다는 거지

기도해서 기도하기를 실천하는 존재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망했다는 것은

기능이지

개인적인 실패를 말하는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이미 승리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차이로써 구별로써 거룩으로써

저들 빛의 아들들과 차이나게

불의한 청지기가 찬양하는 그 찬양이 하늘에 올라가더라 말이죠

빛의 아들들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 말이죠

부정의 부정이다는 겁니다.

 

하늘에서 작살을 던져서 벙어리의 찬양을 낚아 버리는 겁니다.

탕자의 망한 자리를 하늘에서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작살을 던져 낚아 버리는 겁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낚아 버리는 겁니다.

그 결과의 증상물로써

결국 짜고 치는 고스톱

십자가의 자작극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의인을 부르러 온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겁니다.

 

죄인이 옳아서? 죄인이 옳으면 그게 죄인입니까? 의인이지

그렇게 되면 의인을 부르러 왔다는 결론이 된다 말이죠.

 

그러니 존재로 파악하는게 아닙니다.

기능으로써 파악한다 말이죠.

 

기능이 뭡니까? 시공간의 해체입니다.

인간 배제입니다.

존재 배제입니다.

그래서 의사라는 병고치는 자의 기능을 말할려면 즉 알려면

죄인이라는 환자 병자만이 의사의 기능에 부합된다 말이죠,

 

자 그래서 생명을 외칠려면

생명을 볼려면

산 자의 자리에서 봐야 할까요

죽은 자의 자리에서 봐야 할까요

 

죽은 자입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때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여전히 모릅니다.

그런데 물에 확 빠뜨려 죽게 한 뒤에

예수님이 건지게 되면

그 죽음의 자리에서

쫄딱 망한 자리에서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제대로 보게 된다 말이죠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으며

없는데

없고 없고

쫄딱 망했는데

그 슬픔의 자리에서

기쁨의 여호와를 노래한다고 하니

이런 불가능한 노래는

그 어떤 가수도 못 부르고 배운 적도 없는

유리바다를 건너면서 부르는 신나는 새노래 이다 말이죠.

 

새노래 라는 단어가 성경에 나오니까 좋다 싶어서

명땡교회가 새노래 명떙교회로 이름을 더 붙였는데

죽음의 자리에서 외치는게 아니라

부요하고 황금옷을 입고 겹겹으로 두루두루 도배를 했으나

도리어 헐벗어서 너무 너무 추워보여서

제발 좀 불에 타지 않는 옷 좀 사서 입으라고 비웃더라 말이죠.

 

이런 명땡교회는 잘도 비판을 아직까지도 하고 있으면서도

성추행교회는 딱 한번 언급하고 치우는 것 보니까

말이 기독언론이지 적폐언론과 다를바가 없더라 말이죠.

 

같은 편은 봐주고 zz

 

그래서야 구체적 보편성이 되겠습니까?

죄수복을 입고서 구원자를 외쳐야

마귀가 숨어있던 마귀가 나타나면서 반응하는 겁니다.

마귀가 반박하지 않는 복음이면 다른 복음이다 말이죠.

 

그러니 죄수복을 입고서 외치는 구원자의 증상물을

마귀가 덮썩 무는 겁니다.

 

쫄딱 망하게 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론 입 속에 집어넣으니까

멋도 모르고 바벨론은 좋다 싶어서 이스라엘을 잡아먹지만

정작 그 이유로 바벨론은 입이 찢겨지고

이스라엘은 그 큰물고기 입 속에서 구원을 얻는

 

무화과 나무 잎이 말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새노래를 부르는 자가 되어서 새노래를 부르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 땜에 말이죠

그 결과가 바로 남겨진 씨가 떳기 때문에

망하는 자가 되어서

주의 영광을 외치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자기 죄나 부모 죄 때문이 아니라

존재, 조건, 원인,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미래완료인 십자가의 다 이루심 때문에

그 증상물로서 소경이 된

기능이 된

누구를 말하는 누구와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왜 죄수복을 입고서 찬양하는 것일까요?

피 발라주신 피 흘리신

죽임 당한 어린양을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죽임 당한 어린양의 승리가 이미 덮쳐졌기 때문에

그 증상물로써 죄수복을 입은

망한 자의 자리에서

죽은 자로써 생명의 주를 외치는 겁니다.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모든 것이 죽임 당한 어린양의 피 흘리심의 공로이지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없기에

찬양 아니 할 수가 없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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