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자만 돌아오리라 (7: 1- 9)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10:16, 개역)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10:3, 개역) 갈지어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7:1, 개역)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 때에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가 올라와서 예루살렘을 쳤으나 능히 이기지 못하니라

(7:2, 개역) 혹이 다윗 집에 고하여 가로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 백성의 마음이 삼림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7:3, 개역) 때에 여호와께서 이사야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아들 스알야숩은 윗못 수도 끝 세탁자의 밭 큰 길에 나가서 아하스를 만나

(7:4, 개역)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삼가며 종용하라 아람 왕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심히 노할지라도 연기나는 두 부지깽이 그루터기에 불과하니 두려워 말며 낙심치 말라

(7:5, 개역) 아람과 에브라임 왕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악한 꾀로 너를 대적하여 이르기를

(7:6, 개역) 우리가 올라가 유다를 쳐서 그것을 곤하게 하고 우리를 위하여 그것을 파하고 다브엘의 아들을 그 중에 세워 왕을 삼자 하였으나

(7:7, 개역) 주 여호와의 말씀에 이 도모가 서지 못하며 이루지 못하리라

(7:8, 개역) 대저 아람의 머리는 다메섹이요 다메섹의 머리는 르신이며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리야의 아들이라도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하여 다시는 나라를 이루지 못하리라 만일 너희가 믿지 아니하면 정녕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셨다 할지니라

(7:9, 개역) 8절과 같음

 

(7:1, 새번역) 웃시야의 손자요 요담의 아들인 유다 왕 아하스가 나라를 다스릴 때에, 시리아 왕 르신이 르말리야의 아들 이스라엘 왕 베가와 함께 예루살렘을 치려고 올라왔지만, 도성을 정복할 수 없었다.

(7:2, 새번역) 시리아 군대가 에브라임에 주둔하고 있다는 말이 다윗 왕실에 전해 지자, 왕의 마음과 백성의 마음이 마치 거센 바람 앞에서 요동하는 수풀처럼 흔들렸다. / 또는 '에브라임과 동맹을 맺었다는 말이'

(7:3, 새번역) 그 때에 주님께서 이사야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너의 아들 스알야숩을 데리고 가서, 아하스를 만나거라. 그가 '세탁자의 밭'으로 가는 길, 윗못 물 빼는 길 끝에 서 있을 것이다. / '남은 자가 돌아올 것이다'

(7:4, 새번역) 그를 만나서, 그에게, 정신을 바짝 차리고, 침착하게 행동하라고 일러라. 시리아의 르신과 르말리야의 아들이 크게 분노한다 하여도, 타다가 만 두 부지깽이에서 나오는 연기에 지나지 않으니,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라고 일러라.

(7:5, 새번역) 시리아 군대가 아하스에게 맞서, 에브라임 백성과 그들의 왕 르말리야의 아들과 함께 악한 계략을 꾸미면서

(7:6, 새번역) '올라가 유다를 쳐서 겁을 주고, 우리들에게 유리하도록 유다를 흩어지게 하며, 그 곳에다가 다브엘의 아들을 왕으로 세워 놓자'고 한다.

(7:7, 새번역) 주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이 계략은 성공하지 못한다. 절대로 그렇게 되지 못한다.

(7:8, 새번역) 시리아의 머리는 다마스쿠스이며, 다마스쿠스의 머리는 르신이기 때문이다. 에브라임은 육십오 년 안에 망하고, 뿔뿔이 흩어져서, 다시는 한 민족이 되지 못할 것이다.

(7:9, 새번역)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이고, 사마리아의 머리는 고작해야 르말리야의 아들이다. 너희가 믿음 안에 굳게 서지 못한다면, 너희는 절대로 굳게 서지 못한다!"

 

(10:22, 개역)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10:22, 공동) 이스라엘아, 너의 겨레가 바다의 모래 같다 하여도 살아 남은 자만이 돌아온다. 파멸은 이미 결정된 것, 정의가 넘치리라.

(9:27, 공동) 그리고 이사야는 이스라엘에 관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이 구원을 얻으리라. / 이사 10:22-23(호세 1:10 상반 참조).

 

(1:10, 개역)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되어서 측량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을 것이며 전에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사신 하나님의 자녀라 할 것이라

(1:10, 새번역)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져서, 얼마나 되는지, 아무도 되어 보거나 세어 볼 수 없을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사람들이 너희를 로암미라고 부른 땅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부를 것이다.

(9:26, 새번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 1:10 , '아들들'

 

 

예언이란 단절성입니다.

즉 인간은 종교성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뭘 줘도 다 믿을려고 달려듭니다.

무엇을 던져줘도 자기 구원이랑 연결 시키기 때문입니다.

종교꾼만 그럴까요? 모든 인간은 결국 자기생존과 연결 시키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은 악한세대가 기적을 요구한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 죽음과 연결 시킬 리가 없을테니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줄 기적은 요나의 표적

즉 모든 인간의 믿음으로써는 도저히 불가능한

단절의 십자가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는 겁니다.

 

생존은커녕, 구원은커녕

죽음 뿐이요 저주 뿐인 심판 뿐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해야 할 판국을 거꾸로 보더라 말이죠

거리끼는 걸림돌이 될 수 밖에 없고(유대인)

누가 자신이 달려 죽어야할 십자가를 믿느냐 라고 어리석고 미련하다고(헬라인)

지혜가 아니다고 봅니다.

 

결국 인간의 믿음에서는 배신에 해당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 라는 부조리입니다.

모든 인간의 믿음을 차단하는 겁니다. 단절 하는 겁니다.

 

마침 어머니께서 제가 자주 존재와 기능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니까

귀에 익숙해서 그 단어를 되내이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상 그렇게도 수도없이 들어왔던 이야기입니다.

존재는 육이고

기능은 영 곧 성령의 은사와 같은 것이다 라고 했거든요.

 

존재와 기능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들었을때에는

이것이 뭔가 싶어서 생각과 고민을 하게 됩니다.

낯선 단어이거든요

 

그런데 육과 영 이라고 종교에서 수도 없이 들어왔던 단어로 이야기하면

아예 생각을 하지 않게 됩니다.

익숙한 단어이니까 말이죠

 

이것이 단어라는 문자에 의해서 인간은 생각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어머니께서 잘못 된게 아니라

문자가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들어 버린다는 겁니다.

 

자기가 죄 짖는게 아니라

내 속의 죄가 죄를 짖도록 한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육입니다.

단절이란 또는 기능이란 이렇게 갇힌 인간임을

즉 육임을 전제로 하고 펼쳐지는 새로운 의미이다는 겁니다.

 

오호라 나여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즉 사도바울은 또는 이사야는 못 벗어나는 갇혔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말은 동시에 누가 알려줬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자기가 아무리 철학 신학의 대가가 되어도 자기 스스로 갇혔다는 것을 아는 자는 없습니다.

즉 단절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알려줘야만 한다는 것은 결국 모든 자존심과 자아를 허물면서 다가오기 때문에 비로소 알게 된다 말이죠.

그러니 원인 없는 결과로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는 겁니다.

 

듣기는 들어도 알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이사야 본인은 그럼 알까요? 모릅니다.

 

자기가 모르면서

모르는 자기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외부에서 알려주신 바 외에는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는 마음 놓고 나는 모른다고 라고 당당하게 외치면서

그럼 너는 모르면서 어찌 알게 되었노? 저 분이 알려 주셨단다 라고 외치게 되는 겁니다.

 

죄수복을 입고서 피를 외친다는 의미처럼 말이죠

 

즉 단절 자체가 이미 다 이루었다는 십자가의 완료에서 온다는 겁니다.

계시록으로 치면 일곱 이라는 완성에서 온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 완료의 증상으로써 기존의 것은 단절 되어야 한다 말이죠

? 육이니까

? 새 영이 아니니까

 

이 단절 되는 즐거움

이 단절의 즐거움이 바로 십자가라는 완료의 증상이다 말이죠

이 증상을 즐겨라 말이죠

 

그러니 오늘 나오는 이사야의 예언은 곧 단절성입니다.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단절성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단절성

그렇다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라고 단절성으로써 저는 끊어진 자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할 판국인데

 

오히려 나야 말로 저 세리처럼 끊어진 자가 아니라 연결 된 자입니다

그 연결성이 바로 십의 이조를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저 세리처럼 토색하지 않고

안식일을 지키고 (안식 날을 어기는 예수님의 제자와, 손마른 자와 대조적으로)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켰고 (부자청년)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고(탕자와 거리두기를 한 맏아들)

 

그러니 나야 말로 단절이 아니라 연결된 이어진 연합된 자로써 합당하지 않느냐 에 대한

예수님의 미리 차단하는 것이 바로 비유입니다.

비유는 그야말로 불가능성만 이야기 하고 있기에

 

다들 반응이 그럼 누가 구원 얻습니까 라는 단절성을

자기들 입으로 스스로 고백케 만들어 버린다는 점입니다.

 

즉 부자청년만 근심하고 등돌려 돌아간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 마저도 이 비유를 듣고 그럼 누가 구원 얻습니까 라고 할 정도로

인간의 믿음이 순식간에 아작 아작 다 부서지더라 말이죠

공든 탑이 하루 아침에 다 무너지는 겁니다.

성전을 헐라 3일만에 짖겠다

아니 그럼 46년 동안 지었던 그 의미는?????

 

결국 성경은 딱 이거 하나입니다.

46년 동안 지은 성전, 그냥 전, 궁궐이 아니죠. 거룩한 하나님의 성전이지요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면서 지은

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해서 이루어 내는 기적이다는 겁니다.

 

이 성전이냐, 이 이스라엘이냐, 이 사울왕이냐?

 

아니면 따로 꼬불쳐 놓은 남겨진 씨 이냐?

 

바로 이런 성전이냐 곧 예수님 자체가 성전이냐

예수님 자체가 참이스라엘이냐

다윗의 자손이냐 라는 겁니다.

 

3일 만에 짖는 성전, 불가능한 성전,

곧 예수님의 몸, 그냥 몸이 아닌

십자가에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버림받아(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죽으신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삼일 만에 살리셔서, 그냥 부활의 존재가 아닌

부활의 기능 즉 너희가 죽인 예수를 너희의 주로(머릿돌) 되게 하시는 부활의 기능

즉 삼일의 간극으로써 말도 안되는 불가능한 믿음을 이루었다는 겁니다.

 

오죽 하면 거리끼는 걸림돌이고 왜 건축자가 버린 돌이 머릿돌 되었으니

반박을 못해요 구체적 보편성이고

여전히 개같은 이방인에게 왜 그런 아무것도 아닌 의미 없는 짖에 목숨 걸었냐 라고

지혜롭지 못하고 어리석고 미련하다고

이 십자가의 지혜를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비유는 이 단절성을

 

인간이 1234로 시공간을 채워 바리새인을 넘어서

예수님께 다가가는 모든 방식을 다 차단하겠다는 겁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을 타 넘어서 오겠다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 라는 죽음 곧 단절이다 말이죠 화목제물입니다.


(요일 4:10, 개역)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

(요일 4:10, 새번역) 사랑은 이 사실에 있으니, 곧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의 죄를 위하여 화목제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5:20, 개역)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즉 모든 인간이 바리새인이니까
나 자신의 믿음을 타 넘어서, 나를 내가 넘어서 가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넘어선 그 자리에 또 내가 또 있으니까 또 넘어야 하니 말이죠

()의 그 어떤 것도 모조리 다 단절 시켜서, 부정케 해서

내가 아닌 예수님이 나를 타 넘어서오시겠다는 겁니다.

 

나는 부자청년처럼 구원 받고 픈데

부자가 천국가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러니 다들 부자처럼 구원받을줄 알았는데 안된다고 하니

다들 이구동성으로 그럼 누구 구원받을수 있겠습니까 라는 겁니다.

 

부자청년처럼 구원받을려고 율법지킨 것들이 부도수표 맞아버린 심정이다 말이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전혀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말이죠

거지가 되었는데 이 가난한 자에게 자기 전재산인 목숨을 버린

화목제물로 오신 분이 졸지에 생겨 버리니까

구원을 예상하지도 못했는데 주어지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이다는 겁니다.

 

부자청년의 하나님과

화목제물을 받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 다르다는 겁니다.

 

여기서 부자와 가난한 자는 기능이지 존재가 아닙니다.

즉 예수님을 말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가난한 자인 예수님의 전재산인 목숨값을 받은 자를 말하고 곧 피로 사신 교회처럼 말이죠

피의 증상물이 교회이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으로 표현하면 남은 자는 돌아오리라 라는 스알야숩이라는 이름의 이사야 아들이고

 

반대로 부자청년의 하나님은 과거의 한 번의 체험으로써의 하나님을 운운할 뿐이지

예언 곧 미래완료에서 덮쳐지는 즉 피의 증상물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러니 자꾸 이스라엘이다 라고만 우길 뿐이지

이스라엘 속의 남은 자 라는 개념은 이 부자청년에게는 없게 되는 거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는 것을 한 순간에 다 날려버리는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영광의 주를 봐버렸다가 없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 남겨진 씨가 뜨게 되니까 심판의 죽음 뿐이고

그 영광 앞에서 나의 거룩은 저울에 달아 보니 택도 없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그런 판국에 과거의 은혜 받았다는 것을 우려먹을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자꾸 모자라고 부족한 함량미달의 거룩을 완벽한 거룩 앞에서 들이댄다는 것이

소용이 없다는 겁니다.

 

졸지에 하나님의 달라요 글쎄

한 쪽은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 속에서 오로지 남은 자만 구원하신다는 남은 자는 돌아오게 하는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말이죠 니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는 겁니다.

 

한 쪽은 자기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이고(전체 이스라엘의 하나님)

(너희가 나를 사랑한 것이 아니요)

 

다른 한 쪽은 화목제물 때문에 피로 사신바 된 남은자만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로 오겠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달라요 글쎄

이스라엘 전체의 하나님과 vs

이사야의 하나님 곧 스알야숩의 하나님이 서로 다르다는 겁니다.

 

결국 전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결국 부자청년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이 하나님이 아니요

스알야숩의 하나님이다는 겁니다. 자 이러니까 다들

 

그러면 과연 누가 그럼 구원 얻겠습니까 라는 반응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이렇게 아무도 구원이 안된다고 당황한 가운데에

그 와중에 더더욱 큰 한방을 먹이십니다.

즉 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 없다고

그렇게 수 많은 기적을 보고 따라왔던 자들이 이 말 한마디에

드디어 절반이 아니라 99프로가 다 떨여져 나가버리는 겁니다.

남아있던 제자들에게도 낙엽 막 뿌리면서

가 가란 말이야 (정우성)

요즘은 새 버전 특 가란 말이야 ~~~

 

간따나 멘탈붕괴인데

또 한방을 먹이니 그야말로 멘붕의 멘붕 밖에 없죠

화로다 화로다 나여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단절성을 누려야 할 판국인 즐겨야 하는데

다들 그럴빠에 자기 쪽에서 단절 시켜서

다른 연결 소통을 찾아나서는 겁니다.

 

주님이 남은자 찾는게 아니라

잃어버린 자 찾는게 아니라

 

본인이 다른 주인을 찾아요

다른 하나님을 찾더라 말이죠

이미 이전 것으로 갖춘

어릴떼부터 다 지킨 율법으로 구원해 줄 하나님을 찾더라 말이죠

 

이것을 거부하고 오로지 화목제물 곧 남은자만 돌아오게 하는 남은자 찾는 예수님을 거부하고

예수님은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아니다 말이죠

구원자가 아니다 말이죠 자기 백성을 자기 죄에서 건져내는 자로 못 보니까

내가 말라꼬 예수의 살과 피를 먹어야 하나

즉 율법 어겨야 하나

난 살인자 죄인이 되기 싫타 라고 말이죠

 

그 정도로 나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죽은자란 말입니까?

수혈 정도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복제 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한다 말이죠

그 속에 개성이 뭐가 필요하며

자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다 라고

아예 갈아엎어버렸다 말이죠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가 로봇이라는 말이냐?

자유의지를 마귀가 심은 줄 모르는 겁니다.

의지라는 선택권이 있다면 과연 죄의 문턱을 넘어서 보라 말이죠

죄는 인간에 의해 좌우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가 인간을 다룬다 말이죠

 

이 죄가 왕노릇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죽기를 무서워 종노릇하는 관계이다 말이죠

기능으로 보고 있지 즉 육으로 보고 있지

 

존재로 안 본다 말이죠. 독자적인 단독자로 안 본다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을 안 보고 그 인간을 종으로 삼은 왕노릇하는 죄만 상대하신다 말이죠

 

즉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질 구원자가 예수님인데

졸지에 죄인이 없어요 글쎄

갇힌 자가 없어요

다들 의인들 밖에 없고

건강한 자 밖에 없는데 어떻게 구원자가 필요하겠냐 말이죠

 

여기에 인간은 자꾸 나는 로봇이란 말이냐 나는 자유의지가 있다고 자꾸 깝쭉대더라 말이죠

자유의지 인은 긍정적인 의인으로 보이고

로봇 인은 부정적인 죄인으로 보이니까

자꾸 버럭 화를 내면서 그럼 내가 죄인이라는 말이가 라는 식이다 말이죠

 

존재의 특징입니다. 육들의 특징이 그런 반응이다는 겁니다.

 

이런 자유의지 문제를 가지고 덤벼드는 자들이 한 둘이가 아니였다 말이죠

 

자꾸 존재로 봐 달래요 글쎄

 

아니 이사야도 사도바울도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왕노릇하는 두 실상을 외치는 기능인데

자꾸 존재로 우기니까 다른 이야기를 하는 줄 모르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나오는 이사야의 아들 스알야숩이 나오는데

이 스알야숩을 존재라고 우기는 자들에게

마치 늑대들에게 양을 보내듯이 기능을 보내는 겁니다.

 

존재들 속에 기능 말이죠.

육 혈과 육 혈통 피동맹존재 속에 기능 곧 하나님의 뜻을 보내니까

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일까요 아니면

오히려 옳타쿠나 드디어 상속자가 왔구나

이 상속자를 죽이면 이 땅은 우리 것이겠구나 라고 할 까요

 

괜히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는게 아닙니다.

이것이 기능이거든요 하나님의 뜻이다 말이죠.

 

자유의지 곧 선택권리가 있는자는 절대로 못 갑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하는 이사야만이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라는 물음에

저요 저요 라고 한다 말이죠

 

12제자는 아예 그것도 생략 바로 투입이 됩니다

의견도 안 물어요

그래서 양을 늑대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라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맛물리도록

역이도록 미끼가 되라는 거죠

 

순결한 비둘기 같이

뱀같이 지혜롭게

 

순결은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깨끗함이 아니라

저 세리와 같이 토색하지 않음을 감사합니다가 아니라

제대로 된 거룩 앞에서 나야 말로 이제 쫄딱 망했구나

저 분이 나를 제대로 심판하실 분이다 라고


그럼요 당연하죠 네네 심판 이라고

오히려 제일 먼저 탈락 짤리고 심판받는 겁니다.

어차피 다 심판인데 빨리 제일먼저 심판받고 주님의 하신일을 보자 말이죠

 

매도 먼저 맞는게 낫다고

빨리 빨리 퍼뜩 퍼뜩 누락 되자 말이죠

아브라함도 탈락

모세도 탈락

다윗도 탈락

그래서 다들 예수님의 때를 기다린다 말이죠

 

그릇에 보배가 담겼다면 빨리 보배 때문에

그릇은 깨어지자 말이죠

보배만 나타내고 퍼뜩 퍼뜩 누락되자 말이죠

괜히 쇠 그릇을 유리그릇 만들어 보겠다고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지킬게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스알야숩이 남은자만 돌아온다고 예언으로서 기능으로써 계시로써

이미 게임 끝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음 으로써 예언이 펼쳐지니까

비로소 이 다 이루심 앞에서 더 이상의 할 것이 없는데

오히려 비로소 뭘 하겠다고 부랴 부랴

연결이니 연합이니 개방이니 하는 것들을 부랴 부랴 모으더라 말이죠

 

그래서 모은 것이

이스라엘 전체의 하나님 곧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지킨것들 다 모아서

구원 어떻게 받냐 라고 묻는 것처럼 말이죠

 

그런데 스알야숩은 이미 게임 끝 남은 자만 돌아옴

이것이 이사야의 하나님

스알야숩의 하나님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그런데 자꾸 딴 하나님을 외쳐요

과거의 이전 것의 하나님을 말이죠

새 하나님이 떠 버린 이상

기존의 것은 삭제다 말이죠

 

요한계시록으로 표현하자면

지금 일곱 인 하고 있는데

인을 하나 하나 뗄 때 마다

지향점이 일곱에 있다 말이죠

 

일곱이라는 창조가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에 벌어지는데 있어서

이 창조로 인해

첫 번째 인이 떼어지고 그리고 밀려나죠

사라집니다

우리가 이렇게 누락 되어야 한다 말이죠

오로지 일곱만 남으면 된다 말이죠

 

그렇게 일곱인 일곱나팔 일곱대접으로써

구원전쟁이 이미 승리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기 때문에

그 승리한 분만 흥하고

니는 쇠하고 누락 되면 된다 말이죠

 

그렇게 다 누락 되고 예수님만 남았을때에

예수님에게서 다시 잃어버린 동전 찾듯이

남은 자를 찾으신다 말이죠

 

인을 뗄 때 마다

나팔을 불 때 마다

대접을 부을 때 마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다 떨어져 나간다 말이죠

다시 찾는 것은 예수님의 몫이지 우리 소관이 아니다 말이죠

 

그러니 믿음은 선물 곧 예상치 못한 선물이다 말이죠

아브라함도 떨어져 나갔고

모세도 탈락 했꼬

다윗도 탈락 했는데

 

예수님이 남은자로써 그 잃어버린 자를 찾으셨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징조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남은 자만 건지시는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만이 진짜 하나님으로써

자기 백성 곧 이스라엘이 아닌 이스라엘 속에서 남은 자만 돌아오게 하시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지실 분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그냥 개같은 이방인이 아니라

그것도 귀신 들린 딸의 어미가

(이중 불가능성, 이중 부정)

 

나는 이스라엘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고 하시는 예수님의 댓꾸에

토 토 토를 다는 겁니다.

 

네 맞습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말이죠

 

(15:21, 개역)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15:22, 개역)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15:23, 개역)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예수님은 이스라엘 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즉 남은 자 외에는 이라고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다고 하신다 말이죠

 

아니 이 개같은 이방여자가 임마누엘이 뭔지 알기나 합니까

그것을 아는 자는 유대인 뿐이다 말이죠

 

그런데 왜 예수님은 이 임마누엘의 하나님이라는 기능을 왜 이 여자에게서 펼치실까요

맞습니다 유대인 거부입니다.

 

이상하죠 이스라엘 속에서 남은 자를 찾아도 될까 말까 한

마태복음 곧 유대인들 대상으로 한 복음으로도 안 되는 판국에

버젓이 대놓고 이 여인에게서 남은자 라고 찾았다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누가복음은 아예 대놓고 잃어버린 동전 찾았다고 하시니

듣는 유대인 코 앞에서 얼마나 대 놓고

예수님 자신이 임마누엘 하나님이라고

유대인 손에 아예 죽을려고 대 놓고 딴 하나님을 이야기 하고 있으니

참람죄 정도가 아니죠

하나님 모독 죄는 유대인들이 가장 못 참는 것 아닙니까

그것을 대 놓고 집중적으로 빡빡 끓어대니까 못 참는 겁니다.

 

이것이 남은 자의 하나님인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유대인은 이제 이 하나님과는 영영 단절입니다.

뭐 아쉬워 할 것 하나 없이

기존의 하나님이 있다 말이죠

오죽 하면 자기들은 모세의 제자 라고

천삼백년 묵은 모세 종교라고 우기는 판국에

겨우 삼년된 예수라는 신흥이단을 쫏는 것은

자기무덤을 파는 것과 같은 짓이다 말이죠

 

문제는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죄악을 제대로 심판 하시는 분은

천삼백년묵은 모세가 아니라

삼년짜리든 일년짜리든 1초 짜리든

이 죄악을 심판 하더라 말이죠

 

아니 그럼 천삼백년묵은 모세씨 께서 아니면 모세의 제자씨 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이 죄악을 심판을 제대로 하시던가?

 

누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져낼자냐 말이죠

 

차라리 소경이면

차라리 죄인이면

차라리 환자라면

고침을 받을텐데

 

소경 아니다 눈 떳다

죄인 아니다 의인이다

환자 아니다 건강한 자이다 라고 우기니까

 

예수님과 무관하다고 모세 우려먹더라 말이죠

모세도 탈락 당해서

예수님께서 건져 내지 못하면 안되는 판국임을

변화산에서 제발 죽어주세요 라고 할 정도로

엘리야도 이미 불병거 타고 하늘로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는 그저 모형이고 맛배기일 뿐이고

실상이 예수님이니까 당연히 제발 죽어주세요

이제 실상을 나타내소서

십자가를 나타내소서 라고 할 것 아니냐 말이죠

모세도 이 귀신들린 딸의 어미처럼

불쌍히 여겨 달라고 구걸하는 판국에

임마누엘의 하나님의 외치는데

유대인은 거부하더라 말이죠

이스라엘은 거부해요 왜? 이미 기존의 하나님이 있는데

말라꼬 새 하나님을 믿냐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사야가 구약에 있다 말이죠

신약이 아니라

이미 예언 했다 말이죠

이제 유대인들 곤란해 진 겁니다.

그러니 그들은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이 말씀을 누가 이루시는지에 대한 징조를

임마누엘의 징조를

마치 시편 달달 어릴적부터 외워도

오히려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을 죽였듯이

임마누엘을 달달 외워도 결국 거부한 겁니다.

 

아니 사실상 당연합니다

인간의 믿음으로는 불가능하거든요

과거의 경험으로 체험한 것으로 끌고나가기를 원하지

어제 믿었던 예수님이 익숙해졌고

그 어제의 예수님을 다시 믿고파 하는 것이

인간의 믿음인 반면에

 

예수님의 믿음은 미래완료에서 왔기에

어제의 예수가 아니라

오늘의 예수님은 새롭다 말이죠

이 새것 앞에서 왜 어제의 지나간 것을 운운하느냐 말이죠

사랑은 늘 새로운데 말이죠

 

그야 말로 믿음이란 말도 안되는 것인데

자꾸 말이 되는 스토리텔링으로 축적 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게 부자청년이다 말이죠

 

새로움은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다 나누어 줄 정도로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어주는 사랑이다 말이죠

 

그 사랑 앞에서

자꾸 어제까지 모은 율법 지킨 것 저금통에 모아왔습니다

얼마를 더 채우면 구원 될까요

남을 7번 용서할까요?

 

구원이든 용서이든 사랑이든 믿음이든 모조리 다 가능성으로 해석했다는 겁니다.

즉 이스라엘을 가능성으로 해석했다는 겁니다, 존재로 말이죠

 

이스라엘은 불가능성인 기능입니다.

마치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과 같은 육체로 따라 난 것이 아니무이다

 

그러니 불가능의 연속성이다 말이죠

남은자는 그런 의미의 기능인데

이것을 또 존재로 해석하니까

모조리 자기는 지켰다고 이제 구원 가능하지요? 라고 묻는데

묻는 쪽쪽 퇴짜를 맞아서

도저히 불가능한 구원인

단절성을 격도록 하더라 말이죠

 

이 단절성이 옳았습니다

이 심판이 옳았습니다 라고 즐겨야 할 판국인데 말입니다.

 

누가 누릴수 있겠습니까 말이 되는 소리이어야지

 

이 단절성을 오히려 이사야와 스알야숩은 누리고 있고

반대로 전체 이스라엘은 거부하고

기존의 하나님을 우려먹으면서 버티는 겁니다.

낯선 것 보다 익숙하고 이미 체험한 것이 안전하지

새롭고 낯선 것은 그야말로 위험하고 도박처럼 한 순간에 다 날려 버릴수 있는데

뭘 믿고 선뜻 나서겠냐 말이죠

 

인간 곧 존재 또는 육 또는 혈통이 하는 새로움이란

새로운게 아니라 기존의 것을 연결해서 이어와서 하는 것이고

 

너희는 못하나 하나님이 하시는 그 사랑은 결국

 

상속자가 죽어야만 하는 일들을 겁도 없이 벌컥 벌컥 벌리시는 믿음이다는 겁니다.

이게 사랑이다 말이죠

 

?

이 십자가의 죽음 외에는

요나의 표적 외에는

 

다른 방법으로는 구원

곧 죄악을 들추어낼수가 없으니까 말이죠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는 기능이니까

 

화목제물 방식이 아니고서는

기존의 하나님에서 못 벗어나는

부자청년의 하나님에서 갇혀버렸다 말이죠

마귀가 심은 하나님이다 말이죠

육의 경험, 체험 속에 머무는 하나님이다 말이죠

 

그러니 때려죽어도 수건을 안 벗는다 말이죠

 

오죽 하면 사라질 영광도 이렇게 영광스러운데

살리는 영의 영광은 오죽 하겠냐 말이죠

더 나은 예수님의 믿음만 있으면 되지

왜 구지 의문의 자기 믿음을 따로 가져서

엉터리 하나님을 믿냐 말이죠

그러니 의문의 제사와 번제를 자꾸 우려먹는 겁니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인애와 자비만을

화목제물만이 다 이루었다 말이죠

 

(고후 3:6, 개역) 저가 또 우리로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케 하셨으니 의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

(고후 3:7, 개역)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개역)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개역)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후 3:10, 개역) 영광되었던 것이 더 큰 영광을 인하여 이에 영광될 것이 없으나

(고후 3:11, 개역) 없어질 것도 영광으로 말미암았은즉 길이 있을 것은 더욱 영광 가운데 있느니라

(고후 3:12, 개역) 우리가 이같은 소망이 있으므로 담대히 말하노니

(고후 3:13, 개역)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로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치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고후 3:14, 개역)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고후 3:15, 개역)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개역)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개역)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고후 3:18, 개역)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자 그래서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남겨둔 씨가 떳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스라엘을 애굽의 입 속에 바벨론의 입 속에 집어넣는 겁니다.

그리고 남은 자만 돌아오는 겁니다

 

이 남은 자를 또 유대인들은 자기자신으로써

존재의 경험

육의 경험 속에 집어넣음으로써

정작 남은 자는 돌아오시게 한 구원자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지식고자

화목제물이 되신 분은 빠드린채

 

남은자의 조건에 맞은 육체의 경험을 추구하다가

정작 구원자는 자기 손으로 죽여서

구원이 날라가 버렸다고

아무리 십자가를 봐도

거리끼는 걸림돌 뿐이지

영광으로 안 보이는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는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냐 말이죠

자기가 자기를 꾄다 말이죠

 

이 스알야숩 이라는 남은자는 돌아온다는 이 예언을 통해서

얼마나 우리가 엉터리 하나님을 매일 매일 생산하고 있는지

아무리 생산해도 인애와 자비가 아닌

의문의 번제와 제사만을 반복할 뿐인

가능성만 추구하고

 

불가능성의 안식의 주인이 터트리는 그 사건에

아무도 못 보고 못 듣는

듣기는 들어도 알지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 단절성 앞에서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저는 뭘 해도 죄인일 뿐입니다 라고

이 개같은 자에게도 주인의 밥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 긍휼만이 살릴수 있지 않습니까 라고

 

주의 사랑이 매일 매일 이 십자가 라는 낯설고 위험한 사랑을 펼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다 이루어졌기에 벌어지는 증상임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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