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 듣고서 깨달아서 고침을 받게 될까 두려워 하시는 예수님 (6: 9-13)

 

보고서 듣고서 깨달아서 구원받는 복음(거룩한 씨)은 없다.

 

(6:9, 개역)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11, 개역) 내가 가로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거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가 전폐하게 되며

(6:12, 개역) 사람들이 여호와께 멀리 옮기워서 이 땅 가운데 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6:9, 새번역)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너희가 듣기는 늘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못한다.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못한다' 하고 일러라. / 칠십인역에는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는 못하고, 너희가 보기는 늘 보아도 알지는 못한다'

(6:10, 새번역)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 칠십인역에는 '이 백성의 마음은 둔해졌다. 그들은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눈은 아예 감아 버렸다.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6:11, 새번역) 그 때에 내가 여쭈었다. "주님! 언제까지 그렇게 하실 것입니까?"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성읍들이 황폐하여 주민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이 없어서 집마다 빈 집이 될 때까지, 밭마다 모두 황무지가 될 때까지,

(6:12, 새번역) 나 주가 사람들을 먼 나라로 흩어서 이 곳 땅이 온통 버려질 때까지 그렇게 하겠다.

(6:13, 새번역) 주민의 십분의 일이 아직 그 곳에 남는다 해도, 그들도 다 불에 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13:14, 새번역)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 / 6:9; 10

(4:12, 새번역) 그것은 '그들이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셔서, 그들이 돌아와서 용서를 받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6:9; 10

(8:10, 새번역)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을 허락해 주셨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비유로 말하였으니, 그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6:9(칠십인역)

(12:40, 새번역)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6:10(칠십인역) ''''를 가리킴

(28:26, 새번역) 곧 이런 말씀입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여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 / 6:9; 10

 

(6:10, 개역)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6:10, 새번역)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이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 칠십인역에는 '이 백성의 마음은 둔해졌다. 그들은 귀가 막혀 듣지 못하고, 눈은 아예 감아 버렸다.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

(12:40, 새번역) "주님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무디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게 하고, 마음으로 깨달아서 돌아서지 못하게 하여, 나에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 6:10(칠십인역) ''''를 가리킴

(6:10, 공동)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12:40, 공동) "주께서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이 눈을 가지고도 알아보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깨닫지 못하여 끝내 나에게로 돌아오지 못하고 나한테 온전히 고쳐지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 이사 6:10.

(6:10, 바른)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그 귀를 막히게 하며 그 눈을 보지 못하게 하여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그 눈으로 보고, 그 귀로 듣고, 그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지도 모른다."

(6:10, 현대인)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는 막히고 눈은 감기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지도 모른다.'

(6:10, 쉬운말)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들의 귀를 막아 어둡게 하고, 그들의 눈을 감겨 못 보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듣거나, 마음으로 깨달아, 내게로 돌이켜서 나한테서 고침을 받게 될까 봐 걱정스럽구나.”

(6:10, 쉬운) 너는 이 백성을 고집 센 백성으로 만들어라. 그들의 귀를 닫고 그들의 눈을 어둡게 하여, 듣고 보아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라. 혹시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서 마음에 깨달음이 생겨, 내게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걱정된다.”

(6:10, 우리말) 이 백성들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고 눈을 감기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아와 치료를 받을까 걱정이다.”

(6:10, 가톨릭) 너는 저 백성의 마음을 무디게 하고 그 귀를 어둡게 하며 그 눈을 들어붙게 하여라.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치유되는 일이 없게 하여라."

(6:10, 킹흠정) 이 백성의 마음을 우둔하게 하고 그들의 귀를 둔하게 하며 그들의 눈을 닫을지니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회심하여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기에

(6:10, 한글킹) 이 백성의 마음으로 살지게 하고, 그들의 귀로 둔해지게 하며, 그들의 눈으로 감기게 하라. 그리하여 그들이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며,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게 하며, 회심하지도 못하고, 치유받지도 못하게 하라." 하셨더라.

 


보통 모든 종교에서는 가르침에 깨달아라 라고 합니다.

그런데 복음 만큼은 그 반대입니다.

제발 깨닫지 말아라 라고 말이죠.

즉 독자적인게 아니라

바로 이런 모든 종교의 상대적인 의미로써

반대를 위한 반대

부정의 부정으로써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말이죠.

 

인간이 보고서 듣고서 깨달아서 고침을 곧 구원을 받겠다는 것이

모든 종교의 주장인데 반해

 

복음은 그렇게 되면 원인이 결국 인간의 숙제 완수에 따른 결과가 된다는 것에

오히려 거부한다는 점입니다.

 

그 이유는 원인이 과거나 현재에 있지 않고

(즉 이 말은 인간에게 있지 않기에 인간 배제를 전제로 한다는 겁니다.)


현재 조차도 미래가 쳐들어 와서 구성이 되기 때문에

현재의 존재 곧 과거에서 이어온 존재성에 있지 않고(곧 인간이지요)

미래완료에서 쳐들어와서 구성이 되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기능과 그의 증상)


오히려 존재는 사라져야 할 입장에 놓여진 겁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했다 말이죠.


(65:17, 개역)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5:17, 바른)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아라, 새 것이 되었다.

(65:17, 현대인) 여호와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한다.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생각나지 않을 것이다.

(65:17, 킹흠정) ¶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노라.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하며 생각나지 아니하리라.



그럼 새 것이란 이전 것을 사라지게 삭제시키는 기능이 있다는 거죠

이것이 복음입니다.

곧 거룩한 씨가 있다는 이유만으로(미래완료에 말이죠)

현재의 존재들은 지나가는 것으로서 삭제 되어야 할 판국에 놓여진 겁니다.

 

이것이 종말이 쳐들어 왔을때의 상황입니다.

(미래완료는 현재가 다가와주길 가만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미래완료의 대상물이 현재로써

미래완료 곧 종말의 결과물이 현재를 구성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사건이다 말이죠.

다른 것은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주의 눈물만 기록이 되었다 말이죠)

 

불의한 청지기는 이 종말을 끌어오는 판국에

소위 빛의 아들들이라는 유대인들은

현재를 어떻게 하면 미래에 까지 질질질 끌고 들어갈까 라는 식입니다.

삭제 되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배설물로 여기지 않기에

도리어 다른 것을 배설물로 여김으로써 그 간극 벌리기에 집중 합니다.

저 세리와 같지 않다는 둥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고

상대적으로 자신은 안깔려 죽었으니까 지금까지는 축복 받았다고 본다 말이죠.


모든 언어와 사고방식이 이렇게 선악으로 구성이 되는 것이 바로 존재입니다
.

존재 곧 자기를 위하여 말이죠.

그런데 그 존재라는 것이 바로 허상 허구라는 겁니다.

반대로 존재로부터 허구로 취급받는 보이지 않는 것은 실상이 되더라 말이죠.

 

즉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배설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진짜 실상인데

배설물인 내가 사망의 몸에서 빠져나올수 없는 실상을 보여주고 있는데 말이죠.

 

종말을 봤다면 그런 소리가 안나오는데

 

즉 망대가 무너져 깔려 죽은 사람을 보고 저주 받았다고 그리고 자기는 축복 받았다고 하는 소리가 안 나올텐데

 

도리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를 외치는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그 다음 차례는 저 아닙니까 주여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주세요 라고 해야 될 판국인데

 

미래완료의 증상물로써 죄인의 자리에 놓여지는데

즉 새것이 떳기 때문에

새것의 증상물로

의사의 증상물로써의 환자

구원자(심판의 주=주께서 누구시기에 풍랑도 잠잠하는고)의 증상물로써의 죄인이 되어야 하는데

물속에서 죽었다가 건짐 받자 마자 나오는 소리는 이 소리 밖에 안나와야 하는데

(14:25, 개역)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14:26, 개역)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14:27, 개역)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14:28, 개역)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14:29, 개역)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14:30, 개역)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14:31, 개역)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14:32, 개역)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14:33, 개역)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히려 뭔가를 행하고 지킴으로써

그 지키고 행한 원인으로써 의사를 외칠려고 하니

의사가 오히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고

의사가 도망치는 겁니다.

임금을 삼고자 하니까 자꾸 도망치는 겁니다.


(6:13, 개역)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6:14, 개역)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6:15, 개역)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

(6:16, 개역) 저물매 제자들이 바다에 내려가서

(6:17, 개역)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예수는 아직 저희에게 오시지 아니하셨더니

(6:18, 개역)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나더라

(6:19, 개역)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여 리쯤 가다가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6:20, 개역) 가라사대 내니 두려워 말라 하신대



아니 의사의 기능이 있는데
임금(거룩한 씨)의 기능이 있는데

고아의 아버지요

과부의 남편이요

나그네의 임금이 되어야 하는데

 

고아 아닌 자에게 무슨 놈의 아버지(거룩한 씨)가 또 필요하며

과부 아닌 자에게 무슨 놈의 남편(거룩한 씨)이 또 필요하며

나그네 아닌 자에게 임금(거룩한 씨)이 왜 필요하냐 말이죠.

 

즉 성경 어디에도 인간이 하나님을 찾은적이 없습니다.

12제자도 예수님이 찾아오심이였듯이

자신들이 찾아와서 저를 제자 삼아주세요 라고 할 위인이 없다 말이죠

모조리 죄인을 부르신 겁니다.

 

그런데 인간의 종교는 곧 인간의 믿음은 어떻게 해서든 그 출발을

십자가가 밝히 보임에도 불구하고 꾀는 사기를 친다는 점입니다.

 

그건 다른 아버지 다른 남편 다른 임금인 다른 복음이다는 겁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가 다 이 다른 복음을 외치고 있다 말이죠

자기의 진짜 아버지는 꼬불쳐 놓고서

또 하나의 아버지를 섬기더라 말이죠

두 주인을 못 섬기는데 재주도 좋아

유대인을 그대로 닮고 싶어서 안달이 났더라 말이죠.

 

그럼 고아 과부 나그네에게 선택권이 있을까요?

부정함 자체가 이미 그 권한이 박탈당한 자라서

외부에서 찾아오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오죽 하면 99마리 양 버리고

길 잃은 한 마리 어린양을 찾을려고

긴 여행

목숨을 건 여행을 누가 하겠냐 말이죠.

 

잃어버렸다는 겁니다.

이 부정성

이 죄인 됨을 참 고맙게도 눈에 보이는 한국교회와 모든 종교는 거부를 함에 있어서

구원자의 증상물을 거부함으로 구원자를 거부하는

십자가 사건이 그렇게 벌어지더라 라는 겁니다.

 

선택권이 있다고 그것을 믿음이라고 가르쳤던 그 유대인들의 뒤를

오늘날 성화론자나 개혁주의가 다 따라하고 있더라 말이죠.

그러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을 받으면

큰일날까봐 예수님은 두려워 했다는 겁니다.

벌벌벌 떨었다는 겁니다.

 

참 다행이다 ~~~~ 그럼 그렇지

눈으로 보는데 달인들이요 (소경 아니요)

귀로 듣고 믿는데 달인들이요 (귀머거리 아니요)

마음으로 깨닫는데 달인들인 유대인이 (죄인 아니요)

예수님에게 나아와서 어떻게 하면 구원 얻습니까(부자청년)

어떻게 하면 영생 얻습니까?(어떤 율법사)

 

그들에게 선한 사마리아(철천지 원수 = 유대인의 앙숙, 친일파 같은 매국노)의 비유가

무슨 소리인지 보고도 들어도 깨닫지 못하더라 말이죠.

 

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못 깨닫도록

고침을 못 받도록 구원을 영생을 못 받도록 하시기 위한 조치인 겁니다.

그렇다면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주님께서 구원을 영생을 못 받도록 하시는 그 취지도 모르고

감히 건방지게 구원을 받을려고 했습니다

주님을 임금 삼고자 할 정도로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라

먹고 배부른 자기 배를 위하여 주님을 임금 삼고자 했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모든 비유는 종말의 비유이기에

십자가 라는 다 이루심을 미리 앞당겨 버리는 겁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는 거죠.

보일 리가 없습니다.

맞습니다. 안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소경입니다 고쳐주세요 라고 고백해야 할 판국이고

안약을 발라주세요 라고

나는 눈이 어두운 자입니다. 라고 고백케 만드는 것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덮쳐진 자의 고백입니다.

 

인간의 믿음의 근거는 결국 기적이거든요.

모든 종교가 다 그래요

구원을 기적으로 본다 말이죠.

 

즉 눈으로 보는 기적이다 말이죠.

그런데 기적 조차도 아무리 행해도 소용없는 자가 소경 곧 눈봉사입니다.

보여줘도 못 본다 말이죠.

 

그런 자를 눈뜨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리새인 말 마따나 날 때부터 소경이니까

기적 자체를 아예 못 봅니다.

모세가 소용이 없어요.

유대교는 기적의 종교이거든요

유대교도 소용 없는 것이 실로암소경이다 말이죠.

그래서 마음 푹 놓고 도마 위에 놓고 난도질 하는 겁니다.

자기가 선생이 될려면 죄에 대해서 가르쳐야 의를 가르칠수가 있으니 말이죠.

그래야 모세 제자 답지 않겠냐 말이죠.

그런 조건을 하나씩 하나씩 갖추어 나아가는 겁니다.

아 그런데 졸지에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나타나서

그 조건 다 무너뜨리는 겁니다.

 

날 때부터 소경인 것이 죄인지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인지 라는 것이 모조리 홀라당 한 순간에 다 날라가 버렸다 말이죠

수십년간 준비해온 박사학위 다 날라가 버렸넹

언 놈이 그랬어?????

 

나의 실험 대상물이

졸지에 나의 존재감을 위협하는 자가 되어버렸다 말이죠

이거 못 막으면 인류멸망이다 말이죠.

나의 학위 논문의 실험 대상인 쥐가

나보다 커져버려서 인류의 재앙으로 남아버리면

무슨 수를 써서라고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모든 공포 영화의 주제다 말이죠.

 

그런데 아무도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는 기적으로 안 본다는 겁니다.

그저 그저 모든 종교처럼 악한 세대가 기적을 요구하듯이

구원을 바란다는 점입니다.

 

요나의 표적은 눈으로 안 보여요

귀로 아무리 들어도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하지만 소리 자체가 안 들려요

세밀한 음성이니 안듣끼는 거죠.

이게 비유의 목적이다 말이죠.

 

그러니 오히려 원인 자체가 없는 자

소위 죽은 자라고 불리우는 자

없는 자 라고 불리우는 자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인 자가 진짜로 보는 자이고

오히려 본다고 살아있다고 하는 자는 실상은 죽은자임을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결정나더라 라는 겁니다.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다 말이죠

표적이 뭡니까

십자가가 뭡니까?

바로 그런 사고방식 때문에 벌어진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의 예수님의 죽음 아닙니까?

 

그렇다면 죽은 예수님을 다시 살려주세요 라고 기도하는자

그렇게 눈으로 볼려고 하는자

아무리 봐도 그런 그림은 눈으로 볼수가 없거든요

뭐가 나타나야 보이던가 하지요.

그렇게 귀로 들을려고 하는자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엘라야를 부르나?

아무도 안 들을려고 하는 외침이다 말이죠.

임금 삼기 바쁘고, 어떻게 하면 구원, 영생 얻기 바쁜데

누가 저 외침을 듣겠냐 말이죠.


마음으로 깨달아 고침이 될까요?

십자가 보다 다들 고개돌리고 픈 트라우마가 어디있겠습니까?
십자가 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 어디있냐 말이죠

철학자 중에 지혜를 쫏는자 중에 십자가 연구하는 자 있던가요?

아니 누가 가장 어리석은 미련함을 연구하는 자가 어디있습니까?

아마 주변에서 미친 놈이라고 공격할려고 달려들텐데 말이죠.

 

박사학위고 뭐고 다 한 순간에 다 날라가 버릴텐데?

 

다들 상처 받을까봐서 외면하고 거부하는 싫어버린바 된 이 표적을 누가 원하겠냐 말이죠.

 

이런 십자가가 밝히 또렷히 보이는 그 앞에서

누가 눈으로 본다고 우길수 있으며

누가 귀로 듣는다고 우길수 있겠으며

누가 마음으로 깨달았다고 할 수 있겠냐 말이죠

(아무도 없습니다 단절입니다.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냐 말이죠 이사야 53

그래서 멀쩡히 잘 보고 있는 눈을 죽여버려서 소경 만들어서 고치시는 겁니다

주여 실상을 보기를 원합니다. 아무도 못 보는 그 참실상

요나의 표적인 십자가를, 다 이루셨다고 유일하게 생명책에 기록되는
주의 눈물을 보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울어야 하는 겁니다
.)

 

그저 서로 서로가 믿음의 달인, 신앙의 달인들이라고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고

율법사처럼 큰 계명이 뭐냐고 하나님을 사랑했고 이웃을 사랑했다고 우기는데

정작 십자가 앞에서는 그것이 다 거짓으로 밝혀 지더라 말이죠

 

이 십자가가 미래완료로 떳는데

거룩한 씨가 떳는데

남겨진 씨가 떳는데

(6:13, 개역)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 증상물로써 주여 저는 거짓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소서라고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해야 하는데

 

저는 눈봉사입니다 고쳐주세요 주님을 못 보면 백날 눈이 천개 만개 있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고 해야 한다 말이죠.

 

이것이 악한 세대가 고백해야 하는데

거꾸로 주의 백성은 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 옳았다고 외치는 반면에

마귀 백성은 자신들이 의인인 증거들을 모아서 구원해 달라고 하니

 

거꾸로 되어도 한 참 거꾸로 된 것을

십자가에서 밝히니까

이 십자가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로

헬라인에게는 미련하고 어리석음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마치 한 쪽 강도처럼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하는 자에게는

영광이 아닐수가 없는 겁니다.

 

죽음으로 만났거든요.

 

한 쪽의 구원받은 강도를 개인으로 보면 또 따라할려고 한다 말이죠.

그러나 다른 한 쪽은 똑같은 강도이어도

이 십자가를 거부한다 말이죠.

그러니 따라할 문제가 아닌거죠.

 

이것을 그렇다고 꼬투리 잡아서 부끄러운 구원이라고 사기를 쳐서

구원의 조건을 갖추겠다는 발상 또한 안 속는다 말이죠.

물론 한국교회는 백프로 다 속아 넘어갔지만 말이죠.

 

그 어떤 것도 따라 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단절인 그 상태를 누릴 뿐입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소경입니다 라고 고쳐주세요 라고

 

한국교회는 그야말로 성화론이다 말이죠.

개혁주의도 마찬가지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같다 말이죠 성화 말이죠

유대인이 그렇거든요.

조건 갖추기 에 미쳐 있다 말이죠. 구원받을 조건 갖추기

 

그것이 십자가에서 누가 꾀냐 라는 속임수로 밝혀 지니까 화를 내더라 말이죠.

 

그런 기독교는 없습니다 라고 외쳐놓고서는

거지나사로가 되어야 구원의 조건에 맞다고 또 사기를 쳐요 글쎄

 

거지나사로 될려고 하는 자도 없겠지만 그런 가상하기 짝이 없는 기특한 마음을 방해하는 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이 역시나 그들이 바리새인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오늘날 좌파들이 이런 완악한 마음이거든요.

부조리 부패의 온상인 우파와 싸우는 이 정의를 무시하는 자는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것이

우파나 좌파나 뭐가 다르냐 말이죠. 차이점이 없기는 매 마찬가지인데

차이가 크대요 그 거리의 간극을 아무리 벌려도 똑같아요

오히려 더 완악한 마음이더라 말이죠.

 

어딜 감히 그 두 진영 속에 집어넣을려고 말이죠.

 

이것이 마귀에게 갇힌, 포로된 인간의 모습입니다.

 

그냥 주여 불쌍히 여겨주세요 라고 심판의 주를 외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귀가 외쳐야 할 것을 우리가 외쳐야 한다 말이죠

아무도 심판의 주를 안 보거든요

볼려고도 하지 않아요

다들 고개를 돌려 버립니다.

무지 무지 싫어버린바 되었으니 말이죠.

 

마귀는 오히려 부자청년처럼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키기 바빠요

율법사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지키기 바빠요

그 속에 어디 감히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고백할 리가 있겠냐 말이죠

설사 해도 연기로 사기를 치면서 속아넘어가는 자를 염두하고서 하지

주님의 살아계심 곧 일찍 죽임 당한 어린양은 거들또 안 본다 말이죠.

 

그런데 이 고백을 우리가 하니까 마귀가 미치고 팔짝 뛰더라 말이죠

이게 구체적 보편성이다 말이죠.

 

솔로몬 재판에서 정작 우는 자는 살아있는 아기의 어미이고

오히려 웃고 박수치는 자는 죽은아기의 어미이다 말이죠.

그것도 둘 다 기생이다 말이죠.

누가 이들의 말을 들어주기나 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생명이 걸렸다 말이죠.


우리는 이 죽은 아이의 어미의 죽은 아이다 말이죠

진짜 살아있는 아기는 예수님 뿐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미로부터 빼앗아서 두 조각 내었다 말이죠.

그저 입술로는 찬양하나 마음으로는 살기가 가득할 뿐이더라는 겁니다.

누가 이 아기의 살아있는 아기의 죽음에 우는 자가 누구이겠냐 말이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에 우는 분은 하나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도 안 울어요

 

즉 아무도 예수님의 구원을 바라는 자가 없었다 말이죠.

오히려 그 앞에서 마저도 우리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정도로

그저 박수 치고 물개 박수로 어서 어서 두 조각으로 나누어서

저도 가지지 말게 하시고

나도 가지지 말게 해 달라는 이 심뽀 밖에 없음을 드러내는 겁니다.

이 심뽀가 유대인의 완악한 마음이자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다 말이죠.

마귀가 죽어있는 우리를 껴안고서

예수님을 죽였듯이

오늘날 우리 또한 내 자식 내 자식이라고 하면서

다 죽음의 길로만 인도하는 소경일 뿐

주님을 구원해 달라고 우는 자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들은 안해도 나는 하겠다고 나서지 마세요

그냥 내 자식 밖에 모르는 자로 그냥 사세요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기에

더 이상 할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주님 쪽에서 다 이루셨음에 감사하고

내 쪽에서는 더 이상 할 게 없는

무거운 짐을 모두 내려놓는 가벼운 마음으로

주님의 승리에 감사하시면서 그 승리를 누리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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