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조를 구하라 (7:10-17)

 

처녀가 아이를 낳는 징조, 앗수르 왕을 끌어들이는 징조 (끝을 구하라, 종말을 구하라)

 

(7:10, 개역)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일러 가라사대

(7:11, 개역)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서든지 높은 데서든지 구하라

(7:12, 개역)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7:13, 개역) 이사야가 가로되 다윗의 집이여 청컨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게 하고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로우시게 하려느냐

(7:14, 개역)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7:15, 개역)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에 미쳐 뻐터와 꿀을 먹을 것이라

(7:16, 개역)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너의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폐한바 되리라

(7:17, 개역)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유다를 떠날 때부터 당하여 보지 못한 날을 너와 네 백성과 네 아비 집에 임하게 하시리니 곧 앗수르 왕의 오는 날이니라

 

(7:10, 새번역) 주님께서 아하스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7:11, 새번역) "너는 주 너의 하나님에게 징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하여라. 저 깊은 곳 스올에 있는 것이든, 저 위 높은 곳에 있는 것이든, 무엇이든지 보여 달라고 하여라."

(7:12, 새번역) 아하스가 대답하였다. "아닙니다. 저는 징조를 구하지도 않고, 주님을 시험하지도 않겠습니다."

(7:13, 새번역) 그 때에 이사야가 말하였다. "다윗 왕실은 들으십시오. 다윗 왕실은 백성의 인내를 시험한 것만으로는 부족하여, 이제 하나님의 인내까지 시험해야 하겠습니까?

(7:14, 새번역) 그러므로 주님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한 징조를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가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입니다. / 칠십인역을 따름. , '젊은 여인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7:15, 새번역)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될 때에, 그 아이는 버터와 꿀을 먹을 것입니다. / 또는 '때까지'

(7:16, 새번역) 그러나 그 아이가 잘못된 것을 거절하고 옳은 것을 선택할 나이가 되기 전에, 임금님께서 미워하시는 저 두 왕의 땅이 황무지가 될 것입니다.

(7:17, 새번역) 에브라임과 유다가 갈라진 때로부터 이제까지, 이 백성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재난을, 주님께서는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의 아버지 집안에 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앗시리아의 왕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1:23, 새번역)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할 것이다" 하신 말씀을 이루려고 하신 것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7:14(칠십인역)

(5:3, 공동) 그 여인이 아이를 낳기까지야훼께서는 이스라엘을 내버려두시리라. 그런 다음 남은 겨레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면, / 이사 7:14참조.

(1:23, 공동)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 칠십인역 이사 7:14.

 

 

이사야 선지자가 남유다 아하스 왕에게

여호와께 징조를 구하라 라고 합니다.

 

아하스 왕은 구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여호와를 시험치 않겠다는 겁니다.

누가 보면 억수로 믿음 좋은 고백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런 모습이 징조를 구하지 않는 모습으로써

인간이 엉터리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겁니다.

 

징조를 구할려면 내 쪽에서의 가능성을 제로로 보는 절망의 상태이어야 합니다.

곧 단절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고 여기면 구할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로왕을 강퍅케 해서 부르짖도록 만드신 것 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화과 나무 잎어 없어도 여호와로 기뻐하는 이 모습 자체가
징조가 되는 것으로 구하라 라고 독촉하시는 겁니다
.


분명히 단절인데 분명히 절망인데

슬픔 대신 희락을

재 대신, 잿더미 대신 화관을

근심 대신 찬송을 구한다는 것은

원인 없는 결과로써의 무조건적인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쳐다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쳐다보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인간은 이 아하스 왕처럼 믿는 구석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아직도 뭔가를 의지하는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번제와 제사이다는 겁니다.

 

가능성을 믿고 개방성을 믿고

단절이 아닌 연합을 믿고

막살았음을 회개하는 것이 아닌,
그래도 막살지 않는 모습을 갖추면 된다고 보는 겁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징조를 구하지 않는 모습과 그 믿는 구석인 것들이 바로

징조에 의해서 다 날라갈 것들이다는 겁니다.

날라갈 것들을 꼴에 믿는 구석이랍시고 붙잡아서 믿음의 조건으로 갖추겠다는 심뽀입니다.

 

막살지 않겠다는 것이 바로 그런 심뽀죠

그렇다고 막살아라는 말이 아닙니다

뭘 해도 다 죄였다는 것을 알고 저 분만을 쳐다보라는 겁니다.

인간은 막살든 막살지 않았든 자기 행동에 의미를 두는 것이 있기에

그거 날려버리겠다는 것이 바로 징조입니다.

 

이 징조를 구하라 단절을 구하라

이 징조가 바로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것과 또 하나는 앗수르 왕을 주겠다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를 붙잡는 그 완악함

그 수건 벗지 않음을 무슨 수로 우리 스스로가 할 수 있겠습니까

그거 날려버리는 것을 앗수르 왕을 통해서 하겠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애와 자비를 쳐다 볼 리가 없을테니까 말이죠.

 

끝을 쳐다 볼 리가 없고

종말을 쳐다 볼 리가 없을테니까 말이죠

곧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쳐다 볼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징조로써

처녀가 아이를 낳는다는 겁니다.

 

이것은 남자를 통하지 않는 단절

역사의 단절

의문의 반복의 단절이다는 겁니다.

아무리 역사와 시간 공간을 아무리 특별한 공간에서

특별한 시간에서 안식일을 지켜도 안식한다 못한다? 안식이 없어요.

화평을 주러 온게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 말이죠.

평화는 전쟁을 통해서 전쟁의 종식에서 옵니다.

 

그런데 남자를 통해서 낳은 자식으로써는 전쟁의 종식이 없습니다.

계속해서 미완의 상태에서 의문의 반복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아하스에게 끝을 구하라

전쟁의 종식을 구하라 라고 하는 겁니다.

 

악을 버리고 선이 승리하는 꿀과 버터를 구하라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종말의 시선 곧 계시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게 아니라

말씀을 구하는게 아니라

자신이 읽고 지키는 말씀을 붙잡겠다는 겁니다.

 

말씀이 나를 읽는게 아니라

내가 읽었던 말씀을 붙잡겠다고 하는 겁니다.
즉 믿고픈 것만 믿고, 보고픈 것만 보고, 듣고픈 것만 듣겠다는 겁니다.

그러니 전쟁도 종식이 안되고

안식도 없고

그저 안식일을 지키는, 잘 지키는 나만 남아버리니까

이 전쟁을 자신의 가능성에서 보고 있는 겁니다.

구원은 내 하기 나름이다고 보는 겁니다. 자신의 믿음 여부로 말이죠.
이 의문의 반복을 멈출수가 없는 겁니다.

혈과 육의 전쟁으로 보고 있다 말이죠
.

내가 믿음이 없으면 또 몰라 지금 믿음이 좋다고 스스로가 여기고 있으니까 그 가능성으로

이 전쟁을 해결해 보겠다는 겁니다.

 

이 전쟁을 어떻게 천군천사의 영적인 전쟁으로 보겠습니까?

누가 앗수르 왕에게 쫄딱 망하게 해 주소서를 빌겠습니까?

만약 빈다면

남자를 통해서 벌리는 전쟁을 의지 하지 않고

여자가 낳은 자녀

흠도 없고 악도 모르는

완벽한 선함과 거룩으로써 이기는 전쟁을 의지할 겁니다

그것이 바로 출애굽때의처럼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 하는 전쟁입니다.

 

번제와 제사로 하는 전쟁이 아닌

남자의 성기인 남근의 힘으로 하는게 아닌

오히려 그 반대로 남자의 힘이 끊어진 단절된 할례된 상태에서

지팡이를 의지하면서 칼과 방패에 여호와의 구원이 있지 않다고 외쳐야 한다는 겁니다.

 

적어도 출애굽을 통해서 칼이라는 물건, 방패라는 존재가

다윗을 기점으로 해서 점점 칼이 방패가 점점점 의인화 되는 겁니다.

앗수르 왕이 칼과 방패라는 몽둥이 역할을 하게 되고

할례라는 개념들이 손할례라는 인간이 할수 있는 가능성에서

점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기능으로써

 

예수님 자체가 남자를 통하지 않고서 태어난

여자의 후손으로써의 진짜 전쟁

칼과 창으로 하지 않는

존재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한다는 겁니다.

 

번제와 제사는 눈에 보이기에 자꾸 과시 자랑을 할수 있지만

존재하니까 눈에 보이니까

인애와 자비는 눈에 보이질 않느니 자랑 자체가 안되는 겁니다.

자랑으로 받아들여질수 없는 것을 자랑하면 도리어 무시 당하거든요

무시 당하면서 까지 자랑한다면

즉 종말을 구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체면과 위신이 다 떨어지는 겁니다.

누가 거리끼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를 구하고,
누가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의 지혜를 구하겠습니까?

 

그래서 종말을 구한다 안구한다? 징조를 구한다 안구한다?

안 구합니다. 설사 아무리 구하고 싶어도 구할수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인간에게서는 그런 안목이 없습니다.

괜히 박목사가 쪽팔리는 구원 얻고 싶지 않다고 하는게 아닌 겁니다.

그래서 성화하겠다는 겁니다.

괜히 하나님의 땡심 이라는 책으로 인기를 얻은게 아니거든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덕택에 얻었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을 치는 하나님을 구하라 라고 하면 구할까요?

 

그 사람에게 임마누엘을 구하라

앗수르를 구하라 하고 징조를 구하라 라고 하면

역시나 구하지 않겠노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겠다 라고 할 겁니다.

그러니 눈에 보이는 교회에 집착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하스가 대표성이듯이

괜히 대표성을 띤게 아닌겁니다

한국교회가 모조리 다 추구하는 방향성으로써의 대표성이다 말이죠.

 

마침 이 부분을 미리 지난주에 약간 언급했고

또 계시록에서 부연설명을 했듯이

 

이 부분을 보다가 생각난 것이

며칠 전에도 어머니랑 나누었는뎅

 

바로 예수님께서 마귀의 세가지 시험을 이미 이겨 놓고

승리한 상태에서

드디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제일 처음 사건이 벌어진 것이 바로

가나안 혼인잔치 비유입니다.

 

또 얼마전에 어머니께서 비사가 뭐냐 라고

비사로만 하시지 비사가 아니면 말하지 않겠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비사가 바로 비유입니다 비밀스러운 비밀로만 이야기 하겠다는 겁니다.

종말로만 끝을 미리 앞당기는 말로만 하겠다는 겁니다

말 되는 소리 하지 않고, 말 안되는 소리로만 하시겠다는 겁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소리만 말이죠.

 

그래서 처음 기적을 일으킨 사건으로서 우리가 잘 아는 가나 혼인잔치 비유인데

거기서 특이한 점이 바로

포도주를 가져오는데

모잘라서 예수님께 물으니까 그걸 왜 내한테 묻냐 라고 까칠하게 답하셔놓고서는

(2:3, 개역) 포도주가 모자란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2:4,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2:7, 개역)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구까지 채우니

(2:8, 개역)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물을 포도주로 변하게 했는데

물이 포도주로 변한게 중요한게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을 하는고 하니

 

(2:10, 개역)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2:10, 새번역) 그에게 말하기를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한 뒤에 덜 좋은 것을 내놓는데, 그대는 이렇게 좋은 포도주를 지금까지 남겨 두었구려!" 하였다.

 

보통 좋은 포도주를 손님들에게 먼저 내어놓고서 취하게 된 뒤로부터는

안좋은 포도두를 내어놓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끝까지 좋은 포도주를 내어놓는구나 라는 반응이다 말이죠.

 

이것을 보고 새술은 새 부대가 생각났다 말이죠

 

구지 혼인잔치에서 왜 이런 기적을 펼치실까요?

 

비사 비유로 말이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으로써 말이죠

 

이게 징조입니다.

끝을

종말을 구하는 겁니다.

새하나님의 백성에 걸맞도록

새백성을 구하시는 겁니다.
남겨진 씨 라는 임마누엘에 걸맞는
오로지 남은 자만 돌아온다는 겁니다.

 

물론 그 어떤 인간도 종말을 구하는 자는 없습니다.

즉 성령을 구하는 자 없습니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려라 성령을 주시겠다는 겁니다.

구하는 이도 없고 찾는이도 없고 두드리는 이가 없다는 뜻입니다.

(눅 11:9, 개역)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눅 11:10, 개역)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눅 11:11, 개역)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눅 11:12, 개역)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눅 11:13, 개역)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성령을 구한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다 이루신

미래완료에서

끝에서 보는 시선입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성령이 구지 필요가 없이

지금 자신이 알고 있는 하나님

성경 지식으로도 충분히 현재의 상황을 해결해 보겠다는 겁니다.

 

그런 안목에서 예수님이 비유를, 비사를, 비밀의 아무도 알지 못하는 소리를 하시면

다 걸려 넘어지는데도 불구하고

성령을 아무도 구하거나 찾거나 두드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저 독을 달라고

뱀을 달라고 할 뿐이다 말이죠

 

종말의 영이신 성령을 선물로 받은 자만 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남은자만 돌아온다 라고 했잖아요

? 임마누엘 새 하나님이 떳기에 남겨진 씨가 떳기 때문에

이 새하나님이 누구냐? 바로 처녀가 낳은 아이로써의 임마누엘

곧 악도 모르고 선하신 분으로써 버터와 꿀을 먹이실 분

 

(고후 5:21, 개역)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5:21,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구하죠 성령을 받아서

한나가 구하죠 여호와의 거룩한 전쟁을 벌려 달라고

기생라합이 행함이 있는 믿음으로써 자신의 나라 민족을 바닥 뜯어내라고

집문서 땅문서 국가문서 다 팔아넘겨 버리죠

 

? 종말을 구하는 겁니다.

 

두 징조를 구하는 겁니다. 이 상반된 두 징조인

처녀가 아이를 낳는 징조와

앗수르가 쳐들어와 다 장악하는 징조가

바로 예수 라는 이름으로 등장한 그 분이 제대로 해석이 됩니다.

즉 아무도 해석할 자가 없다는 겁니다.

 

마치 일곱인을 뗄 자가 없어서 사도요한이 울었던 것처럼

열쇠 키를 쥔 분은 예수님 뿐이다는 겁니다.

그냥 예수님이 아니라 계시록에서는 일찍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표현되면서

기능으로써 표현하고 있습니다.

존재를 언급하는게 아니라 말이죠.

 

그러니 징조를 해석하기 위해서

처녀가 낳은 아이를 구할까요?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다 날려버리는 징조를 구할까요?

이 두 징조 자체도 서로 정반대의 상극인데?

 

뭘 해도 다 엉터리인 가짜 믿음을 다 날려줄 앗수르 징조를 구하는 자 없고

아니 엉터이 믿음이라고 아예 여길수 없도록

이미 하나님이 있는데 왜 처녀가 낳은 아이를 구하냐 말이죠

그런 어리석은 짖을 왜 하냐 말이죠

하나님이 보내신 이(처녀가 낳은 아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데

아무도 하나님의 일을 구하지 않는 겁니다.

그저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 말이죠

 

처녀가 낳은 아이와 앗수르(애굽,바벨론)와의 전쟁을 구하는 자는

마리아가

처녀로써 본인이 그 임마누엘을 임신 했기에 구한게 아니다 말이죠

그래 되면 또 말이 되잖아요

본인도 안 믿겨지는 판국인데

그래서 세례요한을 임신한 할머니 엘리사벳을 보고

그제서야 하나님의 일이 납득이 되어서 성령을 받아 전쟁요청을 하더라

앗수르와의 전쟁 곧 하늘의 전쟁을 이 땅에 가시화 시켜 달라는 겁니다.

마치 일곱인이 떳다는 것을 보고 나머지 6번째까지의 인을 떼어 달라고 말이죠.

일곱나팔도 마찬가지요 일곱 대접도 마찬가지다 말이죠.

 

여기서 남자를 통해서 벌어지는 것이 없도록 하기 위해

단절로써

남자는 곧 요셉은 마리아를 조용히 끊고자 했고

세례요한의 아빠는 떠들고 다닐까봐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라고 외치듯이 떠들까봐 아예 입을 막아버리는 겁니다.

남자의 활동을 아예 원천 차단하는 겁니다.

할례 하듯이 다 짤라 단절 시키는 겁니다

무능하고 어리석은 여자와 아이를 통해서 만

그래야 아무도 안 믿거든요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모른다 말이죠

 

이 징조를 누가 알겠습니까?

예수님 뿐이다 말이죠

 

그 예수님 앞에

듣는다고 할게 아니라 못 듣는 귀머거리요

본다고 할게 아니라 못 보는 소경이요

깨닫는다고 할게 아니라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해야 할 판국이다 말이죠

? 징조를 해석하고 이루실 분을 봤기 때문에

뭘해도 다 가짜라는 것을 그 분을 보고 비로소 알았기 때문에 말이죠.

 

그래서 구하든 안구하든 어차피 이루어지도록 되어 있기에

앗수르를 통한 징벌로써 이스라엘은 떠돌이가 된다 말이죠

국가고 뭐고 다 날라가는 겁니다.

그것 조차도 예수 라는 임마누엘이 떳기 때문에

난 여호와로 즐거워 하리

난 예수님으로 기뻐하리가 된다 말이죠

말씀대로 징조대로 이루어지니까 말이죠

 

그렇게 나그네 이방인 고아 과부

곧 죄인을 만들어서라도

예수님의 피와 연결 시키시고자

나머지 의지하는 모든 것들은 단절시켜 버리는 겁니다

심지어 교회도

성전도

육으로 보이는 저 이스라엘도 다 단절 시키시는 겁니다.

 

저 분 임마누엘 만이,

저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건지실 구원자 라는 겁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써

제대로 된 심판으로써 거룩 곧 제대로 구분 짖는 겁니다.

 

너희 하나님과 내 하나님이 다르다 라고 그래서 우리 하나님으로 오신다고

 

처녀가 낳은 아이가 버터와 꿀을 먹을때에 선악을 구분할때에

이 두 징조를 제대로 해석하시는 그 해석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고

우리에게도 버터와 꿀을 먹여주심으로써

 

왜 이 땅이 멸망 당해야 하는지를

본향을 사모하도록 하시고자

쉼 없는 안식 없는 의문의 번제와 제사가 반복되는 이 땅을 멸하시는

임마누엘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희년 전쟁을 구하라 말이죠

징조를 구하라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자꾸 엉터리 하나님관으로 이 땅에 발 붙이고자

떠날 생각을 탈출할 생각을 하겠냐 말이죠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탈출 시키시고자 하시는 구원자 예수님을 보겠냐 말이죠

안 보이니까 도리어 예수님을 니 혼자 떠나라 우리는 탈출할 마음이 없다 라고 한다 말이죠

이런 엉터리 하나님관을 허물어짐을 당한자 만이

 

징조를 구하고 즉 일곱인을 떼어 달라고 눈물흘리고 아무도 뗄자 거룩한 자가 없다고 우는 가운데 드디어 하나님의 일이 벌어졌다고 기뻐 희년을 외치는 겁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서 어서 오소서 마라나타

이 허구의 인생 지긋 지긋 합니다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자꾸 꾀는자 밖에 없습니다

어서 구원해 주소서 라고

이 징조를 구해야 합니다.

 

이 징조를 다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다 이루심을 매일 매일 누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나 로부터 매일 매일 탈출전쟁을 벌리시는 주님을 바라봅시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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