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노의 날, 그 날에는 (7:18-25)

 

(6:15, 개역)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개역)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개역)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7:18, 개역) 그 날에는 여호와께서 애굽 하수에서 먼 지경의 파리와 앗수르 땅의 벌을 부르시리니

(7:19, 개역) 다 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과 가시나무 울타리와 모든 초장에 앉으리라

(7:20, 개역) 그 날에는 주께서 하수 저편에서 세내어 온 삭도 곧 앗수르 왕으로 네 백성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수염도 깎으시리라

(7:21, 개역) 그 날에는 사람이 한 어린 암소와 두 양을 기르리니

(7:22, 개역) 그 내는 젖이 많으므로 뻐터를 먹을 것이라 무릇 그 땅 가운데 남아 있는 자는 뻐터와 꿀을 먹으리라

(7:23, 개역) 그 날에는 천 주에 은 일천 개의 가치 되는 포도나무 있던 곳마다 질려와 형극이 날 것이라

(7:24, 개역)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7:25, 개역) 보습으로 갈던 산에도 질려와 형극 까닭에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 못할 것이요 그 땅은 소를 놓으며 양의 밟는 곳이 되리라

 

(7:17, 새번역) 에브라임과 유다가 갈라진 때로부터 이제까지, 이 백성이 겪어 본 적이 없는 재난을, 주님께서는 임금님과 임금님의 백성과 임금님의 아버지 집안에 내리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앗시리아의 왕을 끌어들이실 것입니다.

(7:18, 새번역) 그 날에 주님께서 휘파람을 불어 이집트의 나일 강 끝에 있는 파리 떼를 부르시며, 앗시리아 땅에 있는 벌 떼를 부르실 것입니다.

(7:19, 새번역) 그러면 그것들이 모두 몰려와서, 거친 골짜기와 바위틈, 모든 가시덤불과 모든 풀밭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7:20, 새번역) 그 날에 주님께서 유프라테스 강 건너 저편에서 빌려 온 면도칼 곧 앗시리아 왕을 시켜서 당신들의 머리털과 발털을 미실 것이요, 또한 수염도 밀어 버리실 것입니다.

(7:21, 새번역) 그 날에는, 비록 한 농부가 어린 암소 한 마리와 양 두 마리밖에 기르지 못해도,

(7:22, 새번역) 그것들이 내는 젖이 넉넉하여, 버터를 만들어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땅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버터와 꿀을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7:23, 새번역) 그 날에는, 은 천 냥 값이 되는 천 그루의 포도나무가 있던 곳마다,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로 덮일 것입니다.

(7:24, 새번역) 온 땅이 찔레나무와 가시나무로 덮이므로, 사람들은 화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사냥을 갈 것입니다.

(7:25, 새번역) 괭이로 일구던 모든 산에도 찔레나무와 가시나무가 덮이므로, 당신은 두려워서 그리로 가지도 못할 것이며, 다만 소나 놓아 기르며, 양이나 밟고 다니는 곳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앞의 계시록 글 여섯 번째 인을 말하면서

진노의 날을 언급했습니다.

 

오늘 이사야에 나오는 그 날이 바로 진노의 날입니다.

 

(6:15, 개역)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 틈에 숨어

(6:16, 개역)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우리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6:17, 개역)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앗수르는 잔인하기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이런 앗수르를 징조로 구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누가 이 잔인한 심판을 구할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징조를 구하라 곧 임마누엘 처녀가 낳은 아기를 낳는 징조인데

왜 앗수르왕까지 구해야 할까요?

그럼 한 징조가 아니라 두 징조 아닙니까? 하나가 아닌 둘

 

그런데 처녀가 낳은 아기를 구한다는 자체가 이미 원 플러스 원으로써 둘을 구하는 셈입니다.

따로 국밥의 하나 와 또 다른 하나가 아니라 한 세트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마치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받기로 되어 있는 것처럼 말이죠.

 

즉 임마누엘의 징조를 구한다는 자체가 상대적인 원수 마귀도 동반되는 식입니다.

그 원수로부터 구원하시니까 말이죠

 

주로 주인공이 17 1로 싸워 이긴다는 주인공은 항상 17 이라는 어두움을 동원해야 하듯이 말이죠

결국 하나인 겁니다. 한 징조입니다. 이중성 이중중복 이중반복이다 말이죠.

 

마치 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시고서는

정작 다른 신이 없다면서 다른 신을 의도적으로 신경쓰고 염두하고 있다는 겁니다.

아니 없다메?

없는데 왜 다른 신을 언급하느냐?

그것은 놀랍게도 마귀를 염두하시는 겁니다.

곧 인간은 바로 이 다른 신을 만들어 내는데 귀신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주님 본인이 돌출시켜서

너거들이 그렇게 믿고파 하는 신을 보란 듯이 아작 아작 내시는 겁니다.

결국 애굽의 10가지 신이 따로 있는게 아니라

광야 속에서 이스라엘에 10가지 원망을 통해서

사실은 인간 자체가 신의 모습으로써 하나 하나 원망을 나타내고
그것을 또 하나 하나 지근 지근 밟아서 낮추시는 겁니다.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하시면서 말이죠

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교만하다는 의미로써 낮추겠다는 것이 아니라

아예 마귀가 씌여진 인간 한 명 한 명이 신이다는 겁니다.

그것이 여섯 번째 인으로 인해

세상 임금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오늘날 인간 하나 하나는 왕입니다.

 

변호사 라는 영화를 보면 모든 국가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잖아요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이것이 헌법 2조다 말이죠.

곧 리바이던 이다 말이죠.

 

국민 하나 하나가 왕이다는 겁니다. 자아 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런 자 만이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발 딛고 살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옆으로 새어 또 다른 영화 이야기를 좀 해 보면

얼마전에 나온 1987 이라는 영화를 보고 정말 웃끼는 것이

형사 경찰 등등의 배우 모습들이 모조리 다 악마로 묘사를 했고

상대적인 자들은 모조리 그 악마들로부터 핍박받는 천사들로 표현을 했더라 말이죠

어떤 형사의 얼굴은 상처가 마치 깡패 조폭처럼 칼자국이 나 있는 것을 보고

배꼽 잡고 웃었는데

 

오히려 크게 은혜받은 것이 바로 이 영화가 악마들이 만든 영화 같았다 말이죠

 

우와 이게 먹혀들고 세뇌가 되는 구낭

 

아무튼 계시록 여섯 번째 인에서 진노의 날이

바로 세상임금 곧 심판과 가장 거리가 멀다고 생각한 자들 조차도

숨을 곳이 없을 정도로

앗수르 보다 더 잔인한 하나님의 진노가 펼쳐진다고 합니다.

 

아니 왜죠?

그것이 바로 징조를 구하지 않는 완악한 마음이 바로 세상임금들이 품고 있는 마음이기에

구하지 않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성전 곧 하나님의 집인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서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 또 하나는 세리 이다 말이죠

 

바리새인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하나님께 감사하다고

반드시 하나님을 언급합니다.

 

즉 믿는 구석이 바로 기존의 하나님이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왜 엉터리 하나님인고 하니

바로 심판 곧 하나님의 진노와 가장 거리가 먼

심판 안 받는 조건을 갖추었다고 보는 겁니다.

그것이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하고

가장 중요한 저 세리 토색하는 세리와 같이 않았고

저 탕자와는 달리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니 심판 곧 하나님의 진노와는 거리가 멀다고 여겼다 말이죠

 

그런데 이것이 바로 다윗 왕이 왕으로써 율법 네배나 갚으라 라고 외친 모습이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이 달라요

 

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다는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되어버리면

인간들이 법을 이용해서 법의 틈사이에 숨어버리면 다 숨어버리게 되니

하나님도 별수 없게 된다는 식입니다.

 

이게 바로 번제와 제사로 밀어붙이는

세상임금과 다를바 없는 모습이다 말이죠

이게 다른 신이고

이게 세상 임금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딴 곳에는 몰라도

약속의 땅에서는 먹힐까요? 안먹힐까요?

왜냐하면 약속의 땅 자체가

인애와 자비라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오로지 어린양의 피로써만

긍휼로서만 섬김을 받음을 당하는 곳인데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꾀면서 십의 이조를 드렸다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다고

그것을 내미냐 말이죠

인애와 자비를 안 쳐다보고

번제와 제사를 들이 내밀겠다고 우기는 겁니다.

십의 이조 드렸다고 말이죠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 적 없다고 우기는 겁니다.

 

그래서 그 원인에 따른 결과가 결국 심판에서 멀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새로운 하나님을 구지 믿을 필요가 없이

기존의 하나님만 적당히 구슬려 속여서

교회에 가두어 용돈 몇푼 쥐어주면 교회 바깥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달래는 겁니다.

더 이상 간섭하지 말아라 라는 거죠. 주일날 달래 줄테니까 ~~~

 

이것이 세상 임금들이 각자의 신을 다루는 방식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신이지요.

 

이것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의 특징입니다.

그런 성전을 짖는 사고방식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바보입니까? 속아 넘어가게?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마귀의 3가지 시험을 받는 것이 왜 중요한고 하니

모든 인간 특히 유대인(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써)

바로 이 마귀의 3가지 시험에 넘어간 자로써 그 시험의 내용이 언급이 됩니다.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이 언급되면서

말씀은 마귀가 잠시 떠났다고 하는데

그 마귀가 그 뒤에 등장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이런 마귀

왜 이런 앗수르를 징조로써 구하라 라고 하실까요?

 

네 맞습니다. 바로 임마누엘과의 차이입니다

그러니 한 세트죠

두 가지 징조는 결국 한 징조를 구하면 자동적으로 따라오는 원 플러스 원으로써

한 세트를 구성하는 겁니다.

 

그 잠시 떠난 마귀가 글쎄 어디서 나타나는고 하니

주님께서 마치 계시록처럼 일곱 교회를 언급하실 때 마다 반드시 사단의 회를 언급하시면서

그 차이로 거룩을

거룩이라는 기능을 나타내셨듯이 곧 분리 구분 구별 이지요

 

그 잠시 떠난 마귀는

주님께서 인애와 자비를 베푸실 때 마다

반드시 번제와 제사를 주장하는 바리새인에게서 나타나더라 말이죠

그 잠시 떠난 마귀가 바리새인에게서 말이죠

이 바리새인들이 사람들로부터 존경 받는 선생 아닙니까?

즉 아무도 못 벗어나는 갇혀버린 바 된 환경이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의 기능이 말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앗수르가 바로 그 기능입니다.

얼마나 잔인한지

율법 어기면 돌삐로 쳐 죽이고자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돌 던지는 모습이고

처녀가 아기를 임신하니 마리아를 돌로 쳐 죽일려고 하는 모습이다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앗수르와 처녀가 낳은 아기는 한 세트로 구성이 되는 겁니다.

그게 징조요 그게 기능이요 그것이 바로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라

그야 말로 믿음은 불가능속에서의 불가능입니다.

그야 마로 말도 안되는 것이 믿음이다 말이죠

 

다들 번제와 제사를 따를때에

인애와 자비를 구한다?

 

이 말은 자신이 심판 속에 있을 때에만 인애와 자비를 구하지

 

심판과 멀다고 생각하는 자아 라는 신 또는 왕은

오히려 번제와 제사로 자신의 알리바이를 형성하더라 말이죠

이유를 만들어요

 

무조건적인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이 아니라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

백만번 천만번 불 타 죽어 마땅한 자이로구나 라를

영광을 보고 아는데

 

오히려 영광이 안보이는 자는

자꾸 십의 이조 드렸다는 둥

번제와 제사를 안 내세우고는 못 배긴다 말이죠

 

막사세요는 심판을 보고 외침이고

심판이 안 보이는 자는 막살면 안된다고 본다 말이죠

독자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맛물려 역이도록 하는 표현이다 말이죠

 

반드시 막사는 자와 막살면 안된다고 하는 자가 한 세트로 구성이 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막사는 탕자와 절대로 막산적 없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맏아들이

한 세트를 구성하듯이

 

그러니 인애와 자비를 구하지 않고

곧 임마누엘을 구하지 못하기에

앗수르 속에서 인애와 자비를 구하지 않고

 

앗수르가 안보이니까 즉 임마누엘을 구하지 않았기에

자꾸 번제와 제사로

즉 사람들에게 먹혀드는 말로

말 되는 소리로 사람들을 장악해 버리는 겁니다.

그게 마귀가 3가지로 장악해 버린 유대인의 모습처럼

유대인들은 그것 밖에 내 세울 것 밖에 없더라 말이죠.

막살지 않았다는 것

소경 아니다는 것

저 세리(철천지 원수)와 같지 않다는 것

 

그러니 앗수르를 통해서 몽둥이로 삼아 꺽어버립니다.

졸지에 그 약속의 땅이

심지도 거두지도 않던 땅이

졸지에 척박한 땅이 되어서

화살과 활을 통하지 않고서는 소출을 먹을 수가 없도록 되어 버린 겁니다.

( 7:24, 개역) 온 땅에 질려와 형극이 있으므로 살과 활을 가지고 그리로 갈 것이요

 

너거들의 사고방식 그대로 바로 내가 직접 일구어서 소출을 얻겠다고 했으니

그래 그렇게 해 봐라 라는 겁니다.

 

해 보니까 어찌된 심판인지 포도나무를 심었으면 포도나무 열매가 나와야 하는데

다른 열매가 나오더라 말이죠

 

이게 우찌된 거냐 말이죠

사람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고자 땅을 가꾸었는데

땅은 오히려 엉뚱한 것을 내더라 말이죠

졸지에 사람이 일굴 수 없는 짐승들의 땅이 되어서

공포의 터전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원치 않는 활 과 화살을 쥐어야만 하는

총을 쥐어야만 하는 땅이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그카이 트럼프가 교사가 총 지니면 된다고 하듯이

미국의 학교는 총기사고에 대비하는 훈련을 하더라 말이죠

 

사람이 살 땅이 아닌 짐승의 땅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그래서 약속의 땅에 사는 약속의 사람만큼은 주님께서 저 이방나라의 민족과의 차별 구분 구별시키고자

 

약속의 땅을 청소하시는데 있어서 앗수르를 몽둥이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인간들이 아무리 더렵혀도 이 약속에 대한 책임을 주님은 포기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게 깨끗하게 방청소를 해 놓고서

약속의 땅을 청소 해 놓고서

남은 자는 돌아오게 하신다 말이죠

 

여기서 또 놀라운 것은

아직 임마누엘이 등장하지 않았는데

새 임금 새 남편이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졸지에 남은자가 먼저 형성이 되었다고

바리새인들이 이 남은자 행세를 하더라 말이죠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의 손으로 남은자 되었으니

저들과의 구별 작업을 자기들이 막 하는 겁니다.

왜? 남은자 이니까!!

 

그러니 막 살면 때려 죽어도 안되는 겁니다.

 

이런 상황에 예수님께서 막사는 자를 존재가 아닌 기능으로써

새롭게 형성해 버리니까

좋다구나 라고 덮썩 물어버리는 겁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남은자 맞잖아!,  왜? 막살지 않고 십의 이조 드리고 이레에 두 번 금식했으니

심판과 거리가 먼

바로 세상 임금 하나 하나의 신이다 말이죠

 

도리어 막산자는 죄인으로써 환자로써 누구를 외친다?

예수님을 말하고자

심판 속에서

죽음 속에서 인애와 자비를 외치더라 말이죠

그 거룩한 영광을 보니 뭘 해도 막산자 였다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라고 외치는데

 

영광을 못 보니까

아직 덜 타 죽는다고 보니까

여전히 가능성과 개방성으로 보니

막살면 안된다고 우기는 겁니다.

영광을 안 봐서 그렇다 말이죠

십자가가 밝히 보이지 않으니까

또 여전히 의문의 흐릿한 것으로 꾀 더라 말이죠

희망과 소망을 심어주는 광명한 천사 노릇으로

돌이 떡 되게

거룩한 성전에서 뛰어내려 기적을 보여주고자

온천하만국의 영광을 얻고자 즉 심판과 먼

세상 왕처럼 솔로몬의 영광을 쫏더라 말이죠

 

그러나 내일 아궁이에 던져질 이 들풀 보다 못한 영광이다는 겁니다.

헛 되다 말이죠

허구

안개를 붙잡고

인생을 의지 하더라 말이죠

누가 안개 그림자를 쫏냐 말이죠

그렇게 말한 본인들이 쫏더라 말이죠

 

그래서 앗수르를 통해서 허구임을 들추어내시는 겁니다.

손 탈탈탈 털도록

빵깨이 놀이

소꿉놀이

종교놀이 탈탈 털어버리는 겁니다.

 

없는 자아를 왜 붙잡고

없는 인생을 왜 붙잡고

그 인생을 붙잡고자 하나님을 찾는 그 가짜 하나님을 거덜내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과 앗수르 징조 이다 말이죠

 

그래서 일곱에서 나오는 여섯 번째 인이

고맙게도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허깨비 허구 허상

그림자들의

 

실상으로 인한 심판이다는 겁니다.

 

박그네를 보세요

mb를 보세요

 

자기들 따나 의미 있다고 얼마나 권력을 추구했습니까?

그런데 다른 열매가 나오는 겁니다.

엉겅퀴 찔레나무가 나오고

가시나무가 나오더라 말이죠

 

결국 자기가 자기를 찌르는 누워서 침 뱉는 짖만 골라서 한 거다 말이죠

자기가 자기에게 올무가 된 겁니다.

이들만 그런게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했던 자들이 이제는 성폭행 가해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의문의 헛짓을 해 놓고서는 의미를 두니

독재와 싸웠다는 그 육의 자랑이

도리어 본인이 독재가 되어서

자기가 자기에게 올무로 작용하여 발목을 잡게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그래서 다윗 왕 조차도 그런 마당에

이 앗수르 징조를 보내주심이 얼마나 감사하냐 말이죠

 

왕이라는 절대로 막살지 않는 자의 자리에서

죄인이라는 막사는 자로 만들어서 구원하시는 겁니다.

 

자아를 없애 버렸다는 겁니다.

자아가 있으면 절대로 막살지 못하거든요

자아가 있는 자만이 절대로 막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자아를 없애 버리고자

십자가에 함께 못 박는 겁니다.

 

(5:24, 개역)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 입니끼?

그런데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이 십자가가 영광이 되는 겁니다.

정작 영광을 얻어야 할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이고 말이죠.

 

다들 고개를 돌리는 판국에 어떻게 십자가가 밝히 보이겠습니까?

그러니 십자가는 대상물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대상물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십자가가 다 알아서 펼치는 은혜가 되는 겁니다.

그러니 뭘 해도 다 은혜요 예가 되기 때문에

종말 곧 징조 끝을 구하라 말이죠

끌이 좋으면 다 좋으니

뭐든지 은혜가 되기에

지금 은혜로써 펼치시는 겁니다.

사단의 가시 조차도 은혜로 작용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사단의 가시를 다루시는 분이 바로 은혜를 베푸시는

임마누엘이시니까 말이죠

 

우리가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화목제물을 주셨기에

이 화목제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막사는 자가 되어버린 겁니다.

 

자기 스스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의인이 된 것이듯이

스스로 막사는 자는 없습니다.

 

의사가 만들어내는 환자이다는 겁니다.

환자는 자기가 건강하니 아프니를 결정할 권리가 없어요

의사가 일방적으로 만들어내는 거지!!!

 

아니 왜?

가짜 의사인 마귀 만을 상대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앗수르를 통해서 무조건 심판 속으로 다 집어 넣어 다 죽여버립니다.

이 죽어버린 상황에서만이 의사가 의미가 있다 말이죠

일부러 죽을 때 까지 마르다 마리아가 불러도 안 갑니다.

덜 죽었으니까 말이죠

딱 죽으니까 이제 가자 라고 하신다 말이죠

? 의사의 기능이 그때 발휘가 됩니다.

 

살아있을 때에는 부활자의 기능이 의미가 없어요

 

여기에 그럼 마귀는 어떻게 사람들을 다 장악했는가

바로 부활교리 부활신앙으로 그림자를 붙잡고 있다는 것으로 마귀에게 장악당하고 있더라 말이죠

 

고맙게도 그냥 내 버려 두시지 않으시고 간섭하시고 찢으시고 다시 싸매주시는 겁니다.

다른 민족은 책망 받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시지만

주님은 약속의 자녀를 끝까지 포기 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사랑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존재가 아닌 기능이니까

착각하는 자는 심판과 멀다고 보기에 가능성을 가지고 막살지 않기를 또 하는 겁니다.

 

아니 원가지도 아끼지 않으시는 판국인데

죽은 가지 접붙여놓은 이방인이라는 가지는 오죽하시겠습니까?

그러니 약속의 민족이라는 껍데기 존재가 아닌

약속이라는 기능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책임 지시겠다는 겁니다.

 

결국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엉겅퀴와 가시나무라는 엉뚱한 열매가 나온 것에 대한

원수가 한 짓에 대해서

그 원수를 겨냥한 약속의 열매를 포기치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 지금 이 진노의 날이 일곱에서 오기 때문에

감사하게 지적 받으면서

다른 민족에게 없는

아버지로부터 받는 징계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이사가는 초반부터 이 심판성을 신체에 지니고서 증거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왕으로써 제일 먼저 심판받는 자로써

십자가에서 달려 죽으시는 고난을 받았습니다.

 

사실상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인데 말이죠

이것이 약속을 다 이루셨기 때문에 나오는 사랑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랑 곧

인애와 자비에서 나오는 원인 없는 결과이기에

주의 십자가의 용서만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도장 맞았다 인 맞았다 라는 것은

남은자만 돌아온다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를 먹이셨다는 겁니다.
내 사랑~~이라고 주님이 찜 했다는 겁니다.

 

안 그러면 주님과 상관이 없는

약속과 상관이 없는 자이기에

소경이기에 고쳐주셨고 즉 살과 피를 먹여주셨고

소경 아니다고 하기에 살과 피와 무관한

인 맞은 자가 아니다는 겁니다.

 

그저 그들의 믿는 구석은 자신의 힘으로 은혜를 이룰려고 하는 겁니다.

고맙게도 이 앗수르가 그 엉터리인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곧 인간의 가능성으로 믿을 구석이 있다고 여긴것들을

탈탈탈 털어주는 기능으로써

주님이 그 배후에서 활동하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이 주님이 하시지 않은 것이 없는 겁니다.

이 은혜를 날마다 숨쉬는 순간마다 새록 새록 새롭게

낯설기 짝이 없는 새로움으로써 격으시고 누리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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