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증인의 죽음과 예수님 죽음의 십자가 속에서의 만남 (11: 7-14)

계 31 두 증인과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서의 만남 (계 11, 7-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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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개역) 저희가 그 증거를 마칠 때에 무저갱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이 저희로 더불어 전쟁을 일으켜 저희를 이기고 저희를 죽일 터인즉

(11:8, 개역) 저희 시체가 큰 성 길에 있으리니 그 성은 영적으로 하면 소돔이라고도 하고 애굽이라고도 하니 곧 저희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니라

(11:9, 개역) 백성들과 족속과 방언과 나라 중에서 사람들이 그 시체를 사흘 반 동안을 목도하며 무덤에 장사하지 못하게 하리로다

(11:10, 개역) 이 두 선지자가 땅에 거하는 자들을 괴롭게 한 고로 땅에 거하는 자들이 저희의 죽음을 즐거워하고 기뻐하여 서로 예물을 보내리라 하더라

(11:11, 개역) 삼 일 반 후에 하나님께로부터 생기가 저희 속에 들어가매 저희 발로 일어서니 구경하는 자들이 크게 두려워하더라

(11:12, 개역) 하늘로부터 큰 음성이 있어 이리로 올라오라 함을 저희가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저희 원수들도 구경하더라

(11:13, 개역) 그 시에 큰 지진이 나서 성 십분의 일이 무너지고 지진에 죽은 사람이 칠천이라 그 남은 자들이 두려워하여 영광을 하늘의 하나님께 돌리더라

(11:14, 개역)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1:7, 새번역) 그러나 그들이 증언을 마칠 때에, 아비소스에서 올라오는 짐승이 그들과 싸워서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 '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을 일컫는 그리스어

(11:8, 새번역)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시의 넓은 거리에 내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도시는 영적으로 소돔 또는 이집트라고도 하는데, 곧 그들의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곳입니다.

(11:9, 새번역)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 두 예언자의 시체를 볼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1:10, 새번역)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 시체를 두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서로 선물을 보낼 것입니다. 그것은 이 두 예언자가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11:11, 새번역) 그러나 사흘 반이 지난 뒤에,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기운이 나와서 그들 속으로 들어가니, 그들이 제 발로 일어섰습니다. 그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 또는 '영이'

(11:12, 새번역) 그 두 예언자가, 하늘로부터 자기들에게로 "이리로 올라오너라" 하는 큰 소리가 울려오는 것을 듣고,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니, 그들의 원수들이 그것을 지켜 보았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내게로'

(11:13, 새번역) 바로 그 때에 큰 지진이 일어나서, 그 도시의 십분의 일이 무너졌는데, 그 지진으로 사람이 칠천 명이나 죽었습니다. 그리고 살아 남은 사람은 두려움에 싸여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11:14, 새번역) 둘째 재난은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이제 셋째 재난이 곧 닥칠 것입니다.

 

 

자 오늘 내용까지가 둘째 화의 내용이고 여섯 번째 나팔의 내용입니다.

중첩 되어 있습니다.

 

1115절부터 일곱 번째 나팔의 내용과 셋째 화의 내용이

15장까지 길게 나열이 됩니다.

 

16장부터 일곱 대접의 내용이 나열 되고요

 

아무튼 오늘 두 증인의 죽음을 통해서 짐승의 정체가 드러나는데 바로

이 짐승이 매매하는 것이 두 증인의 죽음을 서로 매매하고 소통시킨다는 점입니다.

짐승은 666이고 종교라고 했습니다. 국가죠.

종교의 최종적인 활동의 목적은 바로 돈입니다.

돈은 서로 소통하는 가치를 말하는 거죠

즉 노동입니다. 그 노동의 댓가를 서로 주고 받고 하는 겁니다.

 

인간 자체가 종교가 되었고 곧 우상이 되었고 그것이 결집 곧 흩어지지 말자고 모인 것이 바로 국가요 바벨탑이였듯이

바벨탑이 세워지는 목적이 바로 인간 구원이다는 겁니다.

이게 종교이고 이것만 소통 매매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무소부재의 유비쿼터이다 말이죠

호모 데우스 이다 말이죠

 

자 그렇기 때문에 인간구원을 외치는 것이 모든 인간의 활동 목표가 되는데

그곳을 장소적인 의미에서는 소돔이라고 합니다.

 

(1:9, 개역)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반면에 주님의 성경 말씀은 인간구원이 아닌 예수님 구원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의 충돌 장소가 되는 곳이 바로 소돔이자 곧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 이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인간 자기 구원을 이룰려고 완악함을 펼치는 장소인데 곧 우상의 장소, 소돔인데

졸지에 예수님이 바로 그런 인간의 소원 때문에 죽게 되는 장소요

오늘 두 증인도 죽게 되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두 증인의 시체를 사흘 반 동안 땅에 묻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바로 이게 종교 곧 666의 정체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그들의 기쁨이 되기에

이것을 서로 주고 받고 소통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승리이니까 이 승리를 매매하는 겁니다.

성도의 죽음을 매매해요

인간 구원을 방해한 것에 대한 승리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이 죽음을 보고 서로 좋아라 하고 나누고 즐거워 하는 겁니다

 

라멕의 찬양이 그냥 나온게 아니다 말이죠

찬양이란 즐거움이거든요

승리로 인한 기쁨으로 인해 저절로 나오는 겁니다.

무엇이 라멕을 기쁘게 했을까요?

자기를 건드린 놈에 대한 심판을 행사한 것에 대한 기쁨이다 말이죠

 

맞습니다. 소돔을 건드렸고

큰 성 바벨론을 건드렸고

애굽을 건드렸고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유대교를 건드렸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심판이자 저주를 퍼부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인간 구원 건드리는 놈은 이 시체처럼 된다고 자신들의 승리를 노래하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의 죽음도 그런 이유로 벌어진 겁니다.

감히 하나님의 선택된 민족의 종교인 유대교를 건드리다니?

 

! 성전을 헐라 삼일 만에 짖겠다 라고 라고???

감히 교회를 건드리다니?

 

요즘은 교회 건드리면 삼대가 망한다는 저주는 안해요

더 노골적으로 목사 건드리면 삼대가 망한다고 저주를 하잖아요

교회와 목사는 돈 잔치를 하기 때문에

건드리면 안된다고

심지어 돈 안내면 삼대가 망한다 라고 공갈 사기를 친다 말이죠

 

소돔이요 애굽이다 말이죠

그러니 제발 목사 마음껏 건드립시다

 

인간구원이 옳은지

아니면 너희가 죽인 곧 너희 곧 인간구원 때문에 죽인

너희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3일만에 살려내사 주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기 아들의 구원이 옳은지를

 

이 두 구원의 충돌로써 벌어지는 장소가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이다는 겁니다.

 

그럼 두 증인은 인간 구원 때문에 시체가 된 겁니까?

배에 쓴 말씀을 먹은 겁니까?

굵은 베옷 곧 상복을 입은 겁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구원 때문에 시체가 된 겁니까?

 

다시 강조하지만

소돔은 하나님을 위해 죽겠다고 하는 자들인 자칭 하나님의 자녀들의 모임입니다.

절대로 바로 이런 완악한 수건을 절대로 안 벗는 자들이다 말이죠

바리새인들이 자칭 남은자라고 자부했고

심지어 베드로 조차도 주를 위해 죽겠다 라고

남들은 몰라도 때려죽어도 나는 절대로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끝까지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따라 가겠다고 하는 모습이 바로

약속하신 성령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유대인 누구나 유대교라는 종교에서 너도나도 다 나오는 고백이다 말이죠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자라고 하셨다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인간의 구원 즉 노동이라는 시간투자와 그에 대한 보상인 구원으로 보는데 있어서

 

예수님을 구원하는 것은 그런 행함이 아닌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 용서하신

인애와 자비라는 사랑으로 예수님을 구원하는

십자가의 다 이루심 이다는 겁니다.

그러니 미래완료에서 거꾸로 쳐들어 오는 것이기에

 

두 증인 모세도 엘리야도 제발 죽어주세요 라고 변화산에서 외쳤다 말이죠

 

아니 인간구원이 목적이라면 주여 제가 주를 위해서 죽겠습니다 이래 나와야 되잖아요

그런데 싸가지 없이 주여 제발 죽으세요 라고 거꾸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자 이렇게 되면 인간의 믿음이라는 행함은 다 날라가 버리는 겁니다.

 

진짜로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의 죽음

곧 인자가 나무에 높이 달린 이 죽음만을 쳐다보기만 함으로써 구원되는

예수님의 구원만이

이 소돔을 이 애굽을 허무는 주님의 나팔 승리이다는 겁니다.

 

아니 분명 짐승이 지옥에서 올라와서 두 증인을 죽여 시체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오로지 매매 되는 것은 두 증인의 모가지 밖에 없다 말이죠

다른 것은 소통이 안되요

 

누가 봐도 짐승이 이겼잖아요

유대인이 이겼잖아요

 

두 증인은 시체가 되엇고요

예수님은 시체가 되엇다 말이죠

 

십자가의 다 이루심이란 상대적인 마귀의 정체가 들추어진

그 어떤 방해에도 다 이루었다 이거든요

 

그러니 사람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은 반드시

이 마귀가 승리했다고 착각하는 날인

미디안의 날을 거쳐서

애굽의 날

바벨론의 날

앗수르의 날을 거쳐서

등장하지

 

이것 없이 나오지 않는다 말이죠

 

반드시 빛은 어두움을 배경으로 깔고

카페트로 깔고서 그 위로 등장하지

 

대 낮에 빛을 비추이지 않는다 말입니다.

 

자 그렇게 차이라는 사건으로써

 

두 증인이 죽음으로써 짐승이 이긴줄 알았는데

 

아 그런데 그 시체에 누가 깔려 죽는고 하니

자기가 잡은 노예에게 도리어 짖밟여 죽는 겁니다.

 

자기가 잡아 죽인 그 노예의 시체에 자기가 도리어 깔려 죽는다 말이죠

삼손이 생각나죠

블레셋의 날 곧 제사 날에

삼손을 괜히 잡아서 눈 뽑고 머리카락 짤랐다 말이죠

머리카락에서 힘 나온다고 삼손도 착각했지요

그러면 블레셋의 착각은 더더욱 착각 할 수 밖에 없죠

 

머리카락에서 나오는 구원은 구원이 아니무이다.

구원은 도리어 머리카락 짤림으로써 구원이 나와요

 

블레셋은 더 이상 구원이 안 나온다고 죽였고 시체로 만들었는데

오히려 구원이 더 풍성하게 나오더라 말이죠

이것이 바로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이 아닌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구원이다 말이죠

 

구원은 도리어

애굽왕과 애굽의 군사에게서 나온다 말이죠

그들을 통해서 영광 받으십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구원자 라는 말이 아니라

사건 자체가

그들이 나서줘야 구원이 성사가 되는데 있어서

반드시 그들은 몽둥이를 쥐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

십자가의 다 이루심에서 나오는 증상이다는 겁니다.

 

이미 뭘 해도 십자가의 승리인데

따로 자기의 승리를 따로 마련한다는 자체가

십자가의 승리를 뒤바꿀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바꾸겠다고 나서는 자체가

도리어 십자가의 승리를 더욱더 재촉케 한다 말이죠

그렇다고 저들이 무슨 뾰족한 수도 없으니

없으니까 더더욱 빨리 칼을 쥐고 몽둥이를 쥔게

십자가의 자작극에 말려드는 셈이다 말이죠

 

아니 한 쪽 기생이

솔로몬 왕의 지혜가 자기 예상대로 딱 맞아 떨어졌다고

좋아라고 박수 친다고 해서

지혜라는 인물이 자기편이 되겠냐 말이죠

정작 지혜는 그 한 쪽 기생의 소원처럼 차라리 아기를 둘로 갈라서

저도 가지지 말고 나도 가지지 말게 해 달라고 한 것에

지혜라는 인물이 정작 그 두 개로 쪼개지는 그 아기의 죽음에 뛰어들줄 누가 알았으리요?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예수님의 죽음에 하나님이 뛰어들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그것도 모르고 우리는 도리어 몽둥이 쥐고

하나님의 자리에서

심판주의 자리에서

도리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 라는

재판관 노릇을 했다 말이죠

이게 소돔이다 말이죠 소돔

 

(1:10, 개역)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듣기는 들어도 보기는 보아도

그 정도로 내 구원 내구원에 귀도 눈도 다 막혔다 말이죠

그래놓고 실로암소경 정죄 하기 바빠요

우리가 이런 모습이다 말이죠

 

예수님 구원에 관심이 없어요

성경 말씀을 이거 딱 하나만 예정이 되어 있는데

예수님을 구원하는 십자가 말이죠

 

바보들 지금 칼을 쥐고 두 증인을 죽였다고 승리했다고 즐거워하는데

도리어 그것이 이미 다 이루어진 종말의 끝에서 나온 증상이기에

 

괜히 칼을 쥐고 괜히 몽둥이를 쥐고서 두 증인을 죽여 시체 만든 것이

그 시체에 자기가 깔려 죽는줄도 모르고

 

삼손 잡았다고

두 증인 잡았다고 시체를 걸어두고 좋아라 했다 말이죠

 

지금 현재 이스라엘 나라 보세요

예수님을 죽임으로싸 승리해 본들

아직까지도 구원 구원 외치면서 그 의문의 반복을 역사로 계속 한다 말이죠

끝이 없어요

 

저 이스라엘의 모습이 모든 인간의 모습이다 말이죠

유대인은 모든 인간의 대표성으로 성경에 언급이 되었으니까

우리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냐 말이죠

 

평화의 도시 아무리 소유해 본들 구원 없어요

인간의 구원은 헛된 허구요 우상이라니깐요

 

평화란 전쟁이 마침이 없이는 평화가 없다니깐요

마귀들 저거들끼리 서열 싸움만 한다 말이죠

음녀는 짐승을 올라타야 하고

짐승은 음녀를 죽이고

그러니 힘에 대한 권력에 대한 그 결핍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미국이든 뭐든 다 이용해 먹는 겁니다.

아무리 트럼프 라는 자본의 힘으로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이 차지해 본들 의문의 반복일 뿐입니다.

 

앞의 글 이사야서 그날이 오면에서도 언급했지만

한국도 마찬가지 이다 말이죠

아무리 그날을 바라고 바래도 안 와요

문익환 키즈들이 독재와 맞서서 이겨도

소용없어요 의문의 반복 뿐이니

다시 독재가 또 오도록 되어 있고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해요

둘이 한 패 인줄 몰라요

좌파나 우파나 한 패다 말이죠

독재 박정희와 그의 키즈들이나

민주열사 문익환과 그의 키즈들이나

서로 물고 뜯고 싸우는 음녀와 짐승으로써 한 패거리이다는 겁니다.

결국 둘 다 인간 구원이거든요,

아무리 어준이가 닥치고 명바기 싫다 라고 해도 둘이 한 패이다 말이죠

그런 혈과 육의 싸움은 밑도 끝도 없어요 의문의 반복입니다.

 

(고전 15:50, 개역)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고 또한 썩은 것은 썩지 아니한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

(6:12, 개역)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정작 전쟁의 마침은 오로지 십자가의 다 이루심 외에는 없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속임수를 펼치느냐 말이죠

 

서로 속이고 속이는 속임수로 그 평화의 도시 아무리 차지해 본들 평화 없어요

청와대 차지해 본들 소용없어요

막힌 담을 허물기는커녕

도리어 더더욱 높이 높이

누가 더 높이 담을 쌓느냐 라는 의문만 반복할 뿐이다 말이죠

 

그 정도로 인간의 구원은 헛된데

그 허구를 매매하고 소통하고자

자본을 끌어 모으고 결국 자본싸움이거든요

그 의문을 영원히 반복하고자 말이죠

 

그래서 두 증인을 죽여서 시체를 걸어놓고 승리했다고 좋아라 한다 말이죠

 

그런데 두 증인을 다시 삼일만에 살려 버리십니다.

자 이래 되면 인간의 구원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의 무기라는 사망의 권세는 이제 아무 쓸모짝도 없는 헛똑똑이처럼 헛무기가 된다 말이죠

 

왜 살려냈어 왜 살려냈어?

오로지 예수님의 구원만을 위한 성경말씀이요 예언이요 계시이거든요.

 

이것만이 또렷하기 때문에

헛깨비와 충돌 시키는 겁니다.

 

아니 분명 죽였잖아요

그리고 똑똑히 죽은거 봤제 라고

감히 왕에게 덤비면 이런 꼴이 된다고 일부러 시체를 달아놓잖아요

배 배 배신하면 죽음이야 라고

왕만이 승리자 라고 이것만이 소통하는 것이 국가요 종교 곧 소돔인데

 

죽여도 소용이 없어져 버리면

더 이상 저들의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는거다 말이죠

죽음이 먹혀 들지 않는데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 말씀인 희년이 너희 귀에 응했다 라고 했을때에

그들은 자기구원에 훼방놓는 예수님을 도리어 낭떠러지로 몰아 떨어뜨려 죽일려고 했다 말이죠

 

종교는 이게 목적이다 말이죠

라멕의 노래다 말이죠

 

자기구원을 위해서라면 하나님께 목숨까지 바치지만 그 하나님이 방해해 버리면 죽여버리겠다는 것이 인간구원이라는 허구 허상 우상이다 말이죠

 

이 마귀에 모든 유대인들이 넘어가버렸다 말이죠 장악당했어요

 

아니 이런 믿음도 곧 행함이죠 안통하는데

 

십자가에서 또렷히 밝혀지기를 그게 속임수였다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하잖아요

아뿔사 내가 속임수에 속았구나

인간의 꾀에

자기 꾀에 자기가 빠졌구나

 

주여 살려주세요 라고

내 손으로 죽인 예수님께 제발 이 사망에서 건져내달라고 한다 말이죠

 

왜냐하면 더 이상 예수님의 구원 되심 곧 너희가 죽인 예수를 다시 살리사 주가 되게 하셨으니

 

더 이상 주인이 없어요

왕이 없어요

 

죽기를 무서워 사망이 왕노릇하는 그 권세에 종노릇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졸지에 이 사망을 이기심으로써

다른 왕이 없게 되더라 말이죠

정작 본인 당사자 사도바울 본인이 죽여봤거든요

누구를 예수님을

그런데 만났다 말이죠

누구를

너가 핍박하는 나사렛 예수를

 

아니 자기가 죽였는데

사망이 안 먹히니

 

이 사망의 왕 보다 더 나은 왕인 생명의 왕을 만났으니

의인은 믿음으로 다시 살거든요

행함으로 다시 살지 않아요

역사적으로 다시 살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원인 없는 결과로

이유 없이 사랑으로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 다시 살지

미완료로는 다시 살지 않는다 말이죠

 

왜 나를 용서했느냐에 대한 이유를 캐 묻지 마세요

믿음의 영역이요 믿음의 세계이지

행함의 세계가 아니다 말이죠

 

그래서 삼일의 간극을 만드시는 겁니다.

인간구원(행함)과 예수님을 구원(믿음)하는

이 두 구원의 충돌 장소가 바로 소돔이자 동시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곳이다 말이죠

인간구원이 날 빼내는 구원인지

예수님을 구원하는 그 구원이 감히 내까정 빼내시는 구원인지

진짜 전쟁을 보여주신다 말이죠

혈과 육의 서열 싸움이 아니라

악한 영과의 싸움을 보여주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구원하는 구원인지

구원자들로부터 구원하는 구원인지(마귀의 세가지 시험)

 

아니면

인간 구원

허구를 구원하는 것은 마치 안개를 곧 사라지는 것을 구원해서 뭐하게

헛될 뿐인데

허깨비는 허깨비일 뿐 구원하지 말자

지나가고 사라지고 없어지는 것을 구원해 본들

구원이 아깝다 말이죠

 

그림자를 구원해서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실상을 구원해야지요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사도바울이

그 속임수에 자기가 속아봤으니

더 이상 속겠냐 말이죠

 

이미 실상이 떳기에

그림자는 누락이 되어야 한다면서

실상의 구원만을 위해

그림자의 구원은 헛것임을 외치면서

두 증인은 신나게

주의 눈물의 주의 병에 담고자

막 죽어 나가는 겁니다.

막 죽어요 막

 

그래서 행함이 있는 믿음 곧

삼일 이라는 간극을 펼치는 겁니다.

 

모세는 물을 변하여 피로

엘리야는 삼년반 천이백육십일 동안 비오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마치 기생라합이 자기민족 자기신을 배신하고 집문서 나라문서 국가토지 문서 다 팔아서 여호화께 다 팔아넘기듯이 초토화 시키는 겁니다.

 

또 아브라함은 자기아들 이삭을 바쳐요 글쎄

유다도 자기아들을 담보로 삼아요 글쎄

 

이거 흉내내라는 말이 아니라

 

요셉의 세 번 뺑뺑이 돌리는 그 3일의 간극 벌리기에서

나의 죄를 가지고 오라는 겁니다.

내가 예수님을 죽인 자 곧 내가 원수 맞습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야 피 발라서 패쓰 하고 넘어갈꺼다 말이죠

그러니 모세는 변화산에서 예수님 별세해 주세요 라고 한다 말이죠

아브라함처럼 행함이 있는 믿음을

그것도 느닷없이 천삼백년 만에 나타나

그말 한마디 하고 사리지더라 말이죠

엘리야도 미투 죠 뭐

느닷없이 구백년 만에 나타나서 말이죠

이런 미투 운동은 때려 죽어도 안해요

 

예수님 몸 기준이 아니라

자기 몸 기준이니까 말이죠

 

그래서 자꾸 몽둥이를 쥘려고 하니

자기 구원을 쥘려고 하니

라멕처럼 노래하고 있으니

그 자기구원노래에 깔려 죽는 겁니다.

자기구원이 허상인데 그 허구 우상에 깔려 죽는

 

차라리 저 십자가의 죽음이 내 죽음입니다 라고

꺽으신 뼈로 비로소 눈 떳다고

어두운 우리의 눈이 주를 미워했다고

상한심령의 자리에서 울어야 하는데 말이죠

 

노래 부르다가 그 속임수 노래에 자기가 자기 노래에 깔려 죽는 겁니다.

유대인이 시편을 달달 외웟는데

그 시편 대로 오신 예수님을 죽임으로써

좋아라 했건만

자기가 외운 자기노래인 시편에

유대인들이 글쎄 깔려 죽어요

 

유대인 곧 모든 인간의 대표성 말이죠

 

요즘은 나치 히틀러가 유대인 보다 더 낫다고 욕하던데

더 낫기를 뭘 요

다들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아넘어가라고 그런 사태를 벌린줄도 모르고

 

실로암 망대 무너지니까 하나님한테 저주 받았다고

맞지요 예수님?

 

예수님은 그 다음은 너 차례인데????

 

다 연결 되어 있습니다.

남의 일이 아니다 말이죠

우리의 속내를 대신 들켜서 보여주고 있다 말이죠

 

우리는 두 증인을 죽인 짐승의 모습이다 말이죠

살해하고

그 시체를 걸어놓고

그 죽음을 매매하고 사고 팔고 기뻐하고 오락으로 삼은

이 종교에 미쳐 있다 말이죠

국가에 미쳐 있고

짐승에 미쳐 있다 말이죠

 

이런 짐승을 심판하시고자

우리의 짐승같은 속내를 들추어낸

두 증인의 죽음

예수님의 죽음

십자가의 죽음이 얼마나 고맙지 않습니까?

 

그래서 모세는 어서 죽어주세요 라고

비싼향유를 부은 여인처럼 죽지도 않은 에수님을 이미 죽은냥 미리 장사치르듯이

향유를 시체에 바르듯이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앞당겨 버리는 겁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라서 제자들이 이 여인의 행동을 거부하는 이유입니다.

 

이미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 곧

뿌뿌뿌 나팔 승리의 나팔소리로 인해서

나타나는 증상이기에

 

이 증상을 즐기시면 됩니다.

 

오늘도 주님이 승리하셨고

나는 실패했음에 감사하는

 

뭘 해도 죄 뿐임을 주님의 나팔 소리가 이미 떳기에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우리가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3일만에 다시 살려내셔서 우리의 주가 되게 하신

예수님을 구원하심에

모든 무릎을 꿇게 하신

예수님이 구원받으심이 옳았고

나의 구원은 헛되고 틀렸음을 외침으로써

 

그 주로 인해 구원사건을 보여주시는 이 은혜를

 

승리의 나팔 소리가 밝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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