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나는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 (22, 1-21)

계 49 나는 처음과 나중, 시작과 끝이라. (계 22, 1-21).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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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19, 개역)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42:9, 개역) 보라 전에 예언한 일이 이미 이루었느니라 이제 내가 새 일을 고하노라 그 일이 시작되기 전이라도 너희에게 이르노라

(31:22, 개역) 패역한 딸아 네가 어느 때까지 방황하겠느냐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 곧 여자가 남자를 안으리라

(43:19, 새번역) 내가 이제 새 일을 하려고 한다. 이 일이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내가 광야에 길을 내겠으며, 사막에 강을 내겠다.

 

(22:1, 개역) 또 저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22:2, 개역)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22:3, 개역)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22:4, 개역)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저희 이마에 있으리라

(22:5, 개역)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저희에게 비취심이라 저희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22:6, 개역)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결코 속히 될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22:7, 개역)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22:8, 개역) 이것들을 보고 들은 자는 나 요한이니 내가 듣고 볼 때에 이 일을 내게 보이던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더니

(22:9, 개역) 저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책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22:10, 개역) 또 내게 말하되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

(22:11, 개역)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22:12, 개역)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22:13, 개역)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22:14, 개역) 그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저희가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얻으려 함이로다

(22:15, 개역)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22:16, 개역)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22:17, 개역)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22:18, 개역)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22:19, 개역)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22:20, 개역)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22:21, 개역)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22:1, 새번역) 천사는 또, 수정과 같이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나님의 보좌와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 나와서,

(22:2, 새번역) 도시의 넓은 거리 한가운데를 흘렀습니다. 강 양쪽에는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는 생명 나무가 있어서, 달마다 열매를 내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 쓰입니다.

(22:3, 새번역) 다시 저주를 받을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그 도성에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가 도성 안에 있고, 그의 종들이 그를 예배하며,

(22:4, 새번역) 하나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들의 이마에는 그의 이름이 적혀 있고,

(22:5, 새번역) 다시는 밤이 없고, 등불이나 햇빛이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주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릴 것입니다.

(22:6, 새번역) 천사가 또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직하고 참되다. 예언자들에게 영을 내려 주시는 주 하나님께서 자기의 종들에게 곧 일어날 일들을 보여 주시려고, 자기의 천사들을 보내셨다.

(22:7, 새번역) '보아라, 내가 곧 오겠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라."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22:8, 새번역) 이 모든 것을 듣고 본 사람은 나 요한입니다. 내가 이 모든 것을 듣고 볼 때에, 이것들을 내게 보여 준 그 천사의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려고 하였더니,

(22:9, 새번역)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지 말아라. 나도, 너와 너의 동료 예언자들과 이 책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과 같은 종이다. 경배는 하나님께 드려라." / , '형제들'

(22:10, 새번역) 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이 책에 적힌 예언의 말씀을 봉인하지 말아라.

(22:11, 새번역) 이제는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러운 채로 있어라. 의로운 사람은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채로 있어라."

(22:12, 새번역) "보아라, 내가 곧 가겠다. 나는 각 사람에게 그 행위대로 갚아 주려고 상을 가지고 간다.

(22:13, 새번역) 나는 알파며 오메가, 곧 처음이며 마지막이요, 시작이며 끝이다.

(22:14, 새번역) 생명 나무에 이르는 권리를 차지하려고, 그리고 성문으로 해서 도성에 들어가려고, 자기 겉옷을 깨끗이 빠는 사람은 복이 있다.

(22:15, 새번역) 개들과 마술쟁이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을 사랑하고 행하는 자는 다 바깥에 남아 있게 될 것이다.

(22:16, 새번역) 나 예수는 나의 천사를 너희에게 보내어, 교회들에 주는 이 모든 증언을 전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요, 그의 자손이요, 빛나는 샛별이다."

(22:17, 새번역) 성령과 신부가 "오십시오!"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도 또한 "오십시오!" 하고 외치십시오. 목이 마른 사람도 오십시오. 생명의 물을 원하는 사람은 거저 받으십시오.

(22:18, 새번역) 나는 이 책에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합니다. 누구든지 여기에 무엇을 덧붙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 책에 기록한 재앙들을 덧붙이실 것이요,

(22:19, 새번역) 또 누구든지 이 예언의 책에 기록한 말씀에서 무엇을 없애 버리면, 하나님께서 이 책에 기록한 생명 나무와 그 거룩한 도성에서 그가 누릴 몫을 없애 버리실 것입니다.

(22:20, 새번역) 이 모든 계시를 증언하시는 분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 내가 곧 가겠다." 아멘. 오십시오, 주 예수님!

(22:21, 새번역)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성도에게' 다른 고대 사본들은 절 끝에 '아멘'이 없음

 

 

흔히 철학이나 과학 등 인간의 모든 학문은 진리를 탐구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진리가 아니라 진리를 알고 있는 인간 본인을 탐구하는 거죠

 

최종 목적지를 형상이라고 하는데

최종 목적지가 진리가 아니라 인간 곧 자기자신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천국에 선악나무가 없는 이유 입니다..
오직 오늘 본문처럼 생명나무만 있습니다.

하나님 형상 회복운동이라는 둥 그런 선악의 형상을 깨뜨리는 것이 바로
생명나무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바로 이 선악의 형상= 하나님과 같이 된 형상을 깨뜨리는 형상이 바로 그리스도의 형상 곧 처음과 나중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태어난 날을 생일이라고 해서 자기의 시작으로 보고 있지만

성경은 그 사람의 생일로 안 보고 예수님의 시작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 생일을 저주 한다고 예수님의 시작을 본 자들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백 하는 자가 없으면 반박을 못하겠는데

욥도 있지요 (3:1)

구약의 참선지자들도 있지요 (화로다 화로다 나여)


(
20:14, 개역) 내 생일이 저주를 받았더면, 나의 어미가 나를 생산하던 날이 복이 없었더면,

(51:5, 개역)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신약의 사도들과 성도들이 이런 고백을 해버리니까 반박을 못합니다
.
(누가 이 사망이 몸에서 건져내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7)

 

그리고 반대로 그 사람이 늙어 죽든, 병들어 죽든, 사고로 죽든, 그 죽음을 끝으로 보고

이제 더 이상 없다 라고 끝 ~~~! 빨래 끝! 마침, 종료 로 보고 있지만

성경은 그 사람의 끝을 안 보고, 예수님의 끝을, 예수님을 끝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시작과 끝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거죠

태어난 생명도, 죽어버려 끝나는 죽음도, 애초부터 없었던 겁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처음과 나중을 말하기 위해서 태어나야만 했고 죽어야만 했던

예수님의 시작과 끝만 있지

인간 개개인의 시작과 끝은 없었다는 거죠.

 

이 말을 다른 말로 오늘 본문의 의미대로 하자면

선악나무가 없다는 뜻입니다.

즉 생명나무만 있다는 거죠

생명나무 되시는 예수님 곧 알파와 오메가 되신 예수님만 있다는 겁니다.

 

물론 한 쪽은 예수님의 긍휼을 말하기 위한 그릇이고

다른 한 쪽은 예수님의 진노를 말하기 위한 그릇으로써 말이지요
생명을 담는 그릇
생명을 못 담는 그릇

 

그것도 태어나기도 전에 말이죠.

태어나기도 전에 그러니까 생일을 저주 할 수 밖에 없지요
자신의 시작과 끝을 저주 아니하고는 못 배깁니다. 김저주 김심판 김불의 김패역 말이죠.

 

인간이 어딜 건방지게 자신의 시작과 끝을 규정하냐 말이죠

주님이 마치지 않는 이상 끝낼수가 없는 겁니다.

아무리 혼자 자살해서 목숨을 끊어 끝내버려도

다시 살려내서 영원한 지옥불에 집어넣음으로써 예수님의 오메가를 외쳐야하는 부정적인 도구인

마귀 역할, 진노의 그릇 역할을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과학에서 즉 현대의 종교가 과학이지요

과학은 시간과 공간을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뭔데? 몰라

공간이 뭔데? 몰라.

규정하자마자 모호해지고 의문에 빠지게 됩니다.

 

오늘 보라 속히 오리라 라고 시간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말은

무소식이 희소식이다는 관계개념이지 시간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이미 왔는데요 뭘

이미 라고 또 시간으로 표현된 언어로 보이지만

관계성입니다.

 

성경은 시공간적인 언어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지켜야 합니다.

시간도 꽉꽉 채워야 하고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공간도 꽉꽉 채워야 합니다. (성전을 보호하고 사수해야 합니다. 가장 우선시로 말이죠.)

 

그런데 시공간 자체가 없어요 (성전을 헐라 3일만에 짖겠다) 

모조리 관계성의 언어 뿐입니다.

존재의 언어는 없어요.

 

그러니 행할게 없어요 행할게 ~~~~~~

원인이 없어요 원인이 ~~~~~

 

그냥 주님께서 어떤 사건을 벌리셨는가를 보는 겁니다.

원인 없는 결과를 선언해 버리셨는가? 말이죠

원인이 없어요! 결과만 있어요!!

 

시공간이 없어요

그냥 통보 뿐입니다.

 

주여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낫겠나이다

 

(7:7, 개역)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치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

(7:7, 새번역)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7:7, 공동) 감히 주님을 나가 뵐 생각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낫겠습니다.

 

(7:1, 새번역) 예수께서 자기의 모든 말씀을 백성들에게 들려주신 뒤에, 가버나움으로 가셨다.

(7:2, 새번역) 어떤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는데, 그는 주인에게 소중한 종이었다.

(7:3, 새번역) 그 백부장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 사람들의 장로들을 예수께로 보내어 그에게 청하기를, 와서 자기 종을 낫게 해달라고 하였다.

(7:4, 새번역) 그들이 예수께로 와서, 간곡히 탄원하기를 "그는 선생님에게서 은혜를 받을 만한 사람입니다.

(7:5, 새번역) 그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우리에게 회당을 지어주었습니다" 하였다.

(7:6, 새번역)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가셨다. 예수께서 백부장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이르렀을 때에, 백부장은 친구들을 보내어, 예수께 이렇게 아뢰게 하였다. "주님, 더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저는 주님을 내 집에 모셔들일 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7:7, 새번역) 그래서 내가 주님께로 나아올 엄두도 못 냈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셔서, 내 종을 낫게 해주십시오.

(7:8, 새번역) 나도 상관을 모시는 사람이고, 내 밑에도 병사들이 있어서, 내가 이 사람더러 가라고 하면 가고, 저 사람더러 오라고 하면 옵니다. 또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고 하면 합니다."

(7:9, 새번역)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기시어, 돌아서서, 자기를 따라오는 무리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이스라엘 사람 가운데서는, 아직 이런 믿음을 본 일이 없다."

(7:10, 새번역) 심부름 왔던 사람들이 집에 돌아가서 보니, 종은 나아 있었다.

 

 

그저 윤리적인 겸손을 떨려고 하는게 아닙니다.

성경은 윤리책이 아닙니다. 오히려 윤리를 깹니다.

윤리를 넘어서고 있다 말이죠

 

시간을 들여서 그 환자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을 해서

환자에게 가야 하는 시간을 채워야 비로소 치료를 하던가 말던가 할텐데

 

그래되면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지요

껍데기와 껍데기의 만남 말이죠

병을 고쳐본들 어차피 또 병들고 나중에는 죽는다 말이죠

그런 존재의 만남이 아니라

 

반대로 기능과 기능의 만남이기에

치료의 목적이 아니라

처음과 나중되신 당신이 누구이신가를 말하기 위한 기능으로써

환자가 되어서 의사를 외친다는 겁니다.

말씀만 하소서 당신은 알파와 오메가 이신 창조주요 심판주입니다.

당신이 끝났다 라고 하시면 끝나는 겁니다.

 

그러니 처음과 나중도 시간적인 의미가 아닙니다.시작과 끝은 시간이 아니라

 

정 그렇게 되면 시작점과 끝지점의 테이프를 붙여버리면

양쪽을 붙여버리면

시작과 끝이 같아 진다 말이죠

그럼 시작이 어디인지? 끝이 어디인지? 알길이 없죠

 

시공간으로 따진다면 존재 라는 것이 그렇게 모호하고 의문의 반복 뿐이다 말이죠

 

보고픈것만 보고 듣고픈 것만 듣게 되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것을 못 증거한다 말이죠

단절을 못 증거해요

불가능성을 못 증거해요

알파와 오메가를 못 증거해요

 

아니 알지 못하는데

시공간적인 인지 속에서는 알지 못하는데 알길이 없는데

알지 못하는 것을 무슨 수로 증거하냐 말이죠

문제를 풀어야 푼 뒤의 시간 뒤에 답이 있는데

시간도 없이 어떻게 답이 나오냐 말이죠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는 문제가 없고 답만 있어요

원인이 없고

선악이 없고

생명만 있다 말이죠

문제 자체가 없으니까 풀 필요 조차도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살려고 할 필요가 없어요

내가 주인공이 아니라

살려주심으로만 살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저분이 알파와 오메가 이다 저분의 주인공 됨을 말하기 위한 피조물이다는 겁니다.

주인공의 증상물이다 말이죠

 

그러니까 백부장에게 이런 믿음이 크도다 라고 또 양적으로 크다 라고 하지만

사실상 성령이 덮쳐져서 반칙으로 무시험 합격시켜서

문제를 풀 필요가 없이

답을 즉 문제지를 받지도 않고 써 내려 버리는 겁니다.

 

얼마전 쌍둥이 자매와 그의 아빠 선생의 짜고치는 고스톱보다 더 부조리한 스캔들이 바로

기묘자의 모략 곧 시온에서 나오는 돌의 모략 곧 십자가의 지혜이다 말이죠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낫겠습니다 라고

아니 하인되는 종이 무슨 수로 낫냐 말이죠

원인도 없는데

병원도 가지도 않고 어떻게 낫냐 말이죠

 

그런데 오히려 처음과 나중 세계는 알파와 오메가 세계는

오히려 그런 원인이 있어 버리면 결과가 없어요

낫겠나이다 가 없어요

구원이 없어요

구원은 원인이 생기면 없는 겁니다.

오히려 원인이 없어서 생기는 것이 구원이다 말이죠

 

그러니 선악의 언어가 아닌 생명의 언어가 성경말씀입니다.

모든 종교는 선악의 언어이니까 교리 플러스 실천이다 말이죠.

복음은 그 반대로입니다.

실천이 있어 버리면 결과가 없다 말이죠.

네 맞습니다.

시간도 들인 것도 없고

공간도 이동한 것도 없는데 어떻게 낫냐 말이죠

 

나을 필요 없어요

원인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이미 결과가 떠 버렸거든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말하는 관계의 기능입니다.

 

이것 때문에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십니다 라는

새찬양하기 위해서

세 번 부인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나를 찬송케 하기 위함이라 라는 말씀이 먼저 있었고

처음이요

그 처음의 증상으로써 나중에 세 번 부인이 있는 겁니다.

이 간극의 변, 이 둘을 잇는 선이 바로 의 의로움

나보다 옳았다 라는 옳음, 옳으심, 공적인 자유인 진리.

 

곧 거룩이다 말이죠 곧 율법의 정신, 율법의 완성 사랑이다 말이죠

공무원인 바리새인 제사장 레위인들은 율법의 완성인 사랑은 버리고

껍데기를 지키는데 달인들이였다는 겁니다.

회칠한 무덤이다 말이죠 생명이 없어요

선악의 달인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

선생이면서 의를 버리는 공의를 버리는 자 말이죠

(
23:2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23:23, 새번역)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것들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했지만, 이것들도 마땅히 행해야 했다.

 

이것이 바로 이 공적인 자유가 인간에게 없기에

자꾸 빈자리를 자꾸 울리는 꽹과리로 채우는 겁니다.

안식일 지켰다는 둥 등등

 

즉 의사를 말할려면 환자가 될 수 밖에 없다 말이죠

이게 바로 거룩 곧 의 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 분은 처음과 나중 이십니다 라고 말할려면

나는 시간 속에서 공간 속에서 삭제 당하는 자로써 외치는 겁니다.

왜냐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를 외쳐야 하기 때문이거든요

 

이 목자가 먼저 있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잃어버림 당하기 싫어도 잃어버림 당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


탕자가 되기 싫어도 탕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막살기 싫어도 막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목자를 말해야 하는 기능이거든요 존재가 아니라!!

존재는 때려죽어도 못해요

존재는 기껏해야 시간과 공간을 채웠다는 소리 밖에 못합니다


맏아들은 지금까지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고만 말할 뿐이다 말이죠

부자청년도 마찬가지

바리새인도 마찬가지

 

그들은 기능 곧 관계가 없어요

예수님을 말하도록 되어 있는 기능이 없어요


그래서 시작도 끝도 자기자신으로 채우도록 되어있기애


시간을 들이고 즉 시간을 꽉꽉 채우고 안식일 지키듯이 주일성수 하듯이

공간을 꽉 꽉 채우는 겁니다. 46년 동안 성전 지었다고 우깁니다,
그 의문 덩어리 허뭅니다. 그 울리는 꽹과리 찢어버리십니다.

 

그거 3일이라는 간극 곧 의로움이 곧 거룩이 다 날려버립니다.

날리지 않으면 의가 아닙니다 사랑이 아닙니다.

 

처음과 나중이 우리의 시공간 곧 역사를 날려버립니다.

날려버리지 않으면 처음과 나중이 아니지요

 

주님의 의로움 곧 거룩은

우리의 그런 시공간으로 채운 것들을 다 날려버리시는 의로움입니다.

그래야 무화과나뭇잎으로 가린 수치로는

수치가 굴러가지 않습니다.

 

가죽옷으로 가린 수치만이 수치가 굴러갑니다.

불과 심판이 묻지 않는 겁니다.

 

? 이미 심판을 받았거든요

죄 값을 치렀거든요

그 시작이 바로 십자가의 저주요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나타내시며)

그 끝이 새벽별로써 인도해주시는 새벽별 되신 주 이십니다.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베푸시나이다)

 

밤에 주의 성실하심으로 개시 시작 구원을 펼치시고자

우리를 죽이시고

아침에 우리를 주의 인애와 자비로 다시 살리심으로써

죽음을 사망을 어두움을 통과케 하시는 새벽별을 주시는 겁니다,
이것을 의로움 곧 거룩이라고 한다 말이죠 율법의 완성 사랑

이 의를 펼치는 것이 바로 공적인 자유의 종사자 바로 공무원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이죠.

 

(22:16, 개역) 나 예수는 교회들을 위하여 내 사자를 보내어 이것들을 너희에게 증거하게 하였노라 나는 다윗의 뿌리요 자손이니 곧 광명한 새벽별이라 하시더라

 

새벽별 곧 이사야서 표현대로 하면 남은씨 이새의 줄기에서 난 한 씨를 주겠다입니다.

이 남은 씨가 먼저 떳기에 다시 아침을 보도록 함이 먼저 있었기에

밤에 죽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두움에 삼키운바가 됩니다. 다 짤라버려요

그러나 어두움이 도로 내뱉습니다. 요나의 표적이지요

 

즉 이 남겨둔 씨가 아니였다면

새벽별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같았을 것이다 말이죠

 

그래서 남겨준 씨가 먼저 있었기에

 

불뱀에게 물리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먼저 있었다를 말하는 기능이기에 말이죠

 

이것이 바로 의로 맺어진 관계성입니다.

 

지금 백부장은 여기까지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시온에서 나온 율법 곧 돌로 인해서 모든 인간은 죽어 마땅한 자 임을

종을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원인 없는 결과로

 

예루살렘에서 나온 말씀 곧 새벽별로 인해

조금 남겨준 씨로 인해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나을 수밖에 없는

말씀이 바로 당신입니다 당신만이 처음과 나중이십니다 라고

백부장이 외치고 있는 겁니다.

 

여기에 역사 곧 시간과 공간 즉 행함이 끼여들 틈이 없습니다.

원인이나 조건을 만들 필요가 전혀 없어요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맏아들의 외침이 들어갈 자리가 없이 튕겨나가버립니다.

공간이 없는데 공간을 마련할려고 하니 웃끼잖아요

시간이 없는데 그 시간이 없는 그 속에 따로 시간의 자리를 마련할려고 하니 말이 안되죠

 

이 모든 것에 오로지 예수님의 처음과 나중 만이 꽉 차입니다.

그것도 역사 속에

시간과 공간 속에

자리 한 자리 차지 할려고요?

아닙니다.

역사를 찢을려고 말이죠

시공간이 감당이 안되어서 찢겨지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시공간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나을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3일의 간극인 주의 의를 외치는 겁니다.

주의 처음과 나중을 꽉꽉 야무지게 또박 또박 또렷하게 밝히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이 의를 외치는 나라가 바로 천국이다 말이죠

존재의 천국

존재로써 천국에 가는 나

그런 거 없습니다.

 

나 라는 개인이 천국에는 없다 말이죠

장소 공간이 아닙니다.

관계입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어주시는 이 신랑과 신부의 관계성이 천국이다 말이죠

 

이것을 먼저 구하라 라는 겁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이죠

 

떨어져 있는 자 같으나 같이 붙어있는 이 관계성에

불의한 자가 말려드는 겁니다. 곧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이 없다는 맏아들 말이죠

오히려 의로움을 가득 채웠는데

그 역사 곧 시공간이 찢어지는 겁니다.

감당해 볼테면 감당해 보라는 겁니다.

안 찢어지는지 찢어지는지 말이죠

 

오히려 누가 봐도 불의한 탕자가 이 아버지의 사랑으로 인해

찢어짐을 당하지 않는 새벽별을 받게 되는 겁니다.

 

?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있었지

단 한번도 아버지 말씀을 어긴적 없었다는 맏아들이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였거든요

차라리 탕자는 아버지의 의가 먼저 있었다는 이유로

탕자가 될 수 밖에 없는

막사는 자가 될 수 밖에 없는

환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오늘 백부장 언급했는데

종이 병들 수 밖에 없는

? 처음과 나중 되시는 예수님을 말하기 위해서 병들 수 밖에 없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기 위해서 날 때부터 소경이 될 수 밖에 없었다는 거죠

 

날 때부터 소경 됨이 먼저 있었던게 아니라 ~~~~~~

 

그래서 말씀만 하옵소서

예루살렘에서 새벽별이 나옵니다. 말씀이 나옵니다.

처음과 나중이 나옵니다

나의 시작과 끝은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당신이 시작이요 끝입니다.

당신이 시작하라 다시 태어나라 하시면 다시 태어나야만 하고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 나와야 합니까? 이스라엘 선생이면서도 이 공적인 자유를 외칠수가 없는 바리새인과 반대되는)

당신이 너는 끝이야 라고 하시면 뭘해도 죽어 마땅한 끝내야만 하는

그저 말씀만 담는 그릇일 뿐입니다.

진노의 그릇인지 긍휼의 그릇인지

그것은 토기장이 마음대로 일 뿐입니다.

 

당신만이 처음과 나중입니다 라고 말하기 위한 관계 곧 기능이기에

말씀만 하옵소서 라고

시간도 공간도 당신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는 겁니다.

 

이 분이 보라 내가 속히 오리라 라고

이미 와서 자신의 처음과 나중되는

찢으셨다가 다시 싸매시는 의를 펼치고 계시는 겁니다.

 

내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해야만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펼쳐지는게 아니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벌써 이미 펼쳐졌기에

그 증상으로 우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마치 백부장의 종이 병들어야만 했던 것이

말씀이 예루살렘에서 나온다 라는 것을 외쳐야 하기 때문에 말이죠

즉 말씀이 벌써 예루살렘에서 나와서 활동하고 계시잖아요

그러니 이 말씀이 아니였다면

이 처음과 나중이 아니였다면

우리는 의가 발려지지 않아서

벌써 벌써 소돔과 고모라처럼 벌써 되었다 말이죠

 

아직 시간적으로 안되어서가 아니라

 

벌써 오셨기에 우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벌써 속히 오셨다는 그 증상으로써 구하고 있는 겁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말이죠

처음과 나중을 말이죠

시작과 끝을 말이죠

알파와 오메가를 말이죠

 

이 간극이 바로 의 라고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는

거룩입니다.

 

이 거룩을 나에게는 있을수도 없고 불가능하고 단절이 되어버린

흑암의 백성, 사망에 주저 앉은자, 개같은 이방인이오니

이 거룩을 이 의를, 이 십자가의 지혜를

펼쳐달라고

백부장이 외쳤듯이

사도요한은

이 주님의 의를 외치고 있는 겁니다.

 

이미 벌써 속히 이루어졌기에 그 증상으로써

시작과 끝을

처음과 나중을 외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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