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너희가 어두움 뿐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 (사 59, 9-18).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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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2 너희가 어두움 뿐인 이유는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 (사 59, 9-18)


412 우리는 주님을 늘 배반하나
187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을 밝히시는 여호와의 구원의 손 (사 59, 1- 8)
이사야 2017 2020. 8. 29. 13:46
18-101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함을 밝히시는 여호와의 구원의 손 (사 59, 1- 8)


(사 59:9, 개역)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즉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두움뿐이요 밝은 것을 바라나 캄캄한 가운데 행하므로』
(사 59:10, 개역) 『우리가 소경 같이 담을 더듬으며 눈 없는 자 같이 두루 더듬으며 낮에도 황혼 때 같이 넘어지니 우리는 강장한 자 중에서도 죽은 자 같은지라』
(사 59:11, 개역) 『우리가 곰 같이 부르짖으며 비둘기 같이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나 없고 구원을 바라나 우리에게서 멀도다』
(사 59:12, 개역) 『대저 우리의 허물이 주의 앞에 심히 많으며 우리의 죄가 우리를 쳐서 증거하오니 이는 우리의 허물이 우리와 함께 있음이라 우리의 죄악을 우리가 아나이다』
(사 59:13, 개역) 『우리가 여호와를 배반하고 인정치 아니하며 우리 하나님을 좇는데서 돌이켜 포학과 패역을 말하며 거짓말을 마음에 잉태하여 발하니』
(사 59:14, 개역) 『공평이 뒤로 물리침이 되고 의가 멀리 섰으며 성실이 거리에 엎드러지고 정직이 들어가지 못하는도다』
(사 59:15, 개역) 『성실이 없어지므로 악을 떠나는 자가 탈취를 당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시고 그 공평이 없은 것을 기뻐 아니하시고』
(사 59:16, 개역) 『사람이 없음을 보시며 중재자 없음을 이상히 여기셨으므로 자기 팔로 스스로 구원을 베푸시며 자기의 의를 스스로 의지하사』
(사 59:17, 개역) 『의로 호심경을 삼으시며 구원을 그 머리에 써서 투구를 삼으시고 보수로 옷을 삼으시며 열심을 입어 겉옷을 삼으시고』
(사 59:18, 개역)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시되 그 대적에게 분노하시며 그 원수에게 보응하시며 섬들에게 보복하실 것이라』

(사 59:9, 새번역) 『그러므로 공평이 우리에게서 멀고, 공의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우리가 빛을 바라나, 어둠뿐이며, 밝음을 바라나, 암흑 속을 걸을 뿐이다.』
(사 59:10, 새번역) 『우리는 앞을 못 보는 사람처럼 담을 더듬고, 눈먼 사람처럼 더듬고 다닌다. 대낮에도 우리가 밤길을 걸을 때처럼 넘어지니, 몸이 건강하다고 하나 죽은 사람과 다를 바 없다.』
(사 59:11, 새번역) 『우리 모두가 곰처럼 부르짖고, 비둘기처럼 슬피 울며, 공평을 바라지만 공평이 없고, 구원을 바라지만 그 구원이 우리에게서 멀다.』
(사 59:12, 새번역) 『주님, 주님께 지은 우리의 죄가 매우 많습니다. 우리의 죄가 우리를 고발합니다. 우리가 지은 죄를 우리가 발뺌할 수 없으며, 우리의 죄를 우리가 잘 압니다.』
(사 59:13, 새번역) 『우리가 죄를 짓고 주님을 부정하였습니다. 우리의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물러가서, 포학한 말과 거역하는 말을 하면서, 거짓말을 마음에 품었고, 또 실제로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사 59:14, 새번역) 『그래서 공평이 뒤로 밀려나고 공의가 멀어졌으며, 성실이 땅바닥에 떨어졌고, 정직이 발붙이지 못합니다.』
(사 59:15, 새번역) 『성실이 사라지니, 악에서 떠난 자가 오히려 약탈을 당합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보셨다. 공평이 없는 것을 보시고 슬퍼하셨다.』
(사 59:16, 새번역) 『압박받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이 없음을 보시고, 중재자가 없음을 보시고, 주님께서는 놀라셨다. 주님께서는 직접, 억압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려고, 반드시 공의를 이루시려고, 당신의 능력을 친히 발휘하실 것이다.』
(사 59:17, 새번역) 『주님께서 공의를 갑옷으로 입으시고, 구원의 투구를 머리에 쓰셨다. 응징을 속옷으로 입으셨다. 열심을 겉옷으로 입으셨다.』
(사 59:18, 새번역) 『그들이 한 대로 갚으신다. 적들에게 진노하시며, 원수들에게 보복하신다. 섬들에게도 보복하신다.』

(엡 6:17, 새번역)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받고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십시오. / ㉥사 59:17』

(사 59:9, 현대어) 『[민족의 죄를 고백하는 예언자] 원수들이 와서 우리를 괴롭혀도 하나님께서 막아 주시지 않는 이유를 이제야 우리가 알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해방의 빛을 소원하는 데에도 불구하고 사방으로 어둠에 휩싸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밝은 날이 오기를 고대하지만 항상 캄캄한 밤중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사 59:15, 현대어) 『이제 이 성중에서 진실한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악행에서 손을 떼는 사람이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당합니다. [하나님의 간섭] 여호와께서 그들의 악행을 모두 보시고, 그들에게 법과 정의가 없는 것을 아주 나쁘게 보셨다.』

(사 59:9, 쉬운)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재앙이 닥쳤다> 그러므로 정의가 우리에게서 멀리 사라졌고, 공평을 찾을 길이 없다. 우리가 빛을 바랐으나 어둠뿐이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걷고 있다.』


하나님을 배반 안 할 자신이 있나요?
처음부터 너무 오바 하는 질문 인 것 같죠

그런데 우리가 배반하냐 안하냐가 아니라

주님 쪽에서 만약 배반을 하신다 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요?

우와 믿을 놈 없네 라고 나올꺼 아니겠습니까?

자 이렇게 되면 우와 나 안 믿을란다 라는 정당성을 갖게 되니까

문제는 믿음 놈 없구나 로 끝나는게 아니라
그래 당신은 이제 못 믿겠다 라고 안믿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아주 아주 적극적으로 배신할 당위성

자 이제 우리도 배반할 권리가 생겼다 라고 나온다 말이죠

그런데 사실은 처음부터 그랬어요
그 증거가 바로 광야에서의 원망 10번 이상의 원망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원망 하면 안되는데 원망했구나 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원망하지 말자가 아니예요

사도바울이 원함은 우리에게 있으나
육체가 약해서 안된다 라고 했다 말이죠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7, 개역)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 7:18, 개역)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롬 7:19, 개역)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롬 7:23, 개역)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사로 잡아 온다 라고 했어요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권세의 문제로 보는 겁니다.
주님은 이 권세 문제를 다루시지
인간 상대 안합니다

즉 인간을 통해서 일하지 않아요
인간에 대해서 권세 문제를 들추어내시는 거죠

그래서 앞의 글 마태복음 21장 무화과 나무 저주와
에스겔 22장의 찌꺼기 이스라엘에 대한 풀무불 저주가
권세 문제를 말하시고자 이스라엘을 다루시는 겁니다.

그러니 이스라엘이 아니면 저주 라는 권세
지옥이라는 권세
사망이라는 권세를 말하지 않는 겁니다.

이것은 동시에 이스라엘이 아니면
천국이라는 권세
생명이라는 권세를 말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하시는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배제 시키는 단절 시키는 방식으로써
이스라엘에 대해서 두 권세를 투영시킨다는 거죠

그러니 주님이 의도적으로 이 육체를 건드리신 겁니다.
애굽 에덴 동산과 같은 애굽인의 육체가 아니라
광야 속의
지옥 속의 이스라엘의 육체를 말이죠
율법이 있는 민족을 말이죠
죄 아래 가두시는 겁니다.

왜? 7에 70번 용서하시고자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인애와 자비를 집어넣으시고자 말이죠

그래서 물 없는 곳
양식 없는 곳 
원망할 만한 곳으로 일부러 의도적으로 인도했어요

원망 배신 안 튀어나오고 배길까요?

자 이것은 권세 문제입니다.

주님이 어느 정도로 귀하냐
권세를 다루신다는 점에서
그것도 사망의 권세 말이죠

음부의 권세도 다루시지만
그 음부의 권세도 이기지 못하는 생명의 권세도
교회의 열쇠도 다루신다 라는 겁니다.

(마 16:18, 개역)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계 1:18, 개역)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계 3:7, 개역)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가 가라사대』
(사 22:22, 새번역) 『내가 또 다윗 집의 열쇠를 그의 어깨에 둘 것이니, 그가 열면 닫을 자가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자가 없을 것이다.』
(마 16:19, 새번역)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다시 보세요
이스라엘의 죄악들이 쭈욱 나열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도 이런 판국인데
우리 이방인은 오죽 하겠냐 말이죠

제가 아무리 성화가 된 교회를 다녀봐도
사람들 즉 교인들이 이 죄목들에서 벗아난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목사 조차도 그래요
지난 주에 에스겔서에 나열된 이스라엘의 죄악들이

딱 내네 할매 내 네 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자가 바로 다윗 아닙니까 라고 했다 말이죠

그런데 그런 다윗에게 열쇠를 주다니
주님 배신입니다 배신 
반칙이다 반칙 안카고 배기겠습니까?

다윗의 열쇠란
다윗이 가지고 소유하는 열쇠가 아니라

그 반대로 다윗을 열어재끼고 다윗을 닫아재끼는
다윗을 자물쇠로 삼아버린 열쇠를 두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니 다윗은 죽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겁니다.

그 열쇠가 바로 다윗의 집에서 나오는 다윗의 자손이다는 거죠
다윗 
원수 다윗을 살리는 꺽으신 뼈가 바로 예수님이다는 거죠

여기서 다윗은 왜 죽어야 만 합니까
다윗이 범죄를 저질러서? 
하나님을 배신해서? 아닙니다.

원래 모든 인간은 죽어야 해요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죽어야만 하느냐 그것도 다윗이 말이죠

바로 열쇠가 떳기 때문에
장대 높이 달린 인자가 열쇠 이거든요
열고 닫고 하는 열쇠

그 열쇠가 바로 저분임을 말하기 위해서
다윗은 죽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저분이 열쇠이기에
다윗은 다시 살아야만 하는 겁니다.
다윗이 구원 받을 만한 조건이 단 하나라도 있어서? 아닙니다.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다시 살아나야만 하는 겁니다.
왜? 다윗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분 열쇠가 바로 그 일을 하시는 분이다를 말하기 위해서
다윗은 오히려 귀한 취급 받은게 아니라
찌끄래기처럼 구경꺼리가 되는 거죠

누가 자물쇠를 귀하다고 찾는자 봤나요?
모든 초점을 열쇠 찾기에 시선이 가 있잖아요

누가? 율법을 제사를 번제를 귀하다 라고 찾냐 말이죠
정작 율법은 몽학선생으로써 저분이 열쇠다 라고 외치고 있는데
왜 율법 찾냐 말이죠
오히려 가두는 거지
올무는 잡아서 가두는 기능입니다

그럼 잡혀있고 포로 되어 있고 갇혀 있는 자는
무엇을 찾나요?

율법 외에 한 의

즉 열쇠를 찾아야 할 것 아니겠냐 말이죠

아무리 자기 자신을 귀하게 여겨 보세요
자물쇠가 열리나

열쇠만을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만 풀리게 될 것 아니겠냐 말이죠

그래서 다윗은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겁니다.
왜? 열쇠 이기에

모세는 변화산에서 주여 어서 죽어주세요 라고
비로소 기쁜소식을 외쳐요 글쎄
아니 율법의 대표자가 율법을 외치지 않고

예수님의 죽음 곧 새 일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새 일
새 것을 외치냐 말이죠

왜 십자가의 죽음을 외치냐 말이죠

열쇠 이거든요

자기는 갇혔다는 겁니다.

아니 풀렸잖아요
변화산에서 1300년 만에? 나타났잖아요

아뇨
모세는 지금 권세 문제를 운운하기 위해서 다시 사라져야 합니다.
과연 그 모세는 모세 맞기는 맞을까요 라는 존재 백날 따져 보세요
소용 없어요
기능을 따져 보세요

몇 마디 하고 사라졌어요
그것이 바로 열쇠를 말하고자 나타났다는 겁니다.

자 왜 갑자기 열쇠 이야기로 빠졌냐
다윗이 외치고자 한 열쇠 이기 때문입니다.

왜? 다윗이 하나님을 배신 안한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나열된 이스라엘의 범죄가
다윗이 단 하나라도 벗어날 수 있는게 단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열쇠가 주어졌다 라는 겁니다.

마치 다윗은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어여만 하는 실로암 소경인 셈이고
열쇠는 그런 다윗을 날 때부터 소경 곧 어두움 뿐인 범죄자로 태어나도록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범죄자가 되도록 했다 라고
예수님이 빛임을 열쇠임을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또 배 배 배 배신이야 라고 배신 하면 누굽니까

네 맞습니다 베드로 아닙니까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

유대인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눈동자가 왜 까맣냐
물론 파란 눈동자도 있지만
이들은 검은 눈동자로 일반화 해서 토론하며 규정한 거다 말이죠

어두움 속에서 빛을 보라 라꼬

캬 끝내주는 지혜 아닙니까
그런데 바로 그런 지혜를 말하는 본인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때려죽어도 예수님을 거부하면서 빛으로 못 본다 말이죠

희한해요

지금까지의 역사를 보면
유대인이 천재이고 모든 근대의 문명을 다 이끌어 가고 있거든요
아인슈타인 보세요

그 혜택을 얼마나 크게 누리냐 말이죠
그런데 못 봐요

자기들이 말해 놓고도

또 옆길로 빠졌는데

베드로가 배신의 아이콘이다 말이죠
가룟유다와 함께 말이죠

그런데 왜 용서 받았을까요?

차이를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어요

찾는놈 있으면 그거 가짜입니다
없어요
인간 쪽에는 없어요

그래서 주님은 열쇠로써 이렇게 언급하십니다.

태어나기도 전에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이 되었고 즉 베드로 다윗인 거죠
또 반대로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움받기로 작정이 되었다 즉 갸룟유다요 사울와 이다는 거죠

그럼 오늘 본문은 이사야가 지금 이스라엘은 회개 같은 것
지금 이스라엘의 범죄가 나열이 되어 있는데 그런 것 인정 할까요 안할까요?

안하는데 이사야 혼자 우리가 이런 범죄를 저질러서 당연히 심판 받아 마땅합니다.
이스라엘은 멸망 당해 마땅합니다 라는 식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정작 이스라엘은 거짓선지자에 빠져서
평강이다 평강이다 절대로 이스라엘 망할 리가 없다 라고 외치는
그 거짓선지자와 함께하고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의 말이 맞잖아요

아무리 맞아도 지금 내가 중요하고 내가 귀한데
누가 이사야의 말을 듣고
저런 이스라엘의 범죄를 인정하겠냐 말이죠

마치 나는 망해도 쌉니다
저주 당해도 마땅합니다
심판 받아 죽어야 합니다 라고 나오는데

내가 내 스스로 하는 것도 될까 말까 인데
나의 죄악을 누가 대신 옆에서 상한심령이 되어서 외친다면
기분 좋을까요?

그것도 내 개인의 문제가 아니예요
이스라엘 집권자 지도자들 문제 아닙니까
평범한 시민 
일반인으로써 이 얼마나 억울 하냐 말이죠

그런데 개인 문제로 취급하시는데 아니라
한데 묶어서 전체로 다루시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지금 누구의 운명 속에 집어넣냐 말이죠

네 맞습니다 다윗입니다.

범죄자 다윗

왕으로써의 다윗
귀하디 귀한 다윗 운명 속에 집어넣을려는 자는
오히려 절대로 망할 리가 없다 라는 거짓선지자이고

참선지자는 잃어버린 다윗과 다시 되찾은 다윗이라는
탕자 다윗
범죄자 다윗의 운명 속에 이스라엘 전체를 집어 넣을려고
대신 울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윗처럼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 구조를 짜깁기 하고 있었다 말이죠
가룟유다가 그래서 하나님 나라 운동을 하고 있는데 왜 안 도와주냐 라고 팔아버렸잖아요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은 이 권세 문제를
새 일
새 구조
새 권세

곧 새 것 되신 예수님의 죽음으로 새로 짜깁기를 하시는 겁니다.

여기에 동원이 되는 것이 헌 구조 로써 다윗이 동원이 되는 겁니다.

언약에 동원이 되는 비언약으로써 말이죠

아브라함 언약이란 아브라함을 비언약의 자리에서 다루신 
언약이 다룬 언약이 아브라함 언약이다 말이죠

사람 이름이 나오는 언약 개념은 사람은 비언약으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마치 의사라는 언약은
환자라는 비언약을 다루심으로써 언약 되심을 이루시듯이 말이죠

여기에 괜히 반말하는 의인이다 건강한 자다 라고 나오는 사단의 회가 있다 말이죠
괜히 나서는 겁니다.
아니 나설수가 없거든요
이것이 진노의 그릇인 거죠

비언약이라고 환자를 공격하면서 말이죠
괜히 환자를 죄인을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집어넣어주니
오히려 이들은 고맙죠 뭐

그러나 악인은 이 고난을 이 심판을 견디지 못하거든요
그러니 심판 당하는게 아니라
심판 할 줄 만 아는 겁니다.
심판 할려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야 하니까 말이죠

비천한 자리에 앉을 턱이 없잖아요
그러면 심판을 못하거든요

그러니 다윗을 반드시 왕 자리에서
원수의 자리
죄인의 자리로 끌어내려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이스라엘을 바로 이런 다윗의 운명 속에 집어 넣어야 할까요 말아야 할까요?
그것도 왕자리에 앉은 다윗이 아니라
원수의 자리에 앉은 다윗의 운명 속에 말이죠

거짓선지자는 끝까지 딴나라당처럼 빤스목사와 손잡은 딴나라당처럼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서
왕 자리에 앉은 다윗의 운명 속에 집어넣고자

절대로 이스라엘은 망할 리가 없다 라고 거짓선지자 다운 기능을 해야만 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그러니 거짓선지자처럼 이스라엘은 세상사람들이 자기 나름대로의 세상을 구성하듯이
구조를 짜니까
정작 하나님이 구상하신
생명의 권세를 말씀하시고자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의의 권세를 거부하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거리끼는 걸림돌
너무 너무 싫다 라는 거죠
목에 걸려 봐요
뱉을수도 없고 삼키지도 못하고
평생을 목에 뭔가 걸려 있으면

쪼끔만 신체에 장애가 있어도 기피하면서 가까이 할려고 하지 않는 인간인데

목에 걸려 가시를 뺄수가 없으니
심심하면 입에 물 거품을 뿜으며 쓰러지고 있으면
너나 구원받으세요 남에게 설교 하지 말고 라고 나올꺼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사도바울은 가시를 빼 달라 라고 기도 할 수 밖에 없어요

그런데 안 빼겠데요
왜? 배반 할까봐

아니 사도 바울 못 믿습니까?

네 주님은 안 믿는데요 글쎄

우리는 다 사도 바울 믿는데 왜 주님은 못 믿을까요?

배반이라는 말은
주님이 짜 놓은 구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늘 자기가 짜놓은 구조를 매일 매일 새롭게 형성하면서
그 구조 대로 살려고만 하도록 되어 있는 육체이다는 거죠

육체가 있는 이상
믿냐 안 믿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아예 상대 자체를 안 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 은혜가 네게 족한 줄 알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미 새 것 곧 예수님의 죽음 이라는 구조로 다 짜여졌고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겁니다.
이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왜 또 의문의, 희미한 것을 반복하냐 말이죠

(고후 12:9, 개역)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1, 개역)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고후 12:2, 개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3, 개역) 『내가 이런 사람을 아노니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고후 12:4, 개역)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고후 12:5, 개역) 『내가 이런 사람을 위하여 자랑하겠으나 나를 위하여는 약한 것들 외에 자랑치 아니하리라』
(고후 12:6, 개역) 『내가 만일 자랑하고자 하여도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아니할 것은 내가 참말을 함이라 그러나 누가 나를 보는 바와 내게 듣는 바에 지나치게 생각할까 두려워하여 그만 두노라』
(고후 12:7, 개역)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후 12:8, 개역)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난 또 삼천층이라는 용어를 하도 많이 들어서
63빌딩처럼 63층 엘리베이터처럼 3000층 인줄 알았는데

세 번째 하늘
하늘 천 ㅋㅋㅋ

이 얼마나 대단하냐 말이죠
아무나 가진 경험이냐 말이죠

물 위를 세 번 걸었던 베드로도 오죽 했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그런 자기자신이 귀하디 귀한 자로 자기 자신을 스스로 귀하게 여길까봐

주님은 일부러 천하디 천한

찌끄레기

루저 외톨이 센척하는 겁쟁이
못된 양아치
외톨이 상처뿐인 머저리
더러운 쓰레기

로 만드신다는 겁니다.

왜? 이미 귀한 분이 떳기에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이 다윗의 운명
하나님의 원수
하나님을 배반한 자로 다윗의 운명 속에 집어 넣으시는 겁니다.

에스겔 22장처럼 풀무불 속에 집어 넣어요
찌끄래기처럼

그 정도로 저주하시겠다는 말씀은

축복을 반드시 하시겠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것에 베드로는 눈 녹듯이 녹아 버리는 겁니다.

제가 주님을 억수로 사랑하는 거 알지예??????

베드로는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자기가 귀했다 말이죠
절대로 예수님을 배신하지 않겠다
끝까지 따라가겠다 장 지지겠다

그래 베드로야 내가 봐도 너 멋있었어
그래 그래야지 그것이 스승님에 대한 제자의 도리 아니겠니 라고

자기가 귀했다 말이죠 귀한 말만 골라서 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처참하게 무너지는 겁니다.

왜 일까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 이라는 구조가
이 생명이라는 새 일의 권세가 먼저 떳거든요

지난 주 이사야 말씀 주의 구원의 손이 먼저 떳기에

우리는 주의 발등상의 원수로써 등장해야 한다는 겁니다.

지난 주 에스겔 이번주 에스겔 서처럼

일방적으로 이스라엘의 범죄들이 쭈욱 나열이 되는 겁니다

빠져나갈수 있는 자가 없어요

난  일반 시민이지 권세자도 아니요 권력을 쥔 적도 없고
갑질도 할 수 없는 가난한 시민입니다 라고 해도 소용 없어요
이스라엘 전체를 한 묶음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왕 하나 개판이면 백성 전체도 똑같이 취급해 버리시는 겁니다.

왕 하나 잘 하면 아무리 개판인 백성도 똑같이 취급해 버리신다 말이죠

바로 이런 구조 문제, 권세 문제를

주님이 지금 새 일 중심으로 새로 판을 짜는 겁니다.

이제는 주변 나라
인류 전체 역사까지
미래까지 다 규정하실려고 새 판을 짜신다 말이죠

예수님 한 분만 귀하고
나머지는 다 천하게
찌끄래기로 만드는

그래야 만민이 주 앞에 나와 무릎 꿇고
입술로 경배를 할 꺼 아니겠습니까

사도행전에 에디오피아 내시가 그랬듯이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이 그렇지 않게 되면
남방 여왕으로부터 심판 받고
회개한 니느웨 백성으로부터 심판 받는다 말이죠

이스라엘이 심판 해야할 니느웨가 도리어 회개를 해서
회개치 않는 이스라엘을 도리어 니느웨가 심판을 하는
팔이 어긋맞게 된 상황으로

새롭게 재 구성하는 그 기준이 바로

십자가의 저주 라는 새 일 곧 예수님의 죽음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모든 민족이 무릎 꿇는데
왜 이스라엘은 하지 않는가?

높아진 마음 곧 자기가 귀해서 말이죠

목이 안 꺽어져서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원망 안 하고자 하는 것이 목이 곧은 백성이고
원망 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라는 것이 목이 꺽어진 백성이다는 겁니다

제가 다녀본 교회에서 모두다 거꾸로 가르쳐요
목사 뿐만 아니라
반사 주일학교 교사들 다 이래요
전도사도 마찬가지고
그게 방종 이라는 용어가 나올 수밖에 없는 이유죠

이것이 바로 주님이 제시한 구조를 거부하는 배반이다는 겁니다.

제발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세요
귀하디 귀한 자기를 지켜본들 안 지켜집니다
내가 내 스스로 수치를 가리우고자
수치를 안 당하고자 하는 그런 무화과 나뭇잎은
불에 홀라당 타는 옷일 뿐입니다

불에 타지 않는 옷을 제발 돈주고 값없이 사라 말이죠
부자가 살 턱이 없죠
자기 잘난 맛에 사니까

마음이 가난한 자는 자기를 더 이상 의지하거나 기대하거나
사람들 조차도 의지할 필요가 없기에
그 정도로 비천한 쓰레기 찌기이기에
자기 조차도 자기를 기대하지 않기에
피 옷을 값없이 사는 겁니다.

이 굴욕적인 구원이
주님이 제시하시는 구조입니다.

즉 십자가의 지혜인
하나님의 미련함
하나님의 어리석음 이다는 겁니다.

여기에 인간은 자기가 똑똑한 줄 알고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식으로만 세상을 따로 구성하다 보니

십자가로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성한
주님의 피로 구성한 피 옷이
자기가 구성한 것과 안 맞는 겁니다.

죄인에게만 딱 맞는 옷이거든요

그 잃어버린 양 하나만 찾는 겁니다.

(사 46:3, 개역) 『야곱 집이여 이스라엘 집의 남은 모든 자여 나를 들을지어다 배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안겼고 태에서 남으로부터 내게 품기운 너희여』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자에게는 안 맞는 피 옷이다 말이죠

이 피 옷을 재단하시고
피 옷에 맞는 자만 찾으시는 겁니다.

정작 이스라엘은 다들 그 피 옷을 거부합니다
배반 합니다

그런데 귀신 들린 딸의 어미가 그 옷 아니면 나 죽습니다 라고
나는 개 돼지에게 귀하디 귀한 진주를 던질수 없다

네 맞습니다
저는 개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천한 개도 주인이 던져준 부스러기를 먹지 않습니까 라고
드디어 피 옷으로 재 편성한 새 일 새 역사 새 이스라엘 속에

이방인 여자가 경배하면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을 귀하게 영접하는 겁니다.

바로 이런 자 만드시고자
주님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는 겁니다.

이 잃어버림으로 인해 되찾는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보라 라꼬

예수님의 죽음이 새 것임을
나머지는 다 지나가고 헌 것이고 사라질 것임을 말이죠

예수님이 곧 생명이시고
빛이시다면
나머지는 죽음이고 어두움 뿐이기에

이 빛을 중심으로 세상을 구성하는 새 일에 의해
인간은 더더욱 어두운 뿐인 세상을

의지하고 기대하는 허구성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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