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여호와의 신이 임한 선지자 (사 61, 1- 7).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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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07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여호와의 신이 임한 선지자 (사 61, 1- 7)


샤론의 꽃 예수

이스라엘아! 너는 나의 구원이요 나의 찬송이라 (사 60, 15-22)
이사야 2017 2020. 10. 4. 10:20
18-106 전에는 비록 버림받고 미움 당했으나 이제는 영영한 아름다움과 대대의 기쁨이 되리라 (사 60, 15-22)

(사 61: 1- 7, 개역)
1,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신원의 날을 전파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로 의의 나무 곧 여호와의 심으신 바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사 61:1, 새번역)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니, 주 하나님의 영이 나에게 임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 ㉡갇힌 사람에게 석방을 선언하고, / ㉠또는 '겸손한 사람' ㉡칠십인역에는 '눈먼 사람'』
(사 61:2, 새번역) 『주님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언하고, 모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사 61:3, 새번역) 『시온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재 대신에 화관을 씌워 주시며,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발라 주시며, 괴로운 마음 대신에 찬송이 마음에 가득 차게 하셨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의의 나무, 주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나타내시려고 손수 심으신 나무라고 부른다.』
(사 61:4, 새번역) 『그들은 오래 전에 황폐해진 곳을 쌓으며, 오랫동안 무너져 있던 곳도 세울 것이다. 황폐한 성읍들을 새로 세우며, 대대로 무너진 채로 버려져 있던 곳을 다시 세울 것이다.』
(사 61:5, 새번역) 『낯선 사람들이 나서서 너희 양 떼를 먹이며, 다른 나라 사람들이 와서 너희의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다.』
(사 61:6, 새번역) 『사람들은 너희를 '주님의 제사장'이라고 부를 것이며,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 라고 일컬을 것이다. 열방의 재물이 너희 것이 되어 너희가 마음껏 쓸 것이고, 그들의 부귀영화가 바로 너의 것임을 너희가 자랑할 것이다.』
(사 61:7, 새번역) 『너희가 받은 수치를 갑절이나 보상받으며, 부끄러움을 당한 대가로 받은 몫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땅에서 갑절의 상속을 받으며, 영원한 기쁨을 차지할 것이다.』

(눅 4:18, 새번역)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 ㉤사 61:1; 2』

(마 11:5, 공동)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 ㉠이사 61:1.』
(눅 4:18, 공동)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 ㉠칠십인역 이사 61:1-2(58:6 참조).』
(벧전 2:9, 공동) 『그러나 여러분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이며 거룩한 겨레이고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두운 데서 여러분을 불러내어 그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해 주신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을 널리 찬양해야 합니다. / ㉠신명 7:6, 10:15; 이사 43:20. ㉡출애 19:5-6; 이사 61:6.』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소욕과 반대 된다고 했습니다.
분명 아름다운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아름다운 소식을 누가 마다 하겠습니까? 기쁜소식인데
혼인잔치 인데

그런데 정작 다들 싫어하는 소식이였던 겁니다.
아름다움이 아니라 나쁜 더러운 소식이였다는 겁니다.

아름답다 와 반대 되는 의미가 뭡니까? 더럽다 그래서 고개를 다들 돌려서 싫어버린 바 되었다입니다.

아니 아름답다 메요??????

앞의 글 마태복음 혼인잔치 비유에서 아름답게 보이나요? 아니면 다들 인상을 찌푸리면서
에이 이런 천국이면 거시기 한데요 라고 나올 수밖에 없는 
거북스럽고 매쓰꺼운 역겨워서 토할 것 같은 천국이 아니고 뭐냐 말이죠
맞습니다 이사야서처럼 한 마디로 말해서 억 으악 비명을 소리칠 정도입니다.
이것이 무슨 잔치날이며 이것이 무슨 기쁜소식입니까 무섭고 두려운 전쟁소식이지

(사 52:7, 개역)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롬 10:15, 새번역) 『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52:7』
(롬 10:15, 공동) 『전도자로서 파견받지 않고서 어떻게 전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는 말이 바로 그 말씀입니다. / ㉠이사 52:7(나훔 1:15 참조).』

(엡 6:15, 새번역)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전할 차비를 하십시오. / ㉣사 52:7; 나 1:15』
(사 52:1, 현대어) 『[노예 소녀에서 여왕이 될 시온] 시온아, 깨어라! 어서 깨어 일어나 힘을 내어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아, 지극히 화려한 네 예복을 다시 입어라! 할례받지 않고 부정하기만 한 바벨론 군대가 이제부터 다시는 너를 짓밟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 1:15, 개역)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나 1:15, 현대인) 『보라, 좋은 소식을 가지고 평화를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다! 유다야. 네 명절을 지키고 네가 서약한 것을 이행하라. 악인들이 전멸되었으므로 그들이 다시는 네 땅을 침략하지 못할 것이다.』
(나 1:15, 현대어) 『[유다에게] 보아라!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의 발이 산을 넘고 넘어 달려온다. 해방의 소식을 들려준다. `저 침략자들이 전멸을 당했으니, 우리에게 해방이 왔다!' 오 유다여, 광복을 선포하고 네가 이미 맹세한 것과 같이 주님만을 경배하여라! 원수 니느웨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니느웨의 그 죄악의 왕조가 영영 사라져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 아름답다면 우리가 이 참선지자를 죽일턱이 없잖아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데 누가 이들을 죽이겠냐 말이죠
그런데 혼인잔치에 오라고 청하는 그 종들을
얼마나 얼마나 많이 죽였나요?

그 정도로 성가시게 했다는 것이거든요
이스라엘은 망한다 라고 외쳤으니 이것은 매국노 나라팔아먹는 자 보다 더 심하거든요.

앞앞 글 에스겔 서만 봐도요
이런 인자를 안 죽이고는 못 배기고픈 싶을 정도로

아니 녹슨 가마 솥 비유를 왜 하냐 말이죠
듣기 좋은 소리가 단 하나라도 있기라도 하냐 말이죠
간따나 부정적인데 거기에다가 비유 비밀까지 더해졌으니
의도적으로 무슨 소리인줄 모르게 만들겠다 라고
이 아무것도 아닌 것에 충성하는 자들을 죽일 수밖에 없도록 
즉 죄인 만드시겠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누가 주여 저 그 가마 솥에 가겠습니까? 
가겠어요 가겠어요 정말 잔치에 가겠어요 라고
기쁜소식으로 들리겠습니까

문제는 아니 글쎄
가겠다 라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배배 배신자가 말이죠
참선지자가 다 이런 식입니다.

성전에 기도하러 간 두 사람 중 한 사람인 바리새인은
전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녹슨 가마 솥처럼 나를 심판하는 줄 모르고

자신의 의를 쌓은 것을 귀하다 라고 내어놓습니다.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얼마나 노력을 했으면 자랑 스럽게 내어놓겠냐 말이죠
그 정도로 귀해요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인 세리는 감히 고개도 못 들고서
그저 심판 주 앞에서 심판 받아 마땅한 죄인임을
귀한게 있어서 내밀것이 있을텐데
아무리 봐도 심판 주 앞에서는 나 조차도 해로움 밖에 안되길래
그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더라 말이죠

창기와 세리가 아무것도 내세울 꺼리가 없었기에
천국가지
만약 조금이라도 내세울 꺼리가 있었다면 천국에 못 간다 말이죠

이런 천국은 인간의 머리에서 나오질 않는다 말이죠

그래서 이런 천국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길인 참선지자들을 우리가 죽였다 말이죠
아무리 아무리 봐도 아름다운 소식이 아니걸랑요

아무리 아무리 봐도 기쁜소식이 아니걸랑요

더러워 고개를 돌리는 싫어버린 바 된 소식이고
아무리 봐도 나쁜소식이다 말이죠

아니 심판을 퍼붓는 혼인잔치가 어디있습니까?
혼인도 안 맞고
잔치도 안 맞아요

심판을 퍼붓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혼인이며 어떻게 잔치냐 말이죠

아 그런데 말이죠
창기 세리에게는 혼인이 맞고
잔치가 맞아요

그래서 구약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생 라합이 말이죠 자기 민족 자기 국가 자기 신을 멸망시키러 오는 이스라엘을 보고
기쁜소식으로 여겼고
아름다운 구원이라고 봤다 말이죠

아니 자신을 멸망시키러 왔는데???? 어떻게
자기 국가를 심판하고자 전쟁하러 왔는데 말이죠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그런 기생 라합이
즉 창녀가
더러운 여자가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요

참 아름다운 족보 맞다 말이죠

어무이께서 어떻게 예수님의 족보는 이렇게 더럽냐 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마구 마구 웃으시면서 말이죠
어떻게 이 더러운 창녀가
노예 계집아이가 어떻게 왕비가 되었냐 라고

이게 지혜 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지혜는 죽은 자를 살릴수 없어요
그저 자기 자랑만 하는 지혜일 뿐이거든요

지혜란 멀쩡히 살아 있는 자를 의도적으로 죽이고
죽인 다음에 그 절망 속에서 다시 살려내는 것이 지혜이다 말이죠

솔로몬이 재판한 아이가 두 동강 나는 아이가 그렇고
멀쩡히 살아있는 나사로를 일부러 다 죽을 때 까지 삼일 뒤에 늦게 가는 이유도 그렇다 말이죠

그런데 인간의 지혜는 그러지도 못하면서 꼴에 똑똑한 척 아무리 해 본들
무식한 줄 모른다는 겁니다.
오히려 무식한 것을 아는 것이 지혜라고 철학자를 흉내내지만
그 트릭에 다들 넘어가지만
어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속이냐 말이죠
테스형 좋아라 하는 유시땡만 보면 아이구 저런 사기꾼 깐족이
결국 더한 깐족이한테 노망들었다 라고 취급받잖아요

그래서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아예 죽은자로 취급해서
이미 모든 인간은 마귀라는 사망의 권세 아래에 사로잡힌자로 취급해서

그들이 보는 시선에, 그 권세에 사로잡힌 바의 시선에 반대되는 식으로만 일하신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더럽고 역겹고 구역질 나고 싫어버린바 되는
혼인잔치를 천국 비유로써 증거하시듯이

오늘 본문 또한 아름다운 소식 이라고 했는데 정작 내용은
전혀 아름답지가 않은

인간에게 이미 각인이 된 아름다움과 완전 정반대의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로만 일관하신다 라는 겁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실때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 라고 했다 말이죠

(마 3:17, 개역) 『하늘로서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 17:5, 개역)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가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막 9:7, 개역) 『마침 구름이 와서 저희를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자 그러면 제자들이 이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버리고
또는 은 30냥에 팔아넘기고

모든 제자들이 각기 제 길로 가 버리는

그런 기쁜소식 그런 기뻐하는 자 그런 사랑하는 아들이 세상에 어디있냐 말이죠

아름답다 메요?
기쁜소식 이다메요

그런데 우리는 반드시 참선지자를 반드시 반드시 죽일 수밖에 없다 라는 것이

그 정도로 우리는 기쁜소식은커녕 아름다운 소식은커녕
우리가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을 자꾸 자꾸 성질나게 건드려서
안 죽이고는 못 배기는 그런 모습으로 왔다 라는 것에


어떻게 아름답다와 기쁨이 우리에게 매치가 되느냐 라는 겁니다.


네 맞아요 안된다 라는 겁니다.
안돼 ~~~~~~~~~~~

그래서 억지로 라도 매치가 합치가 되도록 동원이 된 것이 여호와의 신이다
성령이다 새 마음이다 라고들
주장하는데
성화론자 개혁주의자 다들 이렇게 주장하는데
그게 아닙니다.

억지로 라도 매치 match 가 되도록 일치가 되도록 투입이 되는 것이 성령이 아니라
그 반대로 성령은 그 반대로 매치가 안되도록
일치가 안되도록
단절이 되도록

이 단절의 간극을 철저하게 누리도록 하고자 투입이 되는 것이 성령 곧 여호와의 신이다 라는 겁니다.

앞의 글 에스겔서의 녹슨 가마 솥 비유가 매치가 되던가요?
된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아무리 봐도 매치가 안되어요
합일이 안되어요
우리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에스겔서는 그렇다 치더라도
바로 앞의 글 마태복음 혼인잔치 비유라는 천국이
매치가 되던가요?
매치는커녕 보통의 간극이 아닌
극과 극의 이질감
단절감
이 간극을 매꿀 길이 없을 정도로
단절감을 느끼게 됩니다.

네 맞아요 그거 느끼라고 성경에 기록이 된 겁니다.

그 정도로 안 맞다 라는 겁니다.

전혀 이 성경말씀이 전혀 그 천국 비유가 귀하지 않아요
그 정도로 이미 우리 속에 딴 귀한 것
다른 귀한 것이 이미 자리 잡고 있기에

천국이 그거 부서뜨려 주지 않는 이상
거부감만 계속 나타낼 수 밖에 없어요

주님은 그래 거부감 나타내라
선지자 왜 죽이노가 아니라 선지자 죽여 봐라
또 보내고 또 보내고 끝까지 보내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목배인 영혼을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말이죠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자 이면
선지자를 끊임없이 죽이시더라도 그 딴 남자 딴 하나님을 교체 할 것이고

주님이 사랑하지 않는 자 라면
선지자를 끝까지 보내어 죽이시더라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딴 남자 딴 하나님을 교체 시키지 않을 것이다 말이죠
교체 못하도록 하시고자 선지자를 죽도록 하신 것이다 말이죠

예수님도 그렇게 활용을 하셨거든요

아니 사랑하는 아들이라메요?
기뻐하는 자 라 메요?

그런데 그렇게 허무하게 죽이십니까?
왜 꼭 내 손에 죽이시도록 하시는 겁니까?

그 정도로 십자가 너희들이 다들 싫어한 이 십자가를 
주님은 혼자만 귀히 여기시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십자가가 도대체 뭐 길래?
죽은 자를
잃어버린 자를
천한 계집종을 왕비로 만드는 지혜이거든요

다시 살리는
다시 되찾는

하나님의 의 이거든요
이 의에
이 십자가에 복종케 하시고자 하는
약속이 귀하거든요

다른 것은 하나도 안 귀해요

그래서 이 아름다운 소식을
기쁜소식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자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와 같은 어중이 떠중이 에게는 나타내시면서

창녀 기생 더러운 여자들이 들어간 예수님의 족보
믿음의 족보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
천국을 이 땅에서 펼치시겠다 라는 겁니다.

이 소식이 누구한데만 기쁠까요?

창녀 세리 에게 아름다운 소식이고
가난한 자 얼마나 가난했으면 매일 훔치지 않고서는 못사는 도둑놈 강도에게는 부요한 복된 소식이고
마음이 상한 자들인 환자들에게는 고침이 되는 의사가 나타났다 라는 소식이고
포로된 자에게는 자유케 하는 소식이고
갇힌 자에게는 해방케 하는 소식이다는 겁니다.

누구한테만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시큰둥한 별거 아닌 소식인 거죠
거기서 멈추는 소식이 아니라
아예 시비를 걸어요
꼭 나의 결혼식에 자기 아들 결혼식 참여하라고 
계속해서 집요하게 귀찮게 해요
마음 상하게 해요

아니 마음 상한 자에게 고침이 되는 소식이라메요?

멀쩡했는데 나의 결혼식에 맞추어서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를 일부러 열어서
마음이 안 상했는데 일부러 마음이 상하도록 만들어서
아름다운 청첩장이다 아름다운 혼인잔치이다 기쁨의 잔치이다 라고 나오니

과연 기쁜 잔치일까요? 나쁜 잔치 일까요?

네 맞아요 인간들의 그 좋으신 하나님을 갈아엎어서
나쁜 하나님으로 교체 하시겠다 라는 것이 기쁜소식이다는 겁니다.

여호와의 신이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을 반드시 걸고 넘어지겠다로 나오지
나의 육체의 소욕을 가만히 내버려 둔채로 성령이 주어지는 법은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는 제사의 제물이 탄 냄새가 역겨워 죽는데
특히 저는 기관지도 약하고
몸이 약해서 냄새에 엄청 예민한데
그 향기를 흠향하시면서 아름다운 향기라고 하시더라 말이죠

아니 종이만 태워도 그 냄새가 죽을판국인데
아름답다니?????

어떤 여성이 저랑 비슷하게 자동차 매연 냄새 때문에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서
하다 하다 안되어서 정신과치료까지 받게 되었답니다
그 여성은 역겨워 죽겠다 냄새 때문에 라고 하던데
의사는 대수롭지 않게 이게 믄 냄새가 나냐 너무 예민 반응이다 라고 약을 처방해서
심리적인 안정을 취하도록 했다 말이죠
아 그런데 막상 그 의사가 갱년기가 생기고 하다 보니
그 별나고 별난 여성이 이해가 되면서
온갖 냄새가 다 들어오게 되니까 본인 또한 그런 반응을 하게 되더라 라는 겁니다.
미친 여자 취급했는데 괜히 미안해지더라고

자 이렇게 우리는 죽음 속에 이미 놓여졌고 이미 죽음 속이다 말이죠
예수님이 우리 인간을 보시는 시선은 이미 죽은자로 취급해 버리셨다 라는 겁니다.
사망의 권세 아래에 사망이 왕노릇함에 있어서
죽기를 무서워 사망의 종노릇하는 자로 보신다 말이죠

그 속에서 기쁜소식이요 아름다운 소식이란
그 죄가 다 타버리는 것 아니냐 말이죠

왜냐하면 죄가 다 타는 냄새를 주님은 향기로운 냄새이다 라고 하시니 말이죠
그러니까 가마 솥에 다 집어넣어서 태우시겠다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녹이 쓴 가마가 되어버리니
이제는 가마까지 교체하시겠다 라고
성전을
삼일 만에 다시 짖는 성전으로 교체해서 반드시 다 태우시겠다 라고

이것이 기쁜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즉 인간은 안 변합니다
인간 숙제 없어요

예수님 숙제 밖에 없어요
어떤 숙제
하나님을 교체 시키는 겁니다.

나를 죽이는 하나님으로 교체 시켜요
나를 심판 하시는 하나님으로 말이죠

나를 구원해 주는 하나님은 마귀가 심은 겁니다.
그러니 절대로 이스라엘을 버릴 이유가 없다 라고 나오는 것이 거짓선지자 아닙니까

내가 여호와 인줄 알게 해 주마
바벨론 포로 속에 집어 넣고 말이죠

배신 안하겠다 라고 하는 자를 배신자로 만들고
배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라고 하는 자를 안배신자로 만드시고 말이죠

앞의 글 에스겔서에서 예레미야 본문을 올리기도 했습니다만
시드기야와 그 꼬마 이름 뭐였죠 다시 찾아 보죠

두 무화과 나무 비유에서

여고냐

(렘 24:1, 개역)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유다 왕 여호야김의 아들 여고냐와 유다 방백들과 목공들과 철공들을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옮긴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의 전 앞에 놓인 무화과 두 광주리로 내게 보이셨는데』
(렘 24:2, 개역) 『한 광주리에는 처음 익은 듯한 극히 좋은 무화과가 있고 한 광주리에는 악하여 먹을 수 없는 극히 악한 무화과가 있더라』
(렘 24:3, 개역)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예레미야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무화과이온데 그 좋은 무화과는 극히 좋고 그 악한 것은 극히 악하여 먹을 수 없게 악하니라』


시드기야는 어떻게 해서든 이 이스라엘 살리겠다 라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선악의 소원을 넘어설려고 나서고

극히 좋은 무화과 나무인
싸가지 없는 여고냐는 어리다는 이유로 죽은자로 취급해서 
일방적인 편파 해석입니다
여고냐 자체에서 좋은 나무라고 여길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포로 잡혀갔을 뿐입니다.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8살인지 18살인지
하여튼 아동으로 취급해서
죽은자로 취급해서 무조건 좋은나무라고
포로 잡혀가서 편안히 잘 먹고 잘 살았다 로 나오고

악한 나무는 오히려 우리가 보기에 열심으로 열심으로 나라를 지킬려고 했던 시드기야는
악한 나무로써 자식이 자기가 보는 앞에서 죽임을 당하고
두 눈이 뽑혀져서 고생 고생 하다가 죽도록 되어 있는

인간의 선악 양심 도덕과 정반대의 모습으로써 두 나무의 비유를 펼치시는 이유는

너의 하나님을 남편은 그 음란의 원천을 갈아버리겠다 교체하겠다 라고 나서시는 겁니다.

둘 다 어차피 포로 되었는데 왜 하나는 악한 무화과 나무고 하나는 좋은 무화과 나무냐 말이죠

다윗왕과 사울왕도 똑같아요
둘다 나쁜놈입니다 둘 다 살인자 이구요

그런데 다윗에게는 없는데 외부에서 한 의가
하나님의 의가 와서 대신 죽었다 말이죠
바로 이 꺾으신 뼈로 기뻐했다 말이죠

그러나 사울왕은 똑같은 죄를 지어도
외부에서 대신 죽어주는 기쁜소식이 없었던 겁니다.

가룟유다와 베드로 라는 두 제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룟유다에게는 그저 끝까지 하나님 나라 운동으로 이스라엘 회복을 독립을 외쳤구요
베드로 또한 가룟유다처럼 예수님을 배반한 자로 만들었다 말이죠

문제는 외부에서 십자가가 베드로에게 덮쳐졌다 라는 것
이 차이 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베드로가 자신의 노력으로 이 십자가와 일치가 될려고 했나요 아니면
단절로써 너 조차도 십자가를 질수 없다 라는 너의 숙제를 거부 당하나요

십자가는 나의 대상물이 될 수가 없어요
십자가를 믿음의 대상물로 삼으면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또 내가 귀해져요 귀해져

십자가가 나를 대상물로 삼는
십자가의 숙제이지
내 숙제란 없다니깐요

그러니 십자가는 나를 단절 시키지요
잃어버리게 만들지요
십자가에 못 박게 만들지요

이것이 악한 농부가 내지 못하는 열매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

제가 이 아홉가지 열매는 청년부가 활성화된 어떤 교회에 다닐때에
무지 무지 세뇌 당하듯이 배웠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반대로 배웠다 말이죠

 이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를 세금으로 바칠수 있겠냐 말이죠

(갈 5:22, 개역)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갈 5:23, 개역)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1 사랑
2 희락
3 화평
4 오래 참음
5 자비
6 양선
7 충성
8 온유
9 절제

여기에 상대적인 것이 위에 나옵니다 윗 구절에

(갈 5:18, 개역)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19, 개역)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갈 5:20, 개역)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갈 5:21, 개역)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1 음행
2 더러운 것
3 호색
4 우상숭배
5 술수
6 원수를 맺는 것
7 분쟁
8 시기
9 분냄
10 당 짓는 것
11 분리함
12 이단
13 투기
14 술 취함
15 방탕함
16 또 그와 같은 것들

육체의 열매는 배나 많다 말이죠

이것을 안 알려 주다 보니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고 하니

성령의 아홉가지 열매로 투쟁을 하고요
분리를 하고요
당을 짓고요
원수를 맺고요

무슨 말인줄 아시겠죠

캬 ~~~~~~~~~ 그래서 육체의 열매 15? 16가지를 안 알려줬던 겁니다.

누가 더 사랑하냐 로 시기를 하고
누가 더 오래 참냐 로 분쟁을 했으니 말이죠

우리가 얼마나 속았는지 말이죠

배신 안하겠다 라는 것이 배신 하는 겁니다.

그냥 나는 뭘 해도 배신할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라고 하면
성령의 아홉가지 반칙이 덮쳐질 것인데

내 쪽의 숙제인냥 가르쳐 줬으니
그 동안 육체의 열매를 성령의 열매라고 우기는 짖만 해 왔던 거다 말이죠

항상 빼먹으면서 강조하는 이유가 있어요
눈치 챌까봐

항상 차이로써
상대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안그러면 속아요

그 정도로 우리는 성령 마저도 나의 소유로 삼고자 한다는 겁니다.
그래야 믿는자 라고 인정을 받고
남이 인정을 정 안해주더라도
나 자신 만큼은 예수님을 믿는다 라고 우길수 있을테니 말이죠
자기자신을 그렇게 위로 하는 겁니다.

마치 앞의 글 에스겔 녹슨 가마 솥 비유처럼
성전을 최후의 보루로써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이 진노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구원의 도성으로써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바로 그것이 구원의 도성으로 본다는 자체가
진노에서 벗어나고자 성전으로 모인다는 자체가
그것이 바로 구원을 모독하고
성전을 모독하는 것이다 라고 말이죠

도리어 심판받아 마땅한 죄인이다 라고 세리처럼 나오지 않는 겁니다.
여전히 내가 귀하기 때문에
귀한 내가 멸망당하지 않도록
성전을 이용하고
구원의 도성을 이용하겠다 라는 바로 그 우상숭배를

하나님의 진노는 바벨론을 이용해서 포로 되게 해서
튀어나오도록 하셨다 라는 거죠

그래서 무엇을 교체 하겠다?

너 인간? 아뇨
너의 하나님을 너의 하나님 곧 우상과 하나님을 섞은
그래서 뭐가 우상인지 뭐가 하나님인지도 모를 정도로 마구 마구 섞은 그것을
교체해 버리겠다 라고 나오시는 겁니다.

이것이 기쁜소식이다 말이죠
그 새카맣게 타버린 냄새를 향기롭다 라고 흠향하시듯이
주님 혼자만 기쁘고
주님 혼자만 아름다워요
그런데 그 주님의 새마음을 받은 성령이 임한자가
졸지에 그 아름다운 소식을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자로써 동원이 되는 겁니다.
그 새카맣게 타 버린 제물의 향기를
곧 십자가의 죽음을 아름답다 기쁨이다 참 복되도다 라고 말이죠

우리에게는 하나도 안 기쁜, 전혀 네버 네버 절대로 기쁘지 않은 나쁘기 그지 없는 소식을
드디어 너의 아비
죄의 소원의 내막을 들추어 내시겠다, 너거 가짜 하나님을 갈아엎으시겠다 라고 말이죠

이것이 드러나지 않는데 어떻게 아들의 소원이 덮쳐지겠냐 말이죠

어떻게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정작 절대로 배신 안하겠습니다 세 번 부인 안하겠습니다 라는 배신이 들추어지지 않는 이상
사탄의 소원
사람의 일이 들추어지 않는 이상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생각할 수가 있겠냐 말이죠

비로소 아들의 소원대로 죄의 소원이 드러난 뒤에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나오는 겁니다.

즉 제가 주님만이 귀한 줄 이제야 알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사랑을) 주님이 주셔서 알았고
주님 만이 귀하고 
이 십자가를 왜 지셔야만 했는지
왜 별세해 주세요 라고 성도들이 외쳤는지 비로소 알았고

저는 하나도 안 귀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를 화목제물로 주신
이 화목제물만 귀합니다 라고

나오는 고백이다 말이죠

그러니 탈탈탈 털려서 더 이상 아무것도 내세울 꺼리가 없게 되니
주님의 십자가가 귀한줄 이제야 알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아신다 라고 
뻔뻔스럽게 싸가지 없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한지 3초도 안 되어서 고백하더라 말이죠

이 단절성이 여호와의 신이 임하여서 외치는 사명자의 고백이다는 겁니다
교회의 고백이다 말이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음부의 권세 한 복판에서 만난 예수님이라는 생명을
죽음 속에서 외치게 되는 고백

너는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라는 새신부로 만드셔서 나오게 하신 고백
새 마음을 부어 넣어서 만드신 고백자 증인삼으심 이다느 겁니다.

곧 피로 사신 교회다 말이죠

그러니 지난 주 이사야 말씀처럼
황무가 난무하고
죽음이 난무하는 그 한 복판에서

너는 나의 구원이다
너는 나의 찬송이다 라고

아니 불 속에서 어떻게 찬송이 나오며
지옥 한 복판 사막 한 복판
황무지 한 복판에서 어떻게 장미 꽃이
사막 한 가운데서 어떻게 샘물이 흘러 흘러 넘치게 되냐 말이죠

말이 안 되잖아요

그런데 믿음이란 이 말도 안되는 것을 하시는 것이 믿음이다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 말고요
인간의 믿음이란 지 믿고픈 것만 믿고 보고픈 것만 보는
골라서 믿는 거지
자기에게 불리한 것은 안 믿을려고 해요
그렇게 인간에게 취사선택 당하는 믿음은 없어요
인간의 종교 신앙은 다 거짓이요 우상숭배이다는 겁니다.

자기가 밉고 버림받지 않으면 믿음이 안 나와요
그 미움과 버림 속에서 나오는 것이
나의 구원아
나의 찬송아 가 되는 겁니다.

어무이께서 지난 주에 아 찬송할지어다 라고 우리 보고 찬송하라는 말이다는 거지?
아니요 어머니 그래 되면 또 누가 찬송 잘 했니 라는 인간의 숙제가 또 나와요
짐승이 또 나온다 말이죠 666

주님이 찬송을 불러 놓고서 내 보고 찬송하라가 아니라 찬송아 라고
이름을 김찬송 최구원 이찬미 박은혜 송찬양 이라고 이름을 붙이더라 말이죠
그 전의 이름은 지나갔다 이제 새로운 이름이다 라고 말이죠
그 전의 이름은 김저주 최심판 이황무 박사막 송슬픔 등등 이였는데
이름을 갈아 엎는 남편이 달라졌다 라는 겁니다.
율법이라는 전남편의 이름을 따라서 지은 이름을
새남편이 새로 나타나서 이름을 갈아서 교체 시켰다 라는 겁니다.
여자의 이름은 남편 이름을 따라가니까 말이죠 창세기의 원리가 그렇거든요

그러니 분명 지옥 저주 밖에 안나왔던 자였는데
베드로가 말이죠
그것이 도리어 천국과 구원을 보여주도록 되어 있는자가 되어뿟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가 구원이가 될려고
찬송이가 될려고 한 적이 없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구원이 되었고 찬송이 되어버렸다 말이죠
찬송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냥 찬송이가 되어버렸어요
기도하라는 말이 아니라 김기도가 이름 자체가 바뀌어 버렸다 말이죠
왜? 하나님이 교체 되어버렸기에
남편이 교체가 되어버렸기에 말이죠

그래서 성령 곧 하나님의 신이 임하게 되면
사명이 졸지에 생겨요

내가 사명감을 가져서 사명감을 펼치는게 아니라
그것은 자본주의의 직업관이구요

일방적으로 뒤짚어 씌우다 보니

뭘 해도 죄 밖에 안 나왔는데
주님이 편파해석으로 인해 뭘 해도 구원 밖에 안나오도록 하셨다 라는 겁니다.

뭘 해도 벙어리 밖에 안 되었는데
주님이 편애로 일방적인 해석으로 뭘 해도 찬송했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믿음이 펼치는 반칙이라고
히브리서 11장에 분명히 성경에 구약에 기록하기를
모세는 바로왕이 두려워서 도망쳤다 라고 했는데
신약에서는 대 놓고서 반칙으로 반대로 기록해요
바로 왕을 두려워 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했다 라고

분명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이 각기 제 길로 갔는데
믿음은 그것을 반대로 기록해 버려요

대놓고서
이율배반적으로
원인 없는 결과로 만들어 버려요
원인 있다
내세울 꺼리가 있다 싶으면
결과가 이렇게 기록이 안되었는데
원인이 없으니
내세울 꺼리가 없으니 결과가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해 버리는 겁니다.

원인을 내세우고팠던 베드로가
원인이 다 날라가 버리고
내세울 꺼리가 하나 없는
창녀 세리가 되니까

천국이 베드로를 편파해석 하는 겁니다.
너는 나의 사랑이야 너는 나의 신부야 라고 말이죠
음부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는 원인이 날라가 버렸는데
분명히 다들 다 봤다 말이죠

다들 다 본 그 상태에서 대 놓고서 편파해석을 하시느 겁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가 되었다고
구원이 되었다고
찬송이 되었다고

베드로 베구원 베찬송이라고
남편 이름 따라 이름을 갈아버렸다 라고 말이죠

비로소 내 숙제가 아닌 주님 숙제를 보게 된 겁니다.
전남편을 갈아 버렸군요 새신랑님

전남편 율법이라는 껍데기만 볼줄 알고 속내용은 하나도 안보고 냅따 버리는
그 선악의 소원, 죄의 소원, 우상의 소원
사탄의 소원
사람의 일 소원을 갈아 엎어서

아들의 소원을 죽은자 어린아이에게 나타내셨고
지혜롭고 슬기로운 똑똑한 자들에게는 숨기시는
이 비밀의 일을 주님이 벌리셨군요 라고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라고 나오도록 만드시는 겁니다.

거봐 너는 나의 찬송이지
구원이가 맞지

라고 말이죠

그래서 주님 혼자
주님의 숙제로써
우리를 철저하게 죄인 만들어서
죄인 되는 것이 중요한게 아니라

죄인을 부르는 하나님을 교체하러 왔다 라는
그 새 일을 다 이루셨다 라고

이 숙제를 보라 라고
가마 솥에 집어넣으시고
이스라엘만큼은 이 이스라엘의 기능을 나타내도록 하시는 겁니다
포로 속에 잡혀가 버린 이상 안 보여주고는 못 배기도록 되어 있으니

이 예수님의 숙제만을 당하는 겁니다.

내가 믿는 
대상물로 상대방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대상물로 삼아서
권세
배후세력을 들추어내시는 미끼로 삼듯이

내가 사명감을 가지는게 아니라
사명감(성령의 소욕)이 나를 대상물로 삼듯이
이제 나 라는 개인이 아닌
교회 라는 예수 안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다루시는 겁니다.

거기에 먼저 조교로 참선지자들이 참예가 되었듯이
이스라엘도
우리도

역사 곧 시공간을 깨뜨리시면서 천국이 쳐들어와서
가짜 천국
가짜 하나님
가짜 너의 남편을 교체하시는 이 십자가라는 약속의 성취 숙제로써

다 이루신
이미 다 이루신 채로

우리는 그 증상물로
결과물로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감사라는 조건이 나에게 맞아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이유 없이 원인 없는 결과로써 감사가 나오는

감사의 증상물이기 때문이거든요

다 이루었는데 감사 안 할게 뭐가 있냐 말이죠
이미 예수님의 숙제는 다 완료 되었기에
그 완료성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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