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허상의 배후세력을 캐내는 미움받을 짖만 골라 한다.

믿음은 보이는 것들을 허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놀라운 요나의 표적(십자가)을 나타내고
인간들은 그 믿음이 없다는 이유로 부재를 감추고자 그 빈자리를 겨우 눈에 보이는 것들로만 그것도 좋다 싶은것들만 모아서 (특히 거룩한 뭐뭐뭐, 교회, 예수, 하나님, 성전, 성령, 거룩하다는 것을 모조리) 쭈물떡 거려서
빈주머니를 채울려는 갈증의 빈그릇만 크게 크게 만들려고만 한다.
거기에 낚인 자들과 낚는 일을 하는 직업인을 종교인이라고 한다.
종교인들의 특징이란 애정결핍증 환자로써 그저 놀아줘 놀아줘 버리지마 버리지마 라고 잃어버림방지대책 위원회모임동아리 인 바벨탑 건립에 평생 세뇌 놀림 당하다가 죽는 자들 아니 이미 죽어 있는 상태만을 확인다가 지옥을 또 누릴 수 밖에 없는 자들이다.

날짜, 보낸사람, 받는사람, 내용


2008-11-23 18:47:04,

계 22:15  성밖에 있는자들은 결국 그리스도의 인격을 갖추지 못한자라고 하는데 이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계 22:15, 개역)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답변 :

갖추라고 숙제를 던줘 줘야 코 끼이는 거죠

나이트? 용어 까먹었네 아무튼 춤 카바레에서
제비족이 자신이 아무 수고도 없이 월척을 낚는 법이 있던가요?
반드시 달음박질하고 수고를 해야 월척이 낚이는 법입니다.

월척만 낚으면 그 다음부터 잡힌 고기 덧밥 주는 법이 없듯이
이미 손아귀에 있는 자들은 더 이상 수고를 더할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때 까지는 열심히 낚아야 하는 겁니다.
열심히 열심히 칼있으마를 작렬하게 화살을 날려야
상대방의 높은 담벼락도 난공불락의 요새도 허물어지는 법이겠지요
때가 때인 만큼 점점점 카바레를 찾는 주부들의 허공 속의 그 외로움도
왠만한 고수의 제비족도 낚을 수 없을 정도로 정보는 이미 공유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다가 아무도 낚을 수 없었던 아무에게도 넘어가지 않던 그 도도한 주부가
드디어 넘어오는 겁니다. 너무 너무 좋아라 라고 외치죠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제비족이 물은 것을 꽃뱀이였던 겁니다.
지금의 교회들의 상황이 서로 물고 뜯고 하는 처지이니 갈때까지 다 간 모습을
너무 고맙게도 자기들이 다 보여주고 있다는 거죠. (바람의 전설, 신화)

소경의 열심을 주님이 괜히 말한게 아니죠 두루두루 돌아다닐 정도로 열성스럽게 만듭니다. 심어 버리지요.

(마 23:15,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질문처럼 그럼 갖추면 인격적이게 되고 예수 안에 있는 성 안의 사람이 될까요?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비유는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여호와 이레는 뭐가 되나요? 준비한게 의미가 없어지는데?예정?)

비유로만 말씀하시고 비유 아닌 것으로는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오로지 묵시적으로만 증거하겠다는 취지로써 표적만 제시하겠다는 겁니다. 표적과 표적으로만 증거 되는 비유이기에 믿음(묵시)에서 믿음(묵시)으로의 증거이지 (즉 완료는 묵시 뿐 준비한 것은 표적 뿐)


족보처럼 잇는 개념은 없습니다. 잇고 잇고 는 없고 가짜이고 (준비한게 의미가 없어지고 예정이 예언이 묵시가 무가치해 지는데? 주님이 흘리기로 한 피 가 주인공인데? )

단절 단절 차단 차단 막힘 막힘 없음 없음 분리 분리 삭제 삭제
빼앗음 빼앗음 실족 실족 지우개 부재 부재 누락 누락으로만(곧 영으로만) 증거하는 겁니다. 왜? 그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들이고

인간들은 보이는 것들로만 증거하기에 실상이 아니라 허상인 거죠.

(마 13:34, 개역)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막 4:34, 개역)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즉 보이지 않는 것을 실상으로 증거하고, 인간들이 포착한 것들을 반드시 허상으로 안개로 만들어 버리는 방식은 믿음-지우개 뿐이다는 겁니다. 족보, 유전은 안 통합니다. )

(요 3:27, 개역)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이 영적인 것을 인간들이 겨우 해석하는 꼬라지들이 바로 잇고 잇고의 방식인 행함입니다.

(딤전 1:4, 개역)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딛 3:9, 개역)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그렇다면 거짓선지자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인간의 가능성을 제시하기에 그것이 역사가 되고 전통이 되고 유전이 되는 족보 형성이요 시스템 갖추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교리가 주님을 위한다고 나서지만 항상 그 교리나 신학 속에 인간의 검은야망이 들어가 있기에 도리어 그 교리가 보호하고 이단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한다고 하지만
정작 남이 아닌 자신네들의 시스템이 더 공격하고 더 망치고 더 난도질하는 셈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한 참 맹위를 떨칠때에는
난세영웅처럼 교리가 하나의 사람들을 뭉쳐주는 효과가 아주 쬐끔은 있을지 몰라도

정작 주님이 자유주의 신학도 이제 공격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온 천하가 개혁주의 판 으로 깔아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 공격 때 보다 더 심하게 다들 절망하고 있는 겁니다.

교회를 아무리 봐도 희망이 없다는 거죠.

그것이 신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교회가 있기에 지상의 교회들은 누락 되어야 하기 때문에 처음의 자리로 되돌려 놓는 성령의 일하심만이 성령의 전을 이루지
즉 성령의 전이란 성령의 단독적인 사역이지
그 사역의 대상이 우리이지
건방지게 우리가 성령의 전을 이룰수가 없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전을 이루겠다고 나서는 자체가
도리어 성령의 전을 늘 허무는 짖만 골라서 하는 셈인 거죠.

겨우 그들이 짖는 전은 성령의 전이 아니라
유전의 전
역사의 전
전통의 전일 뿐이지

그게 뭐가 새롭나요? 하나도 새로운게 없는데 또 새롭다고 세뇌 까지 할 정도이니
정말로 가관입니다.

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고 하니

바로 이 세뇌 작업이

질문 속에 나타난 인격적이다 성밖의 인간이 될래? 성 안의 인간이 될래? 라는
뻔한 사기
뻔한 거짓말에

주님의 능력이 더해서
그 뻔한 거짓말이 먹혀 든다는 것이

저번에 말한대로 신비롭기 까지 하는 겁니다.

하갈이 기도를 너무 너무 잘 들어주시고
가인의 소원도 너무 너무 잘 들어주시는 이유는

(마 13:15, 개역)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벌벌 떨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전에 지옥 보내기로 작정 했는데
혹여나 하늘의 것을 구할까 싶어서 약속의 세계를 구할까 싶어서
장자권을 구할까 싶어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할까 싶어서
무진장 걱정했다고 할 정도이니까 말이죠.

그럼 지금 방금 이렇게 정보가 다 새어 나가 버리면 어떡하냐?

걱정 마세요 썩은 동아줄은 주님이 무진장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쁜짓 안해서 구원받는 그런 종교 꾼의 술수 보다

예수님이 걱정하고 두려워하신 바 대로

어떻게 좋은 놈들 뿐인 그 속에서
남들은 다 인격적인 인간이다 라고 다 속아 넘어갔는데
주님은 절대로 안 넘어가시는
주님 혼자만 안 속는 그 내막을 우리는 궁금해 해야 할 것입니다.

나도 깜빡 속았던 그 훌륭한 인간을
멋들어지게 지옥을 제대로 심어서 보내버리시는 그 사랑을 우리는 실감이 날 정도로
그 속에 낑겨서 봐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서 간음하다가 잡힌 창녀가 되어야 하는 이유가 그런 이유입니다.

자 그럼 시뻘겋게 법의 칼날을 쥐고 있는 놈들을 주변에 쫘악 깔아 놨습니다.

이제 실감나게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나 마땅히 죽어 지옥감이 당연하구나 라고 법 앞에서 자신이 죄인임을 보는 자에게

비로소 그 가망 없음이 명확하게 되었으니까

주님의 희생이 뛰어든다면
그 희생에 다들 탄복할 겁니다.
(솔로몬의 지혜)

그런데 계산을 한 바퀴 더 돌리는 놈들이 있습니다.

주님 그거 안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문란해지고 방종을 허용하게 되는 겁니다.

지나 개나 다 그 희생을 이용만 할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을 더욱더 강화 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이 일하심을 그 자가 몰라서 하는 소리입니다.

그것까지 다 감안해서 나오는 희생이기에
도리어 걸려드는 놈들이 더 작살나는 거죠.

그렇다고 아 방금 그거 나 눈치 챘으니까 희생 안 바라고 성화 되어서 구원받도록 하지 뭐

라고 나와도 소용 없습니다.

청함을 받아서 택함을 받지 못한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한 자들이 더 악랄하게 죄만 지었으니까

차라리 청함을 받지 않는 애굽 속에서 구원을 이루겠다 라고 잔머리 굴려 본들

죄를 오해해서 작냐 적냐가 중요한게 아니라.

마귀와 한 몸이다는 이유로 무조건 작살이고 더 억울한 것은 다시 살려서
지옥 불 속에 청함을 받아도 택함받지 못해서 지옥이나
청함 안 받고 애굽 속에서 멸망 당했으니까 청함 받은 자 보다 죄 덜 지었다고
죄 값이 가감 된다고 착각하는 놈이나
둘 다 지옥의 불 가마는 그런거 안 따지는 줄도 몰라서

그 따위 계산법(선악)을 여전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겁니다.

자 또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고 하니?

죄도 자기의 행위 여부로 죄를 계산하듯이
그 사람 표현 대로 인격 따위나
의로움 따위도
자꾸 인간의 자기의 숙제처럼 가르치고 한다는 자체가

자기도 못하는 일을 남에게 짐 지워서 자기고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하는
마귀의 생각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를 주님이 그래 그래 너거들은 한 몸이니까
당연하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혹 그런 놈들이 천국 갈까봐 철저하게 가려 낸다는 겁니다.
들어가면 안돼 들어가면 절대 안돼 라고 말이죠.

그래서 막고 막고 막는 차단하고 차단하고 차단하는

이 일이 영의 일이다는 겁니다.

행여나 행함으로 천국을 뚫고 들어갈까 싶어서
행함을 지워 버리고 지우고 지우고 지우개로 자꾸 지워 버리는 것이
바로 영의 일이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우짜라는 말이고
천국 갈 가망이 아예 없다는 말과 같네?

그럼 지금까지의 목사들의 말은 다 거짓말이고 기독교의 말은 거짓말이네?

바로 그거죠

네 다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을 따라 다니는 자들이 깜짝 깜짝 놀라는 것이 바로
그럼 누가 구원 얻겠뇨? 라고

예수님이 벌리시는 사건 마다
인간에게서 나오는 말은 이것 뿐입니다.

그럼 누가 구원 얻겠습니까?

즉 이 말은 예수님 말고 예수님 이전의 모든 인간이나
예수님 이후의 모든 인간들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는 증거인 겁니다.

다들 구원이 다들 가능하다고 이것만 하면 이것만 지키면
이것만 행하면 이라고

다들 그렇게만 증거 했는데

유독 예수님의 말은 완전 정반대 라는 겁니다.

더 놀라운 것은 그렇게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발견했던 자들이
방금 그렇게 말해 놓고서도

다시는 예수님을 안 따라갔다 라는 것도
얼마나 놀랍고 기적이고 신비로운지
너무 너무 신비롭습니다.

남들이 못 본 것을 보고도 지옥 가니까요

즉 기적 보여주고 홍해 건너고 하늘의 양식인 만나까지 먹었어도
주님은 그거 소유했고 그거 체험했다고 해서 안 속습니다.

가룟유다는 마귀까지 쫏아내는 권능까지 받았을 정도이니
그거 받았다고 지옥에서 예외가 된다는 성경 말씀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래도 안되고 저래도 안되니까
어차피 못가는 것 이 땅에서만큼은
이 땅에서의 살 만큼은 신랑이 있는 척 하는
믿는 신자의 겉모습을 갖추는 방식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처럼
성화 만을 주장하는 길 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본색을 드러내어야지요
어차피 예정을 싫어하는데

주님이 자기를 편애 한 것이 없으니
사랑 받는 척이라도 연기하면
어 상상임신이 이 땅에서 먹혀 드니까
그것으로 때울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으로 때울려고 해도 안통합니다.
바로 그런 자들에게 미끼처럼 다가오는
약한 모습 미련한 모습 어리석은 모습 싫어버린바 된 모습
고아 과부 나그네의 모습
창녀 세리 강도의 모습
불뱀의 모습
소경 문둥병자 질고를 아는 병자의 모습으로 와서

반드시 법을 쥐었다는 이유로 약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닌
약탈하는 자로 반드시 만들고자 하시는 방식으로

예수님 자신이 친히 표적(속내를 긁어보는) 표적 자체가 되어서
우리에게 시비를 걸어오고 실족 다리 걸어서 넘어뜨리는 방식으로 올때에

예수님을 못 알아봤다는 이유로 무조건 지옥
자신을 감추고 숨기신 비밀의 예수님을 나의 왕이여 라고 입맞추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조건 지옥

숨겨진 모습인데 무슨 수로 아느냐 말이죠.

그러니 다들 그럼 누가 구원 받겠냐 라고 돌아서는 거죠.

그런데 놀랍게도 자기들은 에이 그러면 구리놋뱀 안 쳐다볼래

박수

원래 못 쳐다보게 할려고
일부러
가장 쉬운 지나개나 다 볼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볼 수 없는 방식으로 오신 겁니다.

기적도 마찬가지 비유도 마찬가지
그 당시 비유는 흔하게 널려 있는 이야기를
누구든지 다 아는 이야기를 가지고서
분명히 다 아는 이야기인데 예수님이 말하니까 도저히 무슨 말인지 알수 없는
비밀의 이야기가 되어 버리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자체도 비유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누가 봐도 다 알만한 청년이고 요셉의 아들이고 족보를 조사해 보면 다 아는데
그렇게 평범하고 별다른 것 없이 일반적인 똥 오줌 싸고 배고프면 먹고
방귀 뀌고 트림하는 그 인간이

아무도 하나님인줄을 꿈에도 모를 정도로
가까이 와서 우리를 모조리 다 지옥보낼 지옥을 완성하고 떠났다는 겁니다.

더날때에 그냥 떠나지 않고 누구든지 다 돌을 한번씩 던질 수밖에 없는
그 정도로 나와 너 사이에 별 다름이 일체 없을 정도로
철저하게 은폐된 비밀의 모습으로써 바로 옆에 똑똑히 보고서도
지나개나 다 그 사람을 알았다고 할 정도로 떠들어 대고 장담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가 누구인줄을 모를 정도로 와서 옆에서 먹고 자고 마셨고
우리 일반인들처럼 재수 더럽게 없게 정치적으로 걸려서 개죽음 당한
이거 뭐 광주사태의 길거리 가다가 괜히 시위 데모 학생으로 오인받아서
그냥 한 대 때린 것 뿐인데 맞아 죽어버리는
재수 더럽게 없는 일반인과 별다를바 없는 모습이었고
죽는 모습도 옆에서 같이 죽는 죄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죽었으니

아무 비밀도 아니였는데

예수님 혼자 자기 혼자 비밀이다 라고 우기는 것 뿐이고
다시 살아나셔서(이것도 일방적이지요. 성화론자들 중에 예수님 다시 살아나는데 있어서의 자기들의 성화가 보탬이 될수 있는가에 대해 물어보세요)
그것도 일방적으로 인간들은 하등 준비도 안했고 마음도 추호도 없었는데
불쑥 불쑥 교회를 세우시니

주님 혼자 일방적으로 다 한 일을 마치 인간들이 해왔고 인간들이 그것을 유전처럼 이어 왔다고 우기니

이거 완전히 사기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 쪽에서 준비한 예복이 아닌 이상
자기가 자기를 추슬러서 만들어 낸 복장은
아무 쓸모짝도 없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장가 가야 하고 소도 팔아야 하고 집도 사야 한다는 이유로 아들 잔치 참여 못하겠다는 것에

자꾸 신하들을 보내서 참여하라고 재촉을 하니까 도리어 신하들을 다 죽이니(구약의 참선지자를 죽임)

왕이 화가 나서

그들을 모조리 다 불태워 죽여버립니다.

바로 이것이 아들의 혼인잔치 답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세운 교회에서 이런 이야기 하는 자들은 없죠.
그러니까 가짜죠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아들의 혼인잔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생명나무의 가치만을 드러내는 모습처럼

길거리에 거지들을 다 모아서 (이스라엘이지요 원래 거지들입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죠)

잔치에 참여케 했는데, 억지로 라도 다 참석 시켰는데

이거 뭐 ~ 이런 된장 ~~

앉으라 해서 앉았는데 앉게 해 놓고서는 도리어 쫏아내는 법이 어디있냐 말이죠?

어디 있기는 어디 있어요 여기 있죠

자기들이 만들어서 정성스럽게 입은 그 고운 옷을
다들 부러워 하는 그 성화된 옷(선악옷)을

단지 주님 쪽에서 마련한 예복 그거 안 입는다는 이유로
예복 무시했다고, 좋은 옷을 안 버렸다는 이유로

더더욱 지옥자식처럼 이빨을 갈면서 슬피 울 것이다 라고 이거 뭐 할 말 없을 정도로
넣었다 뺏다 자기 멋대로 한다는 거죠.

청함을 받았는데 택함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광야에서 다 죽임을 당하는
오히려 애굽에서의 재앙으로 차라리 죽었을 뻔 한게 더 좋았더라 라고
반드시 그런 소리 나오도록 하겠다는 것이

바로 아들의 혼인잔치의 하이라이트 라는 겁니다.

즉 아들은 빛으로써 그 빛 다움을

어두움을 마귀와의 한 몸 된자를 기여이 빼내는데 있어서의 탁월성을
잔치집에 온 자들에게 자신의 특기를 자랑하는
그 하이라이트 절정을 일부러 그때 보여줄려고
가장 마귀와 한 몸인 자를 끝까지 남겨 두시었다가

자신의 영광을 극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유감없이 어두움이 추풍낙엽으로 떨어졌을 때

다들 박수 박수 우와 대단해요 라고 칭송을 아니 할 수 없도록
감동 감동 감동을 주더라 라는 거죠

그것 때문에 마귀는 때가 찰 때 까지 자기 멋대로 등장 못합니다.
감독이 큐 해야만 자기 차례가 되었을 때에만 나오는 겁니다.

누구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예수님

자 그렇게 해야
예수님만이 준비한 예복 곧 그리스도의 옷이 생명나무의 옷이 중요하지

인간들이 자기들이 아무리 거룩하게 지은 옷으로 성화의 옷을 갖추어도
혼인 잔치집에서 하늘나라에서
예수님이 직접 준비한 옷을 입지 않는 이상은
자기 옷을 고집한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직접 지은 피옷을 거부하는 이유로
지옥에서 더 슬피 울도록 만드시고야 말겠다는 겁니다.

인간은 이것도 무시 합니다. 자신은 지옥에서 암담하게 자신의 죄를 수용하면서 지내면 되지
그렇게 서럽게 울지 않겠다 라고 우기겠지만

정작 주님이 창조한 피조물인 이상 반드시 그렇게 서럽게 슬피 슬피 울도록
억울하다고 한맺힌 듯이 가슴을 치면서
저렇게 지옥에서 회개 잘 할 줄이야 라고
지옥에 간 사람들이 다 부러워 할 정도로 회개 잘 하는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겁니다.

지옥에서 회개 해 본들 무슨 소용 있나요 ㅋㅋㅋ

이미 완료 인데

바로 이 완료를 지금 누리는 자는 나그네 이고

이 완료를 무시하고 지키겠다 라고 법으로써 자기를 사수하는 자는
이 땅에 속한 자들이기에 심판도 구원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킬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나그네(본향이 하늘에 있는 자는)
미리 이 땅이 당할 심판을 미리 앞당겨 보여주고
또 이 땅이 줄 수 없는 안식을 미리 앞당겨 맛 봄으로써

이 양쪽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자유롭게 천국을 지금 생활 하지만

마귀 자식은 그것마저도 흉내를 반드시 내어야 하기에
누리는 척 하는 연기를 해야만 하는 지켜야만 하는
그래야 10점 만점에 10점 이라는 법을 달성하기 위해
지금도 쉼없이 달음박질을 해야만 하는 겁니다.

만약에 안 하면 거짓선지자를 보내어서 라고
반드시 그 꾀임에 빠지도록 해서
쉼 없게 만드시고야 마는 겁니다.

지금 지옥을 누려야
지옥에 가서도 또 누리도록
지금 때려서 아픈 그 곳에
지옥 가서 또 때려서 아프게 만들겠다는 겁니다.

결국 인간의 행함도 자기 노동의 댓가를 탐내기 때문이지
행함의 댓가도 바라지 않는 행함이란
무조건 적인 행함이란 인간에게 없다 라는 것을
성경이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기여이 하겠다고 하는 것 자체가

무조건적인 행함이신 예수님의 행함을 무시하기 때문에
유일한 이웃인 예수님의 선한 행동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예복)

기여이 자기 육체가 만들어낸 행함 그것도 무조건적인 무 댓가의 행동을 기여이 하겠다는 자체가

예수님의 행함을 쳐다보기 싫어서 오는 겁니다.

그러니 용어를 온 갖 좋은 종교적인 용어 거룩한 용어 다 때려부어서 겨우 겨우 힘들게 쉼없이 꼬셔 놓아도
그것도 불안해서 이중 삼중으로 자기 교인 도망칠까봐
평생을 그 일에 붙잡힌바 되도록

교회 자체가 선악나무처럼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러운
교인 자체가
자신들의 직분 자체가

또 자기가 취사선택한 예수도 선악나무처럼 으로만 눈에 가득차게 만드는 겁니다.

놀랍게도 바리새인들이 유대인들이 또 구약의 이스라엘이 거짓선지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하나님 여호와란

결국 선악나무였던 겁니다.

지금 저 질문 속의 계시록 인용한 취지도 여전히 선악적인 겁니다.
말씀 자체도 선악으로만 밖에 해석을 못하니까요 그게 또 전부이고

그래서 임마누엘로 오시는 겁니다.
바로 그런 하나님을 반드시 박살내는 다른 하나님의 모습으로
무조건 너의 하나님과 나의 하나님은 다르다 라는 그 차이를 명확하게 선을 구분짖는
그 구분짖는 것을 거룩이라고 하는데 영이라고 하는데
이 영에
영 자체가 독점권을 가지고 있기에
영이 할 일을 감히 인간이 할 수 없도록 하는 겁니다.

말세에 부어 주는 영이란
결국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을 부어준다는 겁니다.

상대방 하나님을 이유 없이 무조건 가짜 라고 자기의 하나님과 싸움 붙이는 일

이것이 바로 임마누엘 평화 라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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