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완료)가 창조한 새피조물 롯 : 남은 자

법을 쥔 인간은 완료(미래)를 반드시 미완료(행함)로 다시 재조립(창조거부)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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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18:56:23,

롯이 씨가 없다는것과( 주님이 받을만한  씨가 없다는것))천사가 산으로 가라고 했을때 소알로 간것과 거기에서 나와 굴로 가서 자기 딸들로 인해 모압과 암몬을 낳았다는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걸까요

굴은 짐승이 사는곳이기에 롯과 연결지어 생각하거든요


답변 :

롯과 씨를 자꾸 언급을 하는데 솔직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습니다.
롯이 씨가 없다뇨? 거룩한 씨가 없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누가 거룩한 씨가 있는 자 입니까?

아무도 없는 판국인데

도리어 믿음의 조상이라는 아브라함 조차도 거룩한 씨가 없습니다.
자신이 백날 생산해 놓은 것은 겨우 이스마엘 뿐입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관여한 입장에 전혀 못된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이 직접 낳은 자식입니다.

마치 성령으로 인한 마리아 잉태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이삭이 거룩한 짖만 하느냐?

아닙니다.

저번에도 말했듯이 반드시 성도란 약속의 증인이지
자기의 믿음의 증인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도 모세도 야곱도 항상 그 마지막의 유언은
두 패로 확정짖는 유언을 하고 있지

잘 믿는 자를 양성하는 종교꾼의 트릭을 증거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언약과 비언약 또는 두 나무의 상황 또는 두 족보 세계(가인족보, 아벨족보)의 빛과 어두움의 세계가 약속의 이미 완료됨을 드러내기 위해서 두 구도로 나누고 있지

성화론자들처럼 미리 거룩한 씨를 따로 빼돌리는 방식은 아닙니다.

롯은 거룩한 씨를 낳아야 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는 그 점을 놓치지 않습니다.

롯이야 말로 죄인된 원수 됨과 그 죄인을 용서한 구원자 와의 관계성을 말하는데 있어서
가장 적격한 인물인데
문제는 선악의 법을 쥔 인간들이 껄끄러워 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 껄끄러워 하는 점을 부각 시키는 것이 영의 일이고
반대로 육의 일 장로의 유전 사람의 일은 바로 그것을 인간들이 먹음직 보암직 지혜롭게 탐스럽게 하는 우상적인 의미로 교체시키는데 있어서 반드시 육의 일을 유발케 한다는 점이

바로 약속이 벌리는 상황인 겁니다.
약속이 주체가 될 일을

인간이 자기의 숙제로 보니까
좋은 것은 삼키고 하루살이는 버리는 식으로 나오는 겁니다.
그 트릭과 처세가 바로 성화론자들의 주특기입니다.

주님이 받을 만한 씨가 안된다는 것은 롯에게서는 조건이 나올수 없다 라는
절대로 절대로 네버 네버 롯이 성도라면 이빨을 갈겠다는 취지와 같고
또 그런 롯과 같은 교인이 자기들 교회에 출석 한다면 그들은 당장 짤라내겠다는 취지와 같은 거죠.

그러니 바리새인이지요. 겉 희고 속 검은 속내가
롯이 아니면 밝혀 낼 수 없지요.

이유 없이 롯이 미운 이유는 반대로 롯 보다 더 나은 의로움이 자기에게 있다고 보는 이유죠

바리새인이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것에 하나님 너무 너무 감사합니다 라는 취지죠

그럼 롯은 그렇다 칩시다.

세리는 창녀는 강도는 주님이 받을 만한 씨가 되기는 할까요?

이 말은 결국 인간을 사기치는데 있어서
주님은 받는 분인데 거룩한 씨 곧 거룩한 열매를 받는다는 취지인데
그게 바로 성화론자들의 전형적인 사기죠

주님은 받는 분이 아니라 주시는 분입니다.
인간이 거룩하다 라고 바치는 것 그거 다 똥덩어리입니다.

도저히 봐 줄 수가 없을 정도로 악취 나는 것들을
자기들은 똥덩어리 쳐 바르고서는 거룩하고 성화 되었다고 우기니까 미친놈들이지요

이것이 실지로 성경에 나옵니다.

어 이사야 6장이 아니네 그 근처 인데

아 거룩한 씨 라고 하길래 뭔가 했더니
(사 6:13)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그루터기 곧 남은자 이군요
즉 롯은 남은자가 될 수 없다는 말이네요

여기도 나오네요
(사 1:9)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조금 남겨 두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 같고 고모라 같았었으리로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들은 남은자 그루터기 이고
만약 남은자로써 롯을 그루터기 가 되면 자기들은 롯과는 그루터기가 함께 같이 되기 싫다는 식이군요

이게 바로 바리새인 아니고 뭡니까?

아무튼 찾을려는 구절은

(사 1: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사 1: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사 1: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사 1: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사 1: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귀를 막고 눈을 가리우고 고개를 돌리고 다시는 보기 싫을 정도로 너희들의 몰골이 더럽기가 짝이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은 가장 거룩한 모습을 갖추고서 성전에 왔는데
도리어 주님은 반대로 보시는 겁니다.

피가 가득한 이유는 주의 전을 사모해서 반드시 거룩한 성전을 세우기 위해서 세운 전이
알고보니 더러운 손이다는 겁니다. 피가 가득한 손이다는 겁니다.

단순히 다윗이 사람을 많이 죽여서 피가 가득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과거가 아닌
미래에 거룩한 사수하고 붙잡겠다는 이유로 도리어
거룩을 허물고 죽이는 손에 피를 묻히는 법을 쥐겠다는 그 취지가 바로
손에 피가 가득하다 라는 뜻입니다.

자 그럼 이사야 1장 초반부터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과거를 근거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의 미래가 너희 손에 피가 가득하게 만들겠다는 취지입니다.

즉 이사야 본인 뿐만 아니라
모든 참 선지자를 남이 아닌 거룩한 백성이다는 이스라엘의 손에 피를 묻히도록 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이 미래를 강력하게 부인하던 그들이 결국은 모든 참선지자를 다 죽이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서는 예수님 또한 너무 너무 심하게 몰아붙입니다.

과거도 아닌 미래를 덮쳐버리게 하는 겁니다.

너희는 나를 죽일 것이다. 왜냐?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 까지 이 세대가 감당해야 하기에 그 정도로 너희들은 악함 그 자체 이다 라고 퍼부어 버립니다.

뭔가를 잘못했다는 그 원인이 생기고 그 원인에 따른 결과 로써의 심판을 내린다면 누구든지 수긍이 가겠지만
그 반대입니다.

원인도 없는데 결과를 통보 합니다.

마치 가인에게 덮치는 죄의 소원처럼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 제사장의 피를 너희들이 감당해 볼테면 감당해 보시지?
너희들은 나를 죽이고야 말걸?

라고 나와 버리면 이것은 대화 자체를 아예 단절하고 차단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살인도 아니했는데 반드시 너의 손에 죽으러 왔다 라고
창세전에 계획된 일이야 라고 예언하듯이 말해 버리면

누구든지 움츠려 들고 자기방어로써 나올 수밖에 없고
난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 라고 나온다는 겁니다.

이것은 베드로 에게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모조리 다 가두겠다 라는 겁니다.

어디에?

약속에 (창 3:15)

그래서 모세 노아 야곱 의 유언 곧 예언들은
모조리 다 약속을 드러내기 위해
약속에 가두겠다는 겁니다.
어떤 누구도 약속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인간들은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긍휼의 그릇도
진노의 그릇도
토기장이에게 의해서 나타나지

자신들의 달음박질 함으로써 독자적인 세계를 꿈꿀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그 일을 피하고 피하고 피하고파도
결국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자기들 손에 피를 묻히고야 마는 겁니다.

율법도 모든 인간들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함이었듯이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든 인간들을 약속성취됨에 가두기 위함입니다.

이제 긍휼의 그릇이든 진노의 그릇이든
예수님 마음대로 인데

이 예수님 뜻대로를 자기들 뜻대로 하고픈 자들이 바리새인 이었듯이
오늘날도 반드시 그런 놈들이 존재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그것도 바리새인처럼 가장 거룩한 것들만 끌어 모아서 자기들 멋대로 추구하도록 하지요
그렇다면 영의 일은 반드시 그 인간의 유전에 또 다시 더 나은, 더 좋은, 뭐뭐 보다 더 라는 식으로 나오면 인간들의 공로를 반드시 무색케 만드는 영의 일로써
비로소 육은 영의 소욕에 대한 지독한 미움의 본색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런 취지로 손에 피가 가득하도록 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과거의 잘못이 아니라 말이죠.
도리어 과거가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과거를 결정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롯의 미래가 (의가 덮쳐진 긍휼의 그릇)
롯의 과거를 결정하는데

아무도 못 믿도록 한다는 취지로써 롯의 과거를 형성케 하는 겁니다.

전혀 의롭지 못한 모습으로 말이죠.

사실은 다윗도 모세도 바울도 베드로도 모조리 다 똑같습니다.

그런데 성화론자들이 거룩이 목적이 아니라
(거룩이 미래로써 덮친적이 없기에)


거룩이라는 브랜드는 차용하면서 반드시 다윗을 모세를 바울을 베드로를 인용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겁니다.

바리새인은 돈을 사랑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미래로써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뒤짚어 씌우듯이 돈을 사랑한다고 해석해 버립니다.

성화론자들이 이 글을 보면 볼수록 더더욱 돈 사랑 안하기를 하나의 덕목으로 더 추가하겠죠

과거도 그래왔고 현재도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런데 미래에서 덮쳐지는 돈 사랑이란
바리새인이 아무리 거부해도 소용없는 겁니다.

왜냐? 해석의 방향과 관점이 예수님(미래)에게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기 쪽에서 겨우 할 수 있는 방법은 사람들에게만 그렇게 안 비쳐지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은 어차피 혼자이고 눈에 보이지도 않기에
눈치 볼 필요가 없고
오로지 사람들의 눈치만 보면 돈 사랑함이 영원히 들키지 않도록 하면 되는 겁니다.

그런데 몰라서 그렇지
이미 명령어 법이 선포된 이상은
행동의 여부로써 가려지는 것이 아니라.
명령어 자체인 말씀 자체가
돈 사랑하는 인간으로 창조한다는 것을 그들은 꿈에도 모르는 겁니다.

결국 바리새인이 돈을 사랑해서 돈 사랑하는게 아니라.
예수님이 지금 현재의 창조주(미래결정자)로써
바리새인을 새롭게 창조해 버린다는 겁니다.

어떤 새로움? 자기가 돈을 사랑하는 인간으로 창조 되었다는 자체를 꿈에도 모를 정도로 새로운 왜? 전혀 관여할 수가 없기에?
왜 저를 그렇게 만드십니까? 라고 토기장이에게 힐문할 수 없는 입장이기에 말이죠.

자 그렇다면 롯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서
롯이라는 의로운 롯이라는 긍휼의 그릇의 창조물이 반드시 못 마땅하게 여기도록 하겠다는 취지로서

롯이라는 자가 창조된다는 자체가

창조성에 거부감을 유발케 하는 겁니다.

모든 성경 자체가 불공평처럼 나오듯이 말이죠.

그렇다면 자기들은 공평하다 라는 것을 내세우는 명분을 갖추게 되는데
그 명분이 얼마나 더 거짓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일부러 그들이 생각하는 악의 자리에 의를 둡니다.

최근에 다룬 예수님이 바알세불 걸린 마귀의 대 마왕의 자리에 두도록
반드시 바리새인의 해석을 새롭게 창조해서 심어버리는 겁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예수님을 달리 볼 수 없는 겁니다.
무조건 악마입니다.

이것은 인자의 모습이 불뱀의 모습으로 오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 인자의 그 담보물처럼
그 아버지의 그 자식처럼
롯 또한 인간의 해석에서 아무리 봐도 불뱀의 모습 외에는 달리 해석할 길이 없도록 하는 겁니다.

롯만 그렇냐 수십번 누차 강조하지만
롯은 1급 살인자는 아니죠 모세 다윗 바울은 1급 살인자죠
바울은 더 심합니다. 스데반을 죽인 주동자입니다.
그런데도 얼마나 뻔뻔한지?

그래놓고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저주를 받을 지라 라고 말한다는 자체가
모순되도록 남이 아닌 바울 자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죽여놓고 그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철저한 모순점이 있어야
선악의 법을 쥔 자들이 반드시 다 걸려서 넘어뜨리게 해서
모든 접근을 차단하는 방식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누구든지 바리새인 보다 낫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 못 들어온다고
거룩한 자를 바리케이트를 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악마들을 가장 율법의 최고수로써 이 보다 더 잘 지킨자 없다 라고 치켜세우고서는
바리케이트를 치는 겁니다.

접근 불가

이런 모순과 불공평함이 어디있나요?

그런데 놀라운 점은 그 바리케이트를 넘는 놈들이 이 세대에 등장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성화론자들의 등장은 자기들의 믿음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직접 세우는 바리케이트입니다. 성화론자들이 바리새인 보다 더 잘 지키는 자들로써 이 세대에 바리케이트 쳐져 있어야

주님은 넘을 필요도 없는 그 바리케이트를 아예 처음부터 넘지 못하도록 쓸데없는 것에 정신 팔리지 않도록 하시는 겁니다.

명령어 지킬 생각 말고
주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만 남기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아예 명령 자체를 처음부터 불가능한 높은 담벽의 바리케이트로 쳐야만
괜히 넘고픈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얼마나 세심한 배려인줄 모르는 자는
또 그 불가능성을 넘고자 하는 선을 넘고픈 유혹에 빠지는 겁니다.

그래서 약속은 소돔이라는 에덴동산 흉내를 낸 그리고 바벨탑의 잔상을 약속은 그냥 넘기는 법이 없기에
아무 상관도 없는 자를 심습니다.
롯입니다.
그리고 그 롯을 건드렸다는 이유로 박살을 냅니다.
즉 롯의 행위를 지금 따질게 아니라?
롯을 누가 심었느냐 그리고 그 취지는 뭐냐 하는 겁니다.
소돔의 멸망을 위해 롯을 심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롯은 왜 망하지 않았는가?

어떤 이유도 찾을 수 없도록 한 거죠

그러니 저런 엉터리 해석을 하는 거죠

도저히 알 수가 없기에 겨우 분석할 줄 아는 수준이 바로 롯의 행동을 분석 하는 겁니다.
주님이 왜 저런 롯을 창조했는가에 대해서는
즉 주님의 일은 볼 생각이 없고

롯의 행동을 방제 시켜야만 자기들의 손으로 지은 교회가 저런 자들이 출입못하도록 통제하는 겁니다.
사실은 그 목사 자체가 출입통제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서 알리바이를 형성 하는 거죠
롯과 같은 자들을 출입통제케 함으로써 반대로 롯과 전혀 반대인 깨끗한 일만 골라서 하는 자들만 교회에 채움으로 인해서 거룩을 유지 보수 보존 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악마의 생각임을 미래에서 심어버리는 식이니

이것은 도저히 이런 영의 일을 육체가 해석하기에는 바알세불 걸렸다 라고 달리 해석할 길이 없도록 하는 거죠.

마치 노아가 방주 안에서 법적으로 따져서 방주에 넣은 것이 아닌데
어떤 거룩한 행동 때문에 방주로 인한 노아 홍수심판에서 구원 받은게 아닌데
아무 이유 없이 조건 없이 용서한 그 용서를
법적으로 해석하는 함과 같은 자들을 철저하게 응징하겠다는 취지로써
더 심하게 법을 퍼붓는 식이다는 겁니다.

이것 또한 일만 달란트 탕감하는 임금 의 비유와도 같습니다.

노아의 아들 함은 본인이 무엇 때문에 구원 받은줄 모르기에
주님은 모르는 자를 가려내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 법을 쥔 놈을 가려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의 구도를 노아의 유언 속에 집어 넣지요
미래의 일들입니다.

앞으로 함과 가나안은 약속의 자녀들의 전쟁 대상이 된다는 겁니다.
그리고 셈 야벳은 이 악마의 세계에서 음부의 권세르 이기는 약속의 일에 동원되는 자로써 말이죠.

그러니까 원수의 성문을 여는 일에 우리는 이유 없이 투입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거꾸로 함과 가나안처럼 원수의 성문을 여는데 관심 없는 인간들은
그저 법을 쥐고서 자기의 이미지 관리에 정신팔려 있는 겁니다.

지옥의 문을 여는 자는 죽음의 권세를 여는 자는 약속의 자녀 뿐이고
그 약속의 구조 안에 두기 위해서
믿음의 사람들의 예언과 증거는 지극히 과거 현재에서 해석 불가인
오로지 미래의 완료로써 선포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롯 또한 미래의 완료로써 해석이 안되는 성화론 인간들은

롯을 마치 노아가 술먹고 뻗어서 팬티 한 장 안 걸치는 그야말로 저게 저게 무슨 의인이고 아이고 웃끼네 라고 반드시 형들에게 우습다고 말할 수 밖에 없도록 법의 증인이 되도록 하고 선악과나무의 증인이 되게 하고

반대로 형들은 똑같은 노아의 모습을 보고도 뒷걸음질 해서 아버지의 벗음을 가리우는
이 미래적인 모습(십자가의 용서)을 보임으로써

노아는 뻔뻔스럽게 눈 뜨자 마자 마치 다 본 듯이
유언을 뻔뻔스럽게 외치는 겁니다.

함과 그의 열매인 가나안을 약속이 벌리는 전쟁 대상인 뱀의 후손에 두고서 머리가 잘려야 할 판국에 놓이게 하고
반대로 셈과 야벳은 이 뱀의 머리를 치는 여자의 후손이 누구인가를 보여주는 생명나무는 나 아니요 주님입니다 라고 증거해야만 하는 생명나무의 증인으로

두 구도로 예언을 하는 겁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 까지 그리고 오늘날 성도에게 까지 그래도 적용이 됩니다.

과거의 언약이라서?
천만의 말씀

미래에서 덮친 언약이기에 과거와 전혀 상관이 없는 겁니다.

원인은 미래고 과거는 결과이니까
거꾸로 소급해서 보니까
노아의 언약 자체가 바로 십자가를 증거하기 위함이고
십자가를 무시하는 인간들과
십자가만을 쳐다보는 자들과 두 부류로 나누어 졌다는 그 결과로써
노아언약을 보게 되는 거죠.

결국 십자가의 용서가 덮치지 않는 이상
노아 언약 자체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도록 하는 겁니다.

심지어 방주를 교회로 해석하는 그 자체가
미래(완료)가 덮친 해석이 아니라
방주가 교회이니까 방주에 모이기를 힘써서 교회를 잘 운영하자 라고
저절로 돈 사랑과 연결 되도록 하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자동적으로 방주가 일종의 협박 공갈용으로 명분을 갖추게 되는 거죠

바벨탑이 괜히 역청과 벽돌로 세워진게 아닙니다.
그 당시의 최고의 기술입니다. 그 당시의 사상이요 인간 기술입니다.
그 사상의 생각 조차도 주님이 깔아 놓은 겁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손으로 세워지는 교회는
그 당시의 최고의 인간 신학과 인간 종교기술의 집약인 교리와
그 당시의 최고의 인간 테크닉으로 결정된 겁니다.

오늘날은 성화론이지요 뭐

물론 그 다음에는 성화론 보다 더 나은 것들이 나타나면 또 갈아타겠지요
성화론 자체가 처세술인데요 뭘!, 트릭, 정치술, 다수를 의식해서 나온 사상인데

자 그럼 결론적으로 예수님이 인간의 손으로 지은 교회와 일부러 차이성으로써 증거하는 이유는

인간이란 자기 손으로 세우고픈 성전에서 반드시 옛언약의 속성이 고스란히 다 담겨지도록 하겠다는 취지입니다.

(행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행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행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행 17: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롯을 주님의 창조물로 여기지 않겠다는 것은
자기들의 창조물을 따로 설정하겠다는 취지가 바로 사람의 손으로 성전을 짖겠다는 발상이요
마치 하나님을 없는 듯이 하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이상하죠? 성전을 짖는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없는 듯이 하겠다는 취지 라니?

그래서 구약을 모르면 그 내막을 모르는 겁니다.
물론 십자가로 인해서 구약을 새롭게 보면

아 왜 십자가를 거부하는 발상이 바벨탑이 세워지고 그것이 성전과 연결이 되는지를
구약의 내막을 다 살펴봐야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세대의 교회도 구약과 같은 양상으로써 봐야겠죠

똑같이 롯을 해석하는 그 취지도 그런 의미로써 다 파악해 보면
결국 롯을 용서한 그 용서에 못 마땅하다는 취지입니다.

12시간 일해 만땅을 채워도 9시간 일해도 6시간 일해도 3시간 일해도 심지어 딸랑 1시간 일해도 똑같은 수당을 준다면 그야말로 불공평 한 거죠.

(마 20:1) 『천국은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으니』
생략
(마 20:12)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저희를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와 같게 하였나이다』
(마 20:13) 『주인이 그 중의 한 사람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마 20:14)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마 20:15)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마 20: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즉 법을 쥔 인간, 다시말해서 구원을 조건적인 법적으로 선악적으로 갖추겠다는
이유있음으로 갖출려는 인간 끝까지 추적해서 반드시 법에 걸려 넘어뜨리겠다는 취지인 겁니다.

노아의 언약의 양상이 마 20장의 천국 비유에서도 동일하게 증거 됩니다.
즉 영의 일이기에 과거의 역사가 아니라
도리어 미래의 묵시로써 완료로써 도리어 노아언약이 구체화 되는 것이지
노아 언약이라는 과거를 지금 예수님이 같다 붙인게 아닙니다.
도리어 이 천국 비유를 말하기 위해서 과거의 노아언약이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옛언약 마저도 새언약이 아니면 해석할 길이 없는 거죠

아브라함은 그래서 아예 미래(완료)를 쳐다본 겁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결국 자기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조건 미완료일 뿐이고 아예 미래인 완료를 쳐다보고 기뻐했는데 이것을 믿음이라고 합니다. 자기 믿음이 아니라 예수님의 믿음을 보고 도리어 자기 믿음을 무가치 하게 보는 자기부인인 거죠. 자기부인을 또 자기가 지키는게 아니라.
미래의 완료를 보니 미래가 자기부인케 하는 겁니다.

여기에 또 롯도 아브라함과 동일한 자로써 동일하게 미래가 덮쳤습니다.
아브라함이 롯 보다 더 나은 점 일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있다고 하는 놈 그 놈들은
반드시 자기들의 구원도 뭔가 조건을 갖추었다고
법을 쥔 듯이 말하게 될 겁니다.

이게 너무 너무 중요한 의미이기에 길게 답을 하는 겁니다.

비유 하나가 더 있는데 생각이 안 나네요
천국 비유 다 그런 식입니다.
미래에서 해석이 완료된채로 덮치는 식이지
역사나 시간적인 순서로써 해석 되는 비유란 없습니다.

아 생각 났다

탕자 비유 (용서를 말하기 위해서 반드시 맏아들의 법적 사고방식이 왜 지옥인가를 동시에 두 나무의 상황으로써 양쪽 다 증거하는 비유임)

탕자를 통해서 반드시 맏아들의 법적인 사고방식을 대조 시키는 겁니다.

그래서 반드시 법적인 생각은 아예 이 땅에서 천국 못가는 차단성을 보여주는 겁니다.

아니 법을 쥐었다는 자체가 이미 지옥을 끌어안고 사는 결과죠
자기도 연자맷돌 씌운 무거운 짐을 지고
남까지 연자맷돌 씌워 무거운 짐 지우고 물에 빠뜨려 죽이는
이 철저한 돈 사랑 자기사랑에 빠지도록 지옥에 빠져있는 결과를 보여주는 겁니다.

자기도 안 들어가고 남도 못들어가게 하는
마이다스의 손을 일부러 깔아 놓는 겁니다.

(롬 9:13)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남은자란 결국 주님의 숙제입니다.


( * 하나 빠뜨린 것이 있네요 사실상 위에서 다 언급했지만 말이죠

천사를 통해서 모압 암몬 자손을 퍼트리는 계기가 되는 원리는

그것 마저도 약속의 구도 속에 넣기 위해서
롯은 비언약적인 자손을 퍼트리는 역할을 해야 하는 겁니다.

사실상 당한거죠? 문제는 다들 왜 당했냐 라고 따지지요

그럼 넌 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냐? 라고 되물어 보세요

그것은 답 안하고
딴소리 합니다.

평상시 행실이 나빳기에 그렇게 당하지 않느냐 라고 자꾸 쓸데 없는 법적인 변명을 하는 겁니다.

바로 그 변명을 유발케 하는 멋들어진 걸림돌로써 롯은 반드시 약속의 세계에 못 들어오도록 눈과 귀를 막게 하는 영의 일에 동원되는 겁니다.

주님이 두려움과 떨림으로써 롯이라는 멋들어진 걸림돌을 창조했는데

(빌 2: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마 13: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 함이라 하였느니라』

(요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행 28:27)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왜 인간들은 특히 종교테크닉 기술 라이센스를 가진 성화론자들은 이 걸림돌을 빼낼려고 할까요?

불안해서 그런 겁니다.

사랑이 없기에 두려운 겁니다.

죽기를 무서워 떠는 자들에게 법 없이 다가가니까 도리어 법으로만 더더욱 자신의 온 몸을 감싸는 방어막 요새를 쌓는 생각을 새로 심어버리시는 겁니다.

결국 남은자를 인간의 숙제로 어떻게 이루는 가를 보시면 됩니다. 남은자 마저도 법으로 행함으로 이룰려는 인간과 예수님과의 차이성을 보는 좋은 기회가 될 겁니다.

동굴을 그렇게 억지로 갇다 붙이는 것 보다
얼마나 이 땅의 소돔성 됨을 완벽하게 심판했으면 집이 없을 정도였을까?
완벽하게 돌 위에 돌을 세운 것들이 그 근처에 없을 정도로 제대로 싹쓸히 했을까?

마치 노아 홍수처럼 말이죠 얼마나 제대로 싹쓸이 했으면
포도 농사가 너무 너무 잘되었을까?(땅을 제대로 뒤짚었기에)
너무 너무 잘 되어서 그대로 뻗었을까? 자유 자유
얼마나 단절과 차단
속시원하게 더러운 죄를 제대로 씻었으면
무지개가 나타날 정도로 정말 멋들어지게 일했으면
법이 없어도 될 정도로
더 이상 가리울 무화과 옷이 필요 없을 정도로, 홀라당 다 벗고

무지개 옷 만을 하늘에서 덮어 줄 정도로 예복을 준비했건만
무지개 옷을 입었건만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건만

예복을 아무리 봐도 자기 옷만 사수하기에 못볼 수밖에 없고

또 무지개 옷을 노아가 제대로 입었기에
무시를 선악을 쥔 함과 가나안이 제대로 무시 할까? 들을 귀가 없기에

법과 사랑의 철저한 대립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결국 그 목사와 성화론자들도 함과 가나안이 본 법을 쥔 시각으로 똑같이 보기 때문에
보기는 보아도 알 수 없고 듣기는 들어도 알수 없는 들을 귀가 없는 상태로 창조 되었기에 완료 되었기에
당연히 알 수가 없는 겁니다. 죄의 소원이 덮친 그 값어치를 톡톡히 해야만 하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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