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 모세의 날, 이스라엘을 바다에서 건지신 자가 어디 계시뇨 (사 63, 7-14).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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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1 모세의 날, 이스라엘을 바다에서 건지신 자가 어디 계시뇨? (사 63, 7-14)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냐? (사 63, 1- 6)
이사야 2017 2020. 11. 1. 08:45
18-110 어찌하여 네 옷이 붉으냐? (사 63, 1- 6)

(이사야 63: 7-14, 구약성경 1043 쪽, 찬송가 46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7,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자비와 그 찬송을 말하며 그 긍휼을 따라, 그 많은 자비를 따라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큰 은총을 말하리라』
8,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들은 실로 나의 백성이요 거짓을 행치 아니하는 자녀라 하시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사』
9, 『그들의 모든 환난에 동참하사 자기 앞의 사자로 그들을 구원하시며 그 사랑과 그 긍휼로 그들을 구속하시고 옛적 모든 날에 그들을 드시며 안으셨으나』
10, 『그들이 반역하여 주의 성신을 근심케 하였으므로 그가 돌이켜 그들의 대적이 되사 친히 그들을 치셨더니』
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12, 『그 영광의 팔을 모세의 오른손과 함께 하시며 그 이름을 영영케 하려 하사 그들 앞에서 물로 갈라지게 하시고』
13, 『그들을 깊음으로 인도하시되 말이 광야에 행함과 같이 넘어지지 않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14, 『여호와의 신이 그들로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같이 편히 쉬게 하셨도다 주께서 이같이 주의 백성을 인도하사 이름을 영화롭게 하셨나이다 하였느니라』

(사 63:7, 새번역) 『나는 주님께서 베풀어 주신 변함없는 사랑을 말하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여 주신 일로 주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베푸신 은혜, 그의 긍휼과 그의 풍성한 자비를 따라서 이스라엘 집에 베푸신 크신 은총을 내가 전하렵니다.』
(사 63:8, 새번역) 『주님께서 이르시기를 "그들은 나의 백성이며, 그들은 나를 속이지 않는 자녀들이다"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의 구원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사 63:9, 새번역)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난을 받을 때에 주님께서도 친히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셔서 그들을 구하게 하시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사랑과 긍휼로 그들을 구하여 주시고, 옛적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치켜들고 안아 주셨습니다.』
(사 63:10, 새번역) 『그러나 그들은 반역하고, 그의 거룩하신 영을 근심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도리어 그들의 대적이 되셔서, 친히 그들과 싸우셨습니다.』
(사 63:11, 새번역) 『그들은, 지난날 곧 주님의 종 모세의 날을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그의 백성 곧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로부터 올라오게 하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에게 그의 거룩한 영을 넣어 주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사 63:12, 새번역) 『그의 영광스러운 팔로, 모세를 시켜서, 오른손으로 그들을 이끌게 하시며, 그들 앞에서 물을 갈라지게 하셔서, 그의 이름을 영원히 빛나게 하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사 63:13, 새번역) 『말이 광야에서 달리듯이, 그들을 깊은 바다로 걸어가게 하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사 63:14, 새번역) 『주님의 영이 그들을, 마치 골짜기로 내려가는 가축 떼처럼, 편히 쉬게 하시지 않았던가?" 주님께서 이렇게 주님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주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사 63:7, 쉬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자비를 베푸신다> 내가 여호와의 사랑을 이야기하리라. 여호와께서 하신 일로 여호와를 찬양하리라.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많은 복을 주셨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그러움을 보이셨다.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푸셨다.』

(사 63:7, 현대어) 『[이스라엘의 회개와 간구] 여호와여, 이스라엘 백성의 오랜 역사 속에서 이제까지 주께서 베풀어 주신 일들을 내가 기억합니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온갖 일들을 내가 기억합니다. 오직 주님의 백성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며 그들에게 베풀어 주신 놀라운 일들을 내가 모두 기억합니다.』


도를 아십니까? ㅋㅋㅋ 
도를 딱는 것과
신앙 곧 믿음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물론 도 닦는 것과 신앙 믿음은 모든 종교에서 같은 의미입니다
잡다한 것을 깍아내 버리고
알짜배기만 남기는 것이 종교심인 거죠

바로 이런 사람의 뜻을 거부하고
주님이 믿음 되심으로써 우리에게 심으시는 믿음은 저런 것과 완전히 정반대의 것이 되는 겁니다

도 닦는 것은 결국 성경에서 부자청년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전에 두 사람의 기도중 바리새인의 기도에서 잘 나옵니다

어릴적부터 율법을 다 지킨 부자청년과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토색하는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이 바로
도 닦는 겁니다
자기 숙제인거죠

그렇게 자기자신을 알짜배기로 남기고자
잡다한 것들을 깍아내는 겁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것도 신앙이냐 라고 그것 마저도 버려라 라고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킨 것 다 버려라 라고 하십니다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매국노 세리처럼 토색 삥뜯지 않았다 조차도 버려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어느 정도로
자기가 숙제를 했다 라고 내세우는 숙제도 삭제하고
앞으로 다시는 숙제를 할 수 없도록
자기도 없애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는 말씀인 거죠

이런 질투의 사랑이 과연 인간에게서 나올수 있겠습니까?

그럼 숙제를 하지 말라는 말이네?

네 맞아요 숙제 하지 마세요
그런데 숙제 하지 않는 나를 또 새롭게 만드는 자들이 있어요 글쎄

숙제를 하지 않는 나를 만드는 숙제를 또 해요

자 이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자신으로부터 못 벗어납니다
불교가 신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었다고 성공했다고 자부 했습니다

자 그런데 더 큰 신이 있어요 글쎄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니 신으로부터 인간을 떼어내었다고 좋아라 하지만
그런 신들을 누가 만들었을까요?
모조리 다 인간의 손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그러니 몇천년 만에 벗어났다고 좋아라 할 게 아니라
1초도 안되게 벗어날 것을 몇천년 걸렸다고 우기냐 말이죠

문제는 그런 가짜 백날 벗어났다고 우겨도
진짜 신인 인간을 도대체 무슨 수로 벗어나겠냐 말이죠

더 큰 판도라 상자를 열게 된 셈이다 말이죠
지금도 쓸데 없이 고민해요 그거 연구해요 글쎄

허구를 벗겼다고 좋아라 했는데
더 큰 허구 곧 자기자신이 있더라 말이죠
이 허구는 무슨 수로 벗어나냐 말이죠

또 더 더 더 큰 허구가 있을줄 누가 아냐 말이죠
다람쥐 챗바퀴 돌 듯이
의문의 반복 뿐이다는 겁니다

제발 도 딱지 말고
깨달음을 갖지 말고 (스스로 깨닫고 자살한 가룟유다처럼)
자기 숙제 하지 말고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도 하지 말고요

그냥 주님이 하시는 일이 뭔가를 보자 말이죠
자기 숙제가 있는냥
외부에서 벌어지는 주님의 숙제를 볼 수가 없어요
내부가 바쁜데 어떻게 외부에 시선을 옮기겠냐 말이죠
자기 연민에 빠져 사는데 말이죠

그 외부의 작업이 바로 모세의 날입니다
그때 그 옛적의 모세의 날이
지금 현재의 날이 되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누구의 모습 입니까?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 합니다
한 사람 바리새인은 도 닦았다고 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 매국노 세리는 고개도 못 들고 그저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 합니다

지금 누구의 기도가 오늘 본문
모세의 날을 기억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냐 말이죠

의인은 챙길게 너무 많아요
숙제를 그 만큼 많이 했으니까요
십의 일조 했음
이레에 두 번 금식 했음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음
너무 너무 챙길게 많아요

그런데 죄인 매국노 세리는 챙길게 하나도 없어요
모조리 다 버려야 할 것들 뿐이다 라고 합니다.

그 버림 속에
자기 자신도 포함해서
자기 목숨도 버려야 할 판국임을

주의 이름을 보고서 벌벌 떨면서
자기 이름이 쓰잘데 없음을 알고 외치는 겁니다.

이 특별한 이름이 도대체 뭐길래 벌벌 떨며
자기 이름을 삭제 당해야 함을 알게 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뻔뻔스럽게 이 여호와의 이름에
그 질투의 사랑의 이름으로
새롭게 갈아버려달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헵시바야 쁄랴야 라는 이름 이다 말이죠
전에는 황무지 였고
전에는 미움이였는데
그 버림받은 이름을

버려달라고
새 이름으로 갈아달라고 말이죠

바로 그 날이 바로 모세의 날
이스라엘 이라는 특별한 이름

영광의 이름을

저 유월절 어린양의 죽음으로 인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새이름으로 갈았듯이
이 어린양의 죽음에 합한 이름으로 갈아 달라고
그 이름이 바로 모세의 날에 주어진 새 이름 이스라엘 이였다고

그 때를 다시 펼쳐달라고 하는 겁니다.

즉 이것은
마치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예수님을 이용해서 내 구원 받겠다 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것은 앞의 글 마태복음 다윗의 자손이 어떻게 주가 되느냐에서
사람의 뜻으로 난 구원이 아니기에
육체를 모조리 단절 시키는 방식이라고 했듯이
사람의 뜻을 거부하고

오로지 주님의 숙제로써만 이루어지는 구원이기에
나는 황무지 맞습니다
나는 버림받는 미움을 받아야 마땅한 자입니다 라는 것을 인정하고

정직한 영이 없음을 알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써

번제와 제사가 아닌 
인애와 자비를 구하는 모습으로써

모세의 날을 기억하며
주여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는 회개입니다

즉 구원이란
있는 것 마저도 버리시게끔 절망으로 몰고가는 것이 바로 모세의 날에 펼쳐진 구원이였다 라는 거죠

바다에서 올라왔다 라는 것은
바다의 기능이 죽음 속입니다
절망 속입니다

그 절망 속으로 들어가게 하시는 것이 주의 구원 곧 모세의 팔을 들게 하신 주의 팔이다는 거죠

그 바다 속 그 스올 속
그 요나의 큰 물고기 뱃속 속에서
오로지 주님은 요나의 표적

즉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없고 없고 아무것도 없어도
여호와 이름 만으로 즐거워하는
주의 구원만으로 즐거워 하는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즐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번제와 제사로 즐거워 하는 것이 아니라

인애와 자비
곧 꺽으신 뼈로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만 즐거워 하도록

절망 속으로 집어 넣으시는 것이 구원이다는 겁니다
그래야 인간의 구원론이 다 깨지는 겁니다
부자청년이 들고온 어떻게 하면 구원 얻느냐 라는 어린아이가 절대로 묻지 않는
자력으로 구원이 되고자 했던 그 구원론이 깨지고
율법사처럼 큰 계명 두 계명이 뭡니까 라고 이웃사랑 하나님 사랑을 지켰다는
율법 지켰다는 그 율법론 깨뜨리시고
실로암 소경이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라고 가지고 놀고 있는 모압 암몬 에돔과 같은 짖으로 장난치는 죄론도 깨뜨리시는

그 어떤 것도 인간 쪽에서는 구원이 될 수가 없는 그 절망 속에서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집어 넣으시사
오늘 본문에서는 성신을 집어 넣었다 라고 했듯이

그들에게 그의 거룩한 영을 넣어 주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사 63:11, 개역)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사 63:11, 새번역) 『그들은, 지난날 곧 주님의 종 모세의 날을 생각하며 물었습니다. "그의 백성 곧 양 떼의 목자들을 바다로부터 올라오게 하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그들에게 그의 거룩한 영을 넣어 주신 그분이, 이제는 어디에 계시는가?』

이 새 마음을 집어 넣어서
내가 한 것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오로지 주님 홀로 다 이루신
이 질투의 사랑
너희가 나를 사랑 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사랑해서
화목제물로 독생자 예수를 죽이셨다 라는

이 질투의 사랑으로만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으로
뿌리로 삼았기에

광야는
광야 속은
바다 속은

지금도 우리를 모조리 탈탈탈 털리게
내 목숨 마저도 탈탈탈 터는 광야의 기능으로써
내가 내 이름을 황무지에서 쁄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신랑을 선택해서 결혼 하고 사랑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전남편 율법이고

새 남편 새신랑인 새언약은
질투의 사랑에 맞도록 나를 선택해서
가정부가 아닌 아내로 삼는다 라는 겁니다

인간이 선택하게 되면 종이 되지만
주님 쪽에서 아내로 삼게 되면
가정부가 아닌 자유자가 되는 거다 말이죠

인간 쪽에서 신랑을 선택하는 것은
가정부가 되는 것이고
율법이라는 전남편 이기에
양심(윤리 도덕) 이라는 전남편이기에

신랑 쪽에서 선택한 아내는
가정부가 아닌 자유하는 여자이기에
죽음도 너끈히 이기는 질투의 사랑을 누리는 겁니다.

그래서 첫째계명

(마 22:37, 개역)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막 12:30, 개역)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눅 10:27, 개역) 『대답하여 가로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신 26:16, 새번역) 『"오늘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고 당신들에게 명령하시니, 당신들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이 모든 계명을 지키십시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즉 다 바치라 라는 겁니다

마음도 모조리 저 분 하나님에게 다 줘버려야 하고
목숨도 아낌 없이 다 주라 라는 겁니다

인간 중에 아무리 신을 믿어도
모든 종교 속에서 그런 자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말이죠
모세 조차도 안 되었다 말이죠

누가 자기 마음을 다 줘버리고 목숨까지도 다 줘 버립니까

둘째로 큰 계명 두 계명의 둘째 계명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했다 말이죠
이웃의 기준이 뭘까요?
같은 이스라엘 민족만 해당 됩니까?
아니면 이방인도 포함 일까요?
가만히 보면 애매해요 실제로 성경 전체를 따져 볼때에
그때 그때 달라요
이웃 조차도 존재가 아닌 기능이기에 말이죠
그래서 반드시 편한 해석이 나와야 하는 겁니다 곧 우상이지요
그 이웃이 나를 편하게 하면 사랑하고
나를 불편하게 하면 원수로 몰아가 버리니

이게 무슨 이웃이냐 말이죠 이웃사랑이 아닌 거죠

그리고 더 골치 아픈 불편함
간따나 이웃 개념 조차고 애매한 그때 그때 다른 것에다
부정의 부정으로 더더욱 곤란한 것이 뭔고 하니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입니다
즉 이 말 자체가 말이 안되는 것이

인간이 자기 몸을 사랑해 버리면
이웃은 날라가 버립니다
일순위기 자기 몸 사랑인데
여기에다가 같은 1 순위로 이웃을 나의 몸처럼 사랑하라?

모순의 모순인 거죠

그래서 원인이 내 몸 사랑이 있는 이상
결과인 이웃의 몸도 나의 몸처럼 사랑 한다는 것 자체가

결과로써 안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안 나옵니다
결과는 원인이 없어야 나옵니다

즉 내 몸을 사랑하지 않아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도록 되어 있다 말이죠

이 원리가 바로 앞의 글
다윗의 자손인데 어떻게 주 라고 부르냐의 원리가 되는 겁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에서

이것은 율법입니다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뿌리 핵심 근원 원리입니다

인간의 율법 지킴은 자기 사랑이 깔려 있기에 질투가 없다고 했습니다
죽음 보다 강한 시기의 사랑 질투의 사랑이 없다고 했어요

그러니 인간 쪽에서 이 둘째 계명을 지키게 되어 버리면

내가 있고 이웃이 있는데
그 이웃을 내가 취사선택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처음에는 나의 대상물이 이웃이였지만
나중에는 이 이웃이 상전 노릇을 해서
머리 꼭대기 위로 올라가서 감놔라 대추놔라 주객이 뒤 바뀌기게 되는
이것이 인간이 이웃을 선택하는 방식입니다
이웃 조차도 아내 곧 사랑이 아닌
가정부 곧 종으로 삼는 거다 말이죠

내가 그렇게 하던가 아니면 이웃이 나를 그렇게 종으로 삼던가
이것이 인간의 이웃사랑이라는
질투의 사랑이 빠진
번제와 제사 라는 자기 사랑이 깔린 겁니다

이렇게 내가 이웃을 선택하는 자기사랑은 때려죽어도 안 바뀝니다

다행히 이웃이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달라졌어요

하나님이 이웃으로 와 버림으로써
이 계명이 완성이 되는 겁니다
전남편과 이혼 할 수가 있어요
새남편이 졸지에 생기면 말이죠
이웃이 졸지에 생기면 말이죠

그 이웃이 오히려 나의 몸을 자기 몸처럼 바꾸어요
어떻게?
자신의 몸이 십자가 라는 하나님의 저주 하나님의 질투로 인해
못 박혀 죽으셨거든요

네 ㅋㅋㅋ 네네 ㅋㅋㅋㅋ 네 맞아요 내 몸을 십자가에 못 박는
네 몸 같이 사랑 하시는 겁니다
예수님 자기 몸처럼 만들어 버리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ㅋㅋㅋ

자 그러니 이것은 다른 민족은 해석 할 수가 없어요
오로지 특별한 이스라엘만 말귀를 알아 먹어요
물론 못 알아먹는 척하는 이스라엘이 대부분 이지만 말이죠

그래서 다시 기억 합니다
모세의 날을 다시 상기 시키는 겁니다

참 이사야 얄 밉죠
배 배 배신자 맞지요

참선지자는 자꾸 세례요한처럼 우리를 물에 자꾸 빠자 버리요
절망 속으로 죽음 속으로 몰아가 버립니다
그래야 탈탈탈 털어서 빈손으로 만드는 겁니다

황무지로 만드는 겁니다
이것이 신부수업입니다
신부를 새 신랑과의 결혼을 위해서 신부단장 함이다는 거죠

그 이전의 신부는 자기가 자기사랑으로 신랑을 선택했는데
율법을 양심을 선택해서 결혼 했다 말이죠

뭐 달리 이것 밖에 없으니 다른 것이랑 결혼 할수도 없었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 까지의 그림자로 주어진 가짜 신랑 이였거든요
그렇게 혹독하게 가짜 신랑
그림자 신랑에게 속아봐야
이 차이로써 새신랑이 감사하게 여겨지는 겁니다

때려 죽어도 한 몸이 되지 않을려는 전남편 율법과
새신랑은

그렇게 율법으로부터 탈탈탈 털려서 빈손이 되어버린
황무지가 되어버린 그 비천한 여인 이스라엘과 결혼함으로써

새 이름
다시는 너를 버림받고 미움받는자 라고 부르지 않겠노라
다시는 황무지라 부르지 않겠노라

너는 나의 기쁨이라 헵시바 라
너는 나의 옥토 좋은 땅 좋은 밭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쁄라 라
이 생명의 땅과 결혼 했노라 라고

어느 정도로 특급상품인 포도인지를
어느 정도로 최고급 외인 포도주인지를
얼마나 포도농부의 기쁨이였으면
그 알갱이 하나 하나를 터트려서
붉은 옷이 되었을 정도로
질투의 사랑으로

이전의 이름을 탈탈탈 털어서
새 이름으로
붉은 피로 깨끗이 씻었다 라고 질투의 사랑으로 다 이루었다 라고 겠냐

자기 숙제를 다 이루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그 광야는 지금도 유효 합니다
나를 절망 속으로
빈털터리로 만드시는 이 버리심이
이 잃어버림이

바로 질투의 사랑이다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한게 아니라 (이렇게 되면 또 가정부가 되는 전남편과의 결혼이니 결혼도 아니지요 종 살이 이지요 가정부는 사랑이 아니라 그저 돈만 있으면 편안한 삶이 주어주고 구원도 노려 보겠다는 거죠 동행이 아닙니다)

내거 너를 사랑해서 화목제물을 주셨다 (동행이란 이 땅에 머물지 않고 정착하지 않고
계속에서 이동하는 무브 무브 움직이는 사랑이다는 겁니다
동행 곧 함께 하심 이라는 한 몸이다는 거죠
같은 운명이다는 겁니다. 우상은 자꾸 멈추지만 사랑은 자꾸 움직이는 겁니다.
남편 따라 사랑 따라 자꾸 따라가요 죽음도 통과 애굽도 통과
아이고 그것도 황무지 이가? 광야 이가? 죽음 이가? 라고 자꾸 신랑이 모든 것을 빵꾸멍 뻥뻥 뚫고 가듯이 우리는 주님이 뚫어놓은 그 터널을 지나가는 기쁨을 자유를 누리는 겁니다.
아이고 그것도 가난이가?
부자청년은 죽기를 무서워서 율법을 지켰던 겁니다
내 죽을게 너 살아라 라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으로
그들 죽은자 가난한 자와 함께 먹고 마시고 포도주를 즐기며 먹기를 탐하는
이런 자유함을 본인도 못 누리고 가난한 자에게도 주기 싫다 라고
근심하고 등 돌렸다 말이죠
빵꾸멍 내기 싫었던 겁니다 질투의 사랑이 아니였죠 자기 사랑으로 율법을 지킨 겁니다
남을 위해 지키는 율법이 주객이 전도 되어서 나만의 율법이 된 거죠
그 율법에 그 전남편에 에라이 당해 보라 말이죠
빵꾸멍을 내어야 할 자가 거꾸로 빵꾸멍이 날까봐
내 목숨과 같은 내 재산이 날라갈까봐 근심하고 등돌리고 뒤돌아서서 다시는 함께 동행하지 않는 겁니다.)

광야는 나를 빵꾸멍 내는 동시에
나 조차도 이 광야 라는 죽음을 빵꾸멍내는 바늘로
주님이 친히 만드셨다 말이져 직접 말이죠

이 질투의 사랑을
이사야 63장 1절 부터는
포도농장 주인과 포도주틀에 으깨져서 즙짜여져 포도주가 되는 이스라엘의 관계로 묘사가 되었고

7절부터 오늘 본문 부터는

모세의 날에 절망 속에 더 더 더 절망 속으로
아이고 그것도 절망이가 라고

탈탈탈 다 털리는 내 목숨도 파리목숨처럼 귀하지 않고
오로지 새신랑의 목숨 만이 귀하다 라고
이 목숨에 합하도록 황무지 목숨을 버리고
새신랑의 목숨과 동행케 만들고자

바다 속으로 다 집어 넣었다가
잃어버림 속에 집어 넣었다가

다시 예수 안에서 다시 사는
다시는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다시는 버리겠다 미움이다 하지 않겠다 라고 헵시바 
다시는 황무지, 죽음, 광야 라고 하지 않겠다 라고 Qbffk

그래서 황무지를 통과 하는 자유하는 여자

아무리 미움 받고 버림받아도 그 미움 그 버리움도 통과 하는 자유하는 여자

이 특별한 예루살렘 이라는
음녀를 통과한 여자로 만드심은

먼저 특별한 새신랑이 있었기에
다윗은 꼬추 짤려서 여자가 되어서 다윗의 자손을 주여
내 신랑이여 라고 했습니다
아마 남편과 아내로 예수님이 물었다면
바리새인들 기절 초풍했을꺼다 말이죠
모든 금기가 다 깨어질테니 말이죠
그것이 바로 앞 구절인 부활이 없다 라는 사두개인과의 논쟁이였으니 말이죠
사랑은 무조건 없다 라고 우기는 겁니다
부활이 없다 라는 거죠

거룩은 없다
의는 없다

그렇게 되면 더럽다 라고 말이죠

네 맞아요 더러움을 그들은 통과 하지 못하는 종노릇하는 정착되고 머물러 버리는 우상숭배자였던 겁니다

구멍 뚫어버리는 자유가 없는 거죠 질투의 사랑이 없어요

그래서 이사야는
지금 성전에서 두 사람이 기도하는 두 사람중
바리새인의 기도가 아닌
매국노 세리
배신자 참선지자 로써

어서 어서 이 엉터리 이스라엘을 뿌사뿌고
진짜 이스라엘로 만들어 달라고
그때 모세의 날에

그 긍휼의 날에 펼치셨던 질투의 사랑으로 구원하신 그 구원의 날
신원의 날

고아 과부 나그네를 건지셨던 희년의 날을 펼쳐달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물론 엉터리 구원 곧
사람의 뜻으로 난 구원
곧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는 둥
이런 기도는

바다에서 올라온 민족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특별함이 아니다
특급 상품이 아니다

포도주틀에 짜서 농부의 기쁨이 되는 민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구원은 사람을 기쁘게 하는 가짜 구원으로써

우리를 불 속에 집어넣고
물 속에 집어넣어서
다 죽여서

다시 살리시는 그 질투의 사랑을
그 모세의 날에 펼치시던 그 구원을
그 긍휼을 펼쳐달라고

이사야가 기도하는 겁니다.

(사 63:10, 현대어) 『그러나 우리는 주께 반역하고 주님의 거룩하신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스스로 주님을 우리의 원수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도 주님의 백성과 싸우셨습니다.』

여기서 원수가 되었다
스스로 말이죠

주님의 사랑을 거역하고 말이죠

그래서 주님은 주님이 백성과 싸우셨다 라고 했습니다
나를 주의 발등상에 놓여지는 하나님의 원수로 들추어내지 못하는
그 원수 문제
그 죄 문제
이 죽음 
사망 문제 해결 못하는 주님은 가짜이다 라고

제발 해결해 달라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하는 겁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매국노 세리처럼 기도하더라 말이죠
누가?

배 배 배신자 이사야 
배 배 배신자 참선지자가 말이죠

다들 바리새인의 기도 십일조 했구요 이레에 두 번 금식했구요

그것은 원수를 사랑하는 질투의 사랑을 구하는 기도가 아닌거다 말이죠
내가 원수가 되었으니 이 원수 문제 해결해 달라는 질투를 구해야 한다 말이죠

어딜 감히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데 누가 꾀고 속이냐 말이죠
뭐 회개 눈물 금식 기도를 드려서 아이를 살려 보겠다고?

그렇게 아이를 살리면
원수 문제
죄 문제
죽음 문제 해결 되겠냐 말이죠
우상 문제 해결 되겠냐 말이죠
선악의 법
율법이라는 전남편 문제 해결 되겠냐 말이죠
수치를 스스로 가릴려고

하나님과 스스로 원수 가 되어버리니
해결은커녕 도리어 완악한 수건을 더더욱 쓰고 더더욱 겹겹으로 쓰는 꼴이다 말이죠
벗길려고 하는 판국에
빵꾸멍을 뻥뻥 뚫고자 하는 판국에
막힌 담을 헐어버릴려고 하는 판국에
더더욱 높이 더더욱 두껍게 담을 쌓고 있으니 말이죠

자기가 자기 스스로 수치를 해결할려고 하면 할수록
무화과 나뭇잎만 소모될뿐입니다

단번에 드린 제사로 다시는 죄 아래 갇혀 있지 않겠되는
자유를

이 자유를
이 구원을 요청하고자 브로큰 애로우 폭격요청을 하는 배신자가 바로 오늘 이사야입니다

매국노 세리의 기도가 옳았듯이

다들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바리새인의 기도가 우상이였듯이

마땅히 빌바를 알지 못하는 것을
성령을 통해서 기도하는 이사야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솔로몬 재판의 진짜 엄마가 진짜 참선지자가는
절망에서 더더욱 절망 속으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것도 절망이가 라고 절망을 구멍 뚫는 질투의 사랑 때문에 말이죠

재판에 이길려고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졌뿌라 라고 더더욱 지겠다 라는 식입니다

이기면 뭐하노 자식이 죽는데

그 죽음에 같이 동참 합니다
절망 속으로 더 더 더 들어갑니다
빈손 빈털터리
모든 것을 빼앗김 당하는
잃어버림 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가짜 엄마
가짜인 거짓선지자는
왕의 지혜에 박수를 칩니다
재판을 이길려고 합니다
그래서 왕의 편에 섭니다

왕을 자기 임금 삼고자 끝까지 따라 갑니다

재판에 이기기 위해서는 내가 이기기 위해서는 말이죠
부자청년도 그랬고
큰 계명을 묻는 율법사도 그랬고
탕자의 형 맏아들도 그랬고

구원을 따 내기 위해서는 말이죠

그러니 참선지자는 그런 인간의 시선에 배신을 때립니다
자기 숙제고 뭐고 다 날라가 버리고
그저 아기의 죽음에 뛰어늡니다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꼬

이 질투의 사랑을
구하는 자는

배신자 이사야 뿐입니다
매국노 세리 뿐입니다

다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고 부르짖는 와중에
도리어 이 나라는 망해야 한다 라고
이 원수와 싸워 달라고 폭격요청을 합니다

알갱이 하나 하나를 터트려 달라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전쟁
주님 홀로 하시는 전쟁

이사야 본인 조차도 포로된 입장이니
원수된 입장이나 어서 어서 건져달라고
원수의 손에서
이스라엘 손에서 건져 달라고 폭격요청을 하고 있는 배신자
마치 자기 나라는 냅따 다 여호와께 팔아버리는
기생 라합처럼 말이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너와 네 가정이 구원을 얻는다 라고

자기 이름
자기 목숨
자기 나라
자기 민족
자기 신
자기 국가 영토를

자기 나라 임금에게 묻지도 않고 땅문서를 냅따 다 여호와께 팔아 넘길려고
40년 동안 벌벌벌 떨면서
그 이름에 간담이 녹으면서 기다리고 기다렸다 말이죠

이 심정이 지금 이사야입니다
이스라엘 나라를 냅따 팔아버리는 겁니다
이 원수와 싸워 달라고

이스라엘은 지금 에스겔 서를 통해서도 봤듯이
거짓선지자에 빠져서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시드기야의 사고방식
이스라엘 독립은 이스라엘이 로마와 싸워서 하신다 라는
가룟유다의 사고방식에 빠져 있기에

바로 그런 사고방식과 싸워 달라고
전쟁 요청을 하는

마리아의 기도
한나의 기도로써
이사야는 이 배신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들 배불러 터진 구원을 바라고 있는 와중에

목마른 자로써 이 모욕적인 구원을 바라고 있는 겁니다

아무도 돕지도 않는 구원을
주님 홀로 제발 하시라꼬

마치 주여 제발 죽어주소서 라고
모세와 엘리야가 변화산에서 외쳤고
비쌴 삐~~~~~~~~~~~~싼 향유를
땅바닥에 허비하면서까지
머리로 예수님의 발을 씻겨
미리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장사치르는
창녀 마리아

더러운 마리아

배신자 마리아의 기도
몸짓 기념행동
특별행동을

지금 이사야가 하고 있는 겁니다

이 성신을 주신을 자가 어디 계십니까 라고
목마른 자가 다윗의 자손이여 저희 두 소경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외치듯이 말이죠

이에 반해 거짓선지자의 기도는
비록 절망 속에 있어도 극복할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달라고

내 나라 
내 신앙
내 행함이 안 빼앗기도록 해 달라고 말이죠

전혀 배신자 스럽지 않지요
다들 알아 먹지요
특별함이 없어요
제발 잃어버림 당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바벨론 여자들이
고아 과부 나그네가 안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우상 섬기는 이유로 
이사야 사칠, 팔에 나왔듯이

지금 있는 것 안 빼앗기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만

도리어 참선지자는 다 빼앗기는
목숨마저도 빼앗기는
이 광야를 통해서
바다를 통해서

비로소 다 탈탈탈 털려서
고아 과부 나그네 에게 희년을
신원자를 보여 달라고

죄인을 부르러 오신 구원자 다윗의 주
환자만을 부르러 오신 치료자 찢으셨으나 다시 싸매어 주시는

이 특별한 이름을 부르짖도록 하시고자
그때 모세의 날을 다시 펼쳐달라고
이 말은 제발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의 의, 거룩을 입혀 달라고
잃어버렸으나 다시 되찾는 간극을 벌려달라고

나 라는 하나님의 원수와 제발 싸워 달라고 요청하는 기도입니다

누가 자신을 하나님의 원수로써
하나님이여 제발 저를 찢어달라고 요청하겠냐 말이죠

남들은 다 안하는데
꼭 배신자 한 놈이
저요

제발 이 나라 이 원수
멸망시켜 달라고

주께서 내 주께

(마 22:44, 개역)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네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냐』
(막 12:36, 개역) 『다윗이 성령에 감동하여 친히 말하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내가 네 원수를 발 아래 둘 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느니라』
(눅 20:42, 개역) 『시편에 다윗이 친히 말하였으되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행 2:34, 개역)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눅 20:42, 쉬운) 『다윗이 시편에서 직접 말하였다.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내 오른쪽에 앉아라.』


주의 오른팔이 
모세의 팔이

원수 문제 해결 될 때 까지
십자가에서 다 이루실때까지

주의 오른팔이
그 질투의 사랑이
멈추지 않고
정착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부지런히 부지런히 무브 무브 움직여서
원수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말이죠

나의 엉터리 기도에 속지 말아 달라고
나의 기도 나의 금식 나의 회개 나의 눈물을 깨뜨리시는

꺽으신 뼈를 쉬지 않게 움직여 달라고

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야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주의 오른팔만

주의 십자가의 죽음만 찬양하는 새노래꾼이 되는 겁니다

인간의 믿음은 이 십자가(주님 홀로의 믿음, 오른팔)에 대한 거부요 반발입니다
마귀와 합했기 때문입니다

이 원수됨을 깨뜨리시는 주의 오른팔이 아니였으면
이 꺽으신 뼈가 아니였으면
이 남겨둔 한 씨
한 다윗의 후손인 다윗의 주가 아니였으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 였었기에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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