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주의 성실(진동)함을 요청하는 종말 기도자 (사 64, 1-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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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3 주의 성실(진동)함을 요청하는 종말 기도자 (사 64, 1- 7)


파괴되는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 (사 63,15-19)
이사야 2017 2020. 11. 15. 10:59
18-112 유린(짓밟힘) 당한 주의 성소(만민이 기도하는 집) (사 63,15-19)

〈이사야 64: 1- 7, 개역한글, 구약성경 1044 쪽, 찬송가 394장 주를 앙모하는 자〉

(1) 원컨대 주는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고 주의 앞에서 산들로 진동하기를

(2) 불이 섶을 사르며 불이 물을 끓임 같게 하사 주의 대적으로 주의 이름을 알게 하시며 열방으로 주의 앞에서 떨게 하옵소서

(3) 주께서 강림하사 우리의 생각 밖에 두려운 일을 행하시던 그 때에 산들이 주의 앞에서 진동하였사오니

(4) 주 외에는 자기를 앙망하는 자를 위하여 이런 일을 행한 신을 예로부터 들은 자도 없고 귀로 깨달은 자도 없고 눈으로 본 자도 없었나이다

(5) 주께서 기쁘게 의를 행하는 자와 주의 길에서 주를 기억하는 자를 선대하시거늘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랬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6)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 가나이다

(7)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사 64:1, 새번역) 『주님께서 하늘을 가르시고 내려오시면,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 것입니다.』
(사 64:2, 새번역) 『마치 불이 섶을 사르듯, 불이 물을 끓이듯 할 것입니다. 주님의 대적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알게 하시고, 이방 나라들이 주님 앞에서 떨게 하여 주십시오.』
(사 64:3, 새번역) 『주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우리들이 예측하지도 못한 놀라운 일을 하셨을 때에, 산들이 주님 앞에서 떨었습니다.』
(사 64:4, 새번역) 『이런 일은 예로부터 아무도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무도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본 적이 없습니다. 주님 말고 어느 신이 자기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이렇게 할 수 있었겠습니까?』
(사 64:5, 새번역) 『주님께서는, 정의를 기쁨으로 실천하는 사람과,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람과, 주님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우리가 오랫동안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찌 구원을 받겠습니까?』
(사 64:6, 새번역) 『우리는 모두 부정한 자와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나뭇잎처럼 시들었으니, 우리의 죄악이 바람처럼 우리를 휘몰아 갑니다.』
(사 64:7, 새번역) 『아무도 주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주님을 굳게 의지하려고 분발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우리에게서 얼굴을 숨기셨으며, 우리의 죄악 탓으로 우리를 소멸시키셨습니다.』

(고전 2:9, 새번역)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64:4』
(고전 2:9, 공동) 『그러나 성서에는, "㉠눈으로 본 적이 없고 귀로 들은 적이 없으며 아무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마련해 주셨다."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 ㉠이사 64:3, 52:15.』


오늘 본문을 보니
브로큰 애로우를 외치는 한나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가 생각 납니다.
폭격요청인 거죠

종말의 영인 새마음 새영 곧 성령인 예수님의 영이
십자가의 영이 들어간 자 만이 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곧 종말의 기도입니다

한 가난한 과부가 전재산을 헌금으로 바칩니다
그것을 주님은 오늘날 목사들의 해석과는 반대로 하십니다

목사들은 자 보세요 여러분 이렇게 어려운 분이 전재산과 같은 재산을 바쳤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마음 자세를 가지고 헌금하셔야
교회가 제대로 운영이 됩니다 라고
장로들과 짜서 사람의 계획과 뜻을 세뇌시키더라 말이죠
이것이 사람의 뜻으로
혈통으로
육정으로 난 자들의 특징이다 말이죠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가난한 과부의 전재산과 같은 헌금이
종말의 헌금 으로써 어서 이 성전 뿌쌋뿌라 라고
교회 뿌쌋뿌라 라고
진짜 참 성전이라는 실상을
그림자야 물러가라 라는 심정으로 헌금했다 라고 칭찬하시더라 말이죠
전혀 다른 해석인데

그 본문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겁니다

한나의 기도
마리아의 기도
오늘 본문의 이사야의 기도가
바로 예수님이 말씀하신 한 가난한 과부의 전재산과 같은 헌금바침을
종말의 헌금으로 언급하시는 겁니다
마치 하나님이 기뻐하는 금식 곧 종말의 금식처럼 말이죠

즉 이 말은 부정의 부정으로써의 기도요 헌금이요 금식이다 라는 겁니다
씹꼬 뜯꼬 맛보고 즐기는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과 강도의 친구로써의 금식이
바로 종말의 금식처럼 말이죠

죽은 자를 살리는 금식이어야 하는데
종교스펙 쌓고 있는 유대인의 금식 옆에서
치맥을 시켜 먹고 있으니
충돌 안 하고는 못 배기는 겁니다

이렇게 종말적인 사건은
한마디로 말해서
남 눈치 안보고 그냥 밀어붙이는
불도져를 밀어버리는 식입니다

인간들은 그 모든 행동들이 선악적이여서
게임처럼
높은 점수냐 아니면 마이너스 인생이냐 라고
첩경이 매일 매일 주가변동처럼 오르락 내리락 하는
첩경 쌓기에 미쳐 있어요
하루라도 멈출 길이 없어요

온유가 와야 합니다
이 온유에 미리암 누나가 반발 하죠
왜 저 가장 천한
우리 무리 중에서 가장 비천한 자를 아내로 삼냐 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내가 너를 업어 키웠는데

늘 인간은 선악 선악 법 법 법을 따지는데 있어서 강박증에 시달려요
성공이면 선이고
실패하면 사회악으로 몰리니까 말이죠
선악만 유통 매매 되는 더러운 짐승 세상이다 말이죠

그것을 불도져로 밀어서
첩경을 평평하게 평탄케 하는 것이 바로 종말이다 라는 겁니다
종말의 기도 말이죠

세례요한이 그래서 물에 다 빠자뿌잖아요
세례 즉 물에서 건져내는 죽였다가 다시 살리는
이 하나님의 의를
거룩을 펼치는 겁니다

이것이 샬롬 이다 라고 했잖아요

그것도 모르고 왜 저 스펙이 가장 나쁜
가장 낮은
가장 비천한 자와 결혼하느냐
실패한 여자랑 결혼하면 안돼 안 돼~~~~~~~

지금 불도져로 밀어버리는데 실패 성공 그게 무슨 의미 있냐 말이죠

높은자는 늘 떨어질까봐 두려워서 더 더 더 높고자 하고요
두로왕의 교만은
교만은 곧 타락 떨어지는 겁니다
부자들은 아무리 비싼 물건을 소유해도
남이 똑같은 것 가지게 되면 그거 버려요
새상품 신상품 사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말이죠
비싼거 사는게 목적이 아니다 말이죠
나만 가지는 것을 목적으로 해요
그것이 바로 구분짖기 이거든요
바리새인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바로 구분짖기이다 말이죠
그러니 자신을 세리와 대조 시키잖아요
예수님과 대조 안해요
뻔데기 앞에서 주름 잡기 이니까
그렇다고 틈을 노리는 정치를 포기하는 것도 아니다 말이죠
늘 틈을 노려요

주님만 바리새인과 충돌 하시는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도 충돌할려고 달려들어요

늘 수시로 언젠가는 먹고 말꼬야 치토스처럼
언젠자는 반드시 죽이고야 말꼬야 라는 겁니다
사도바울을 죽일려고
저 놈 안 죽으면 나 안 먹고 안 자고 안 살겠다 까지 나와요
그게 종교 오락이거든요
남을 이기지 못하면 잠을 못자요
안 자겠다가 아니라
사실은 잠을 못 자는 겁니다
분해서
억울해서
화가 나서

아이고 그것도 질투가

더더더욱 질투의 사랑으로써
이것이 죽음 보다 강한 질투의 사랑이라고
금식을 하는게 아니라
금식 하는 자들 코 앞에서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먹고 죄인과 친구가 되어버리는 종말의 금식을 하더라 말이죠

그것도 종교게임이가 라고
종교게임으로 다 이겨서
실패한 세리 강도 죄인들을 다 살려버리는 겁니다
게임 오락기로 두두두두 총을 갈겨서 다 죽여버린 자들을
다 살려 버리니까
게임이 뭐가 됩니까
의문의 반복이 되더라 말이죠
재미 하나도 없어요
그저 중독으로써 세뇌 당한 자처럼
오락게임만 하는 겁니다.

누가 죽은 자의 하나님 입니까?

성령의 소욕과 육의 소욕은 서로 반대입니다

육의 소욕은 
죽은자 이면서 산자 인척 자기 자리를 확장 시키고자 게임의 목적이 이기는 것이기에
도리어 죽었으면서 산자인척 하다가 진짜 산 자를 죽일려고 달려들고

반대로 산 자 이신 예수님(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고 첫아담은 그냥 숨만 쉴뿐인 죽은자와 같은 좀비일 뿐이다 말이죠 긍휼히 여겨달라고 해야 할 판국인데
살았다 라고 산 자의 자리에 덮썩 주저앉고자 높은자가 될려고 도리어 살인을 저지른다 말이죠)은 도리어 죽은 자를 살리고자 죽으시러 오셨고

죽은 자는 산자를 죽일려고 하고
산자는 죽은 자를 살릴려고 하고

그런데 아무도 주여 저 죽은자입니다
잃어버린 자입니다 라고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보내심을 받지 않았다 말이죠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죄인을 부르러 왔는데
아무도 죄인이 없어요
그저 의인이다
나 살아 있다
봐라 내가 한 자리 했다 라고
자기 자리가 있다
이것을 더 확대 해 볼려고
부자청년이 더더더 확대시키고자 다가오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죽은자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특징이 바로
자기 자리가 있다 라는 겁니다
즉 자기 자리가 있다 라는 말은
죽은 자를 살리시는 주님의 자리가 없더라 말이죠
바로 앞의 글 마태복음에서 서로가 큰 자가 되고파 하니까
섬기는 자의 자리는 없는 겁니다.

저 이렇게 인간은 이유 없이 무조건 높아져야 한다 라는
타인의 욕망 곧 선악의 욕망인 죄의 소원인 거죠
말이 타인이지 결국 마귀의 욕망의 하수 노릇을 하는 셈인 거죠
자기도 이유를 몰라요

그러나 인자는 섬기러 왔다 라는
정반대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이 섬김에서만 뭐가 나오냐 하면
거룩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의 죠

이 하나님의 의란 성화론자들이 말하는 거룩과는 차원이 달라요

이사야 이오팔

(사 25:8, 개역)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그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사 25:8, 새번역) 『주님께서 죽음을 영원히 멸하신다. 주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의 얼굴에서 눈물을 말끔히 닦아 주신다. 그의 백성이 온 세상에서 당한 수치를 없애 주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고전 15:54, 새번역) 『썩을 이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고, 죽을 이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을 그 때에, 이렇게 기록한 성경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을 삼키고서, 승리를 얻었다." / ㉤사 25:8』
(계 7:17, 새번역) 『보좌 한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생명의 샘물로 그들을 인도하실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 주실 것입니다." / ㉡시 23:2; 사 49:10 ㉢사 25:8』


죽음에 대한 시기와 질투인 사랑을 하나님의 거룩이다고 합니다
인간의 거룩은 질투의 사랑이 아닌
일종의 스펙쌓기죠
부자청년처럼 배불러 터진 구원을 추구하는 겁니다
그런 구원은 성경에 없습니다

모욕적인 구원 밖에 없어요
철저하게 죄인 만드셔서
환자 만드셔서

환자에게만 필요한 의사로만 오시는 분이 거룩이다
의로움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목을 주의 성실하심이다 라고 표현했어요
성실하심이란
밤에 애굽을 작살내는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의 일곱 곧 완벽한 심판을 두고 말하지요
이스라엘 또한 출애굽때에
심판 곧 부활을 없애버리는 장자를 없애버리는 그 심판 속에 놓여집니다
마치 에스겔 서처럼 하나님의 집인 이스라엘 심판 당해서
물 속에 빠져버린 상황처럼 말이죠
그렇게 되니까 그 동안 주변의 이방나라의 본색들이 드러나는 겁니다
정작 물속에서 아쿠아룸처럼 두 손으로 감싸서 보호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다들 비난하고 꼬씨다 라고 좋아라 합니다
그렇게 은혜 받았던 두로 나라 는 더더욱 노골적으로 적개심
살인의지를 표하고 있고
동시에 자신들은 그 부요함에 빠져
겁을 상실한 채로
하나님의 자리에 까지 앉아버리더라 말이죠

마치 요셉을 알지 못하는 애굽의 새로운 왕이 나타남으로 인해서
은혜의 끈을 놓아버리고
선악의 법을 쥐어버리듯이 말이죠

밤에 주의 성실하심이 밤에
이 교만한 애굽을 작살내는

주님의 거룩한 전쟁을 펼치시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에 그 죽음을 통과하도록
인자하심을 펼치시는 겁니다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이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을 입히시는

이 두 간극이라는 공백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이스라엘이니까
다른 구원은 없는 겁니다

그러니 죽고자 하는 자는 살것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는 말은
이것을 이순신장군처럼 실천하라는 말이 아니라
그래 되면 또 육의 자랑이 되어버립니다
못 잊어요

삭제당한다는 의미인데
도리어 새겨버릴려고 영원히 해 버릴려고 하더라 말이죠

이 모순 된 간극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구나 화로다 화로다 나는 망하게 되었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비로소 자신의 자리가 없는 종말의 시선에서 보니
모두다 사라지고 삭제 당해야 하는 이전의 것이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갑자기 앞 뒤 모순 되게
원인이 없는데 결과가 덮쳐짐으로 인해서

이전 것은 지나 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 라고

분명 큰 물고기 바닷속 스올 어두움의 끝판왕 무저갱 속에 놓여졌는데
주의 성전이 있는 곳을 향하여 기도를 요나가 했다 말이죠
주의 성전에는 주의 이름이 있어요

이 이름이 구원하더라 말이죠
성전의 기능인 죽음이 변하여 영생이 되어버리더라 말이죠
그 성전의 기능이 바로 죄에서 거룩으로 옮기는 작업을 하는
십자가 라는 겁니다

그러니 자기 자리가 날라간 것이 저들에게는 어리석고 미련한 것이고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걸림돌 이지만 (자신들이 태어난 모태인 처음자리를 스스로 발로 차버려 버리니까 말이죠)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예수님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께 영광이더라 말이죠

(고전 1:22, 개역)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고전 1:23, 개역)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고전 1:24, 개역)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 1:25, 개역)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그러니 나의 이전 것이 사라지는 그 끝을 미리 땡겨서 보자 말이죠
그 종말의 기도를 오늘 본문의 기도자처럼 외쳐보자 말이죠

비로소 허구는 다 날라가고
실상만 남을꺼 아니겠냐 말이죠

(사 64:7, 개역)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는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우리로 소멸되게 하셨음이니라』

이 구절이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갔다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로지 주님 홀로 숙제를 다 이루셔서
다 완료한 것을 우리에게 뒤짚어 씌워서
무시험 합격 처리해 버리시는 겁니다

이 무시험 합격
앞뒤 모순 되잖아요
원인 없는데 결과가 합격이래요 글쎄

이 하나님의 의
거룩
곧 주의 성실하심으로 심판하시고 빨래했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그 죽음을 통과 시켰다 라는 겁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 어두움을 통과하지 못하고
밤에 갇혀서 늑대처럼 울부짖으면 먹어도 먹어도 또 배고파서 울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먹어도 밑빠진 장독대 이다 보니
그 어떤 것도 만족함을 주지 못하는
바닥 없는 지옥이고

반대로 주의 성실하심으로 인해
우리는 바닥을 치고서
바다 속에서 나오는
죽음 속에서 나오는

아니 누가 이런 짓을 했냐 말이죠
주여 도대체 당신 저에게 무슨 짓을 하셨나요
바다 속에서 올라오게 했다 라는 겁니다
세례요
연합 곧 같은 운명인 동행이다 라는 겁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군대로써
가시떨기 나무에 불이 붙은 것처럼
분명히 사라져야 하고 없어져서 타들어가는 삭제되어야할 
가시떨기 나무임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불꽃이 타들어가지 않도록 배려 하신

불이 붙은 심판과 동시에 
아 이제 화로다 화로다

불이 붙었구나
나 이제 불에 타야 마땅한 자이구나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사야의 기도
바울의 기도
요나의 기도가 다 이 종말에서
끝에서 끝장을 보는 상황 가운데서

아니 이런 죽음 속에서도 찾아오십니까 라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요나처럼

무화과 나무 잎이 없고
포도나무에 열먀가 없고
없고
없고 없고

즉 종말의 끝의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났다면
무시험 합격이다 라는 겁니다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고
이 죽음 속에 까지 찾아와 주신

그 인자하심에
강도는 그 죽음의 사형선고 속에서도
대박났다고
좋아라 죽습니다
감사함이 넘쳐서

어쩔줄 몰라서

자신이 사형 당하고 죄 지은 형벌 받고
이런 것들이 하나도 심각하게 여겨지지 않고

어떻게 나 같은 놈을 용서하는지
그 사랑에 뿅가는 겁니다

베드로도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그 물음에
눈 녹듯이 내려서
이제 내 신앙 내가 지킨다 라는 그 의문의 수고를
손 떼고 손 내려놓고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라고 뻔뻔스럽게
화답의 찬양을 드리고 있으니

이 종말의 상황을 어서 어서 오라 라고 기도하는
이 종말의 기도야 말로

산 소망 되시는 주님을 갈망하는 자의 기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얼마나 신이 났으면
브로큰 애로우 폭격요청을 할까요
끝을 봐버린 자는
모든 것을 다 본자입니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사라질 것이기에
미련 하나 둘 필요 없이
어차피 망할 것 빨리 망하라 라고 말이죠
시간 개념으로 어서 망했뿌라 라는 요나의 오해가 아닌
사건으로써 종말이 와야
이 쓸데 없는 의문의 반복을 멈출 것 아니겠냐 말이죠

썩은 이 는 어차피 뽑을 것
아무리 그대로 두고 싶어도
아프니 어절수 없어요뽑으니까 하나도 안 아파요
쥐고 있을려고 하니 계속 아픈 거죠

의문은 빨리 사라지고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면 된다 말이죠

그래서 종말을 확 땡기는 기도를 하는 겁니다
모세가 예수님에게 버르장 머리 없이
어서 죽어주세요 라고 기도 변화산에서 100분 토론을 했고
비싼 향유를 부어서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창녀 마리아는
싸가지 없이 예수님의 죽음을 미리 장사 치르면
멀쩡히 살아 있는 양반을 붕대로 칭칭감아서
미이라 로 만들어 미이라 에 바르는 향유를 때려부은 것이다 말이죠
전재산을 말이죠
자기 목숨 값을 말이죠

가난한 과부의 전재산을 헌금으로 바친 종말의 헌금처럼
어서 이 눈에 보이는 성전을 허물어 달라고 말이죠

실상이
종말에서만 볼수 있는 실상을
건방지게 확 끌어당겨서
지금 이루어 지게 해 달라고
종말을 땅기는 헌금을 하듯이 말이죠

다른 소망이 뭐 있겠습니까?
나 자신에게 소망 걸어본들?
그거 안개와 같고 후 불면 모래알처럼 사라질 뿐입니다

(벧전 1:3, 개역)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4, 개역)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그리스도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에서만이 부활이 있는
산 소망은 다른 곳에 없어요

이슬람처럼 순교 백날 해도 없어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속인 십자가 속에만 부활이 있습니다
산 소망이 없어요 다른 소망은 환상일 뿐인 마약이다 말이죠

그 산소망을 확 땡겨버렸으니
이 얼마나 총명한 성령 받은자 종말의 영을 받은자 십자가의 영을 받은자 아닙니까

반대로 짐승의 수 666을 받은 자는
아무리 아무리 채울려고 해도 채울수 없는
더 더 더 높은 자
더더더 큰 자가 될려고 해도
강박증인 거죠
아무리 선악으로 매매 하고 소통할려고 해도
채울 길이 없는 의문의 새는 바가지 이다는 겁니다
666이란 결국 함량미달이 무게가 채워지지 않는다 라는 겁니다

채울 길을 일곱 되신 예수님의 완벽한 심판으로 인해
죽고
다시 그 죽음 속에서 다시 살리시는 일곱 되신 예수님의 완벽한 거룩을 입혀주심 이다는 겁니다

그 새는 바가지 뿌싸 뿌고
다시 새 바가지 다시는 새지 않는 완벽한 바가지로 교체시켜서
일방적으로 무시험 합격 처리하시는

이 반칙을
이 십자가의 피 용서를
이 부조리한 스캔들을 보고

그 종말을 나도 나도 주세요 라꼬 확 당기는 기도
신나는 기도

베드로는 원인을 자꾸 갖추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그 원인으로 인해 주님이 안 죽도록
성전이 안 파괴되도록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아버지 뜻에 맞추어서 아들이 태어나는 다윗의 주가 아닌 다윗의 자손 개념인
죽은 자의 하나님을 갖출려고 하다가 박살이 납니다

예수님이 결과를 갖추어서
원인 없이
종말의 완료로
사랑의 완료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는 이 질투의 사랑으로 인해
아들을 위해 아버지가 태어나야만 하듯이
예수님을 위하여 베드로는 새로 태어나여만 하는
죄인 중의 괴수가 되어서
십자가라는 기능
의사라는 기능에 맞는
환자로써 태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뭐 방종을 유도한다는 둥 미리 걱정을 하는데
방종 안하면 그럼 그 사람은 완악한 수건을 벗은자 인가에 대한
확실한 증거가 있냐 말이죠
경건의 모양만 갖추었지
경건의 능력인 예수님의 십자가는 거부하는 
또 인간 쪽에서 숙제를 갖추겠다는 심뽀
사람의 일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는거 아닙니까
종말의 의미 곧 성령
끝에서 보는 시선이 없는 겁니다
그런 베드로는 위해서 기도하시고자
네 맞아요 종말의 기도죠
물에 빠자 죽여놓고 다시 살리시는
이 간극을 
세 번 부인
삼일의 간극을 벌리시는 겁니다
그 속에서 태어난 자가 베드로 이니
음부의 권세가 이길 턱이 없는 거죠
그 음부의 권세 한 복판에 교회를 세웠으니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어요
바닥을 쳐 버렸으니까 말이죠
주님이 뛰어드셔서 즉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써
바닥 없는 밑빠진 장독대에
자신이 밑바닥 곧 섬김
끝까지 섬김으로써 십자가를 다 이루셨으니 말이죠
이 종말의 믿음을 선물로 주시고자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한 쪽 강도로 만드셔서
은혜를 일방적으로 퍼 붓습니다
안 그러면 또 자기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했다 라고 우길꺼 아닙니까

우리는 다 양같아서 각기 제길로 가는 말씀도 이루셨고
또 하나님이 그를 죽이시기로 작정 하셨다 원하셨다 도 이루셨다 말이죠
어딜 감히 이 하나님의 원하심을
기뻐하심을
베드로 인들 수제자 다움을 아무리 펼쳐도
막을 길이 없는 겁니다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는 이 질문을 던지실려고
결과를 선물로 주실려고
질투의 사랑
십자가의 피 용서를 주실려고
죄인 중의 괴수로 만드셨던 겁니다
이 종말을 끌어와서
미래 완료를 끌어와서
십자가의 사랑을
일만달란트의 용서와
7에 70번의 용서인
종말의 용서
종말이란 질투이다는 겁니다
아이고 그것도 죽음이가 라고
그것도 세 번 부인이가 라고
너끈히 내어주시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급박하게 내어주신
단 번의 제사입니다
그것도 제사이가 라는 모든 인간의 제사를 박살내시면서 말이죠

마리아와 한나가 이 끝을 봐버리니까, 이 종말을 누리니까
아이고 함량 미달인 이스라엘 치았뿌라
새로 짖는 새이스라엘을 보고
신나게 이스라엘의 멸망을 외쳤듯이

의문은 가라
죄는 가라
그 정도로 죄를 미워하고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랑이 찾아와 버리니까

남의 눈을 의식해서 말씀 지키는
그런 함량미달의 새는 바가지 어서 뿌싸뿌고
마치 지난주에 주의 성전이 파괴되는 것처럼
그림자는 어서 물러가고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고
완료

앞으로 이루어 놓을 것이다 가 아닌
과거 완료형으로써의 종말을 당기는데 있어서

어서 주여 부흥케 해 주소서
어서 심판해 달라는 뜻이지
무식한 목사들 말처럼 부흥 곧 자기교회 확장을 말하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종말을 어서 빨리 펼쳐주소서 라고 기도하는 겁니다
그 정도로 종말을 봐버린
끝을 다 봐버린
원인 없는 결과를 다 봐 버린 자는
여유롭게 이 종말을 즐기며 노래하면 춤추면서
씹꼬 뜯고 맛보고 즐기면서

꺽으신 뼈로만 기뻐하는
종말이 기쁨을 누리는 겁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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