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불 타는 성전과 토기장이 (사 64, 8-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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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4 성전파괴와 토기장이 (사 64, 8-12)


주의 성실(진동)함을 요청하는 종말의 기도 (사 64, 1- 7)
이사야 2017 2020. 11. 22. 09:47
18-113 주의 성실(진동)함을 요청하는 종말 기도자 (사 64, 1- 7)

〈이사야 64: 8-12, 개역한글, 구약성경 1045 쪽, 찬송가 344장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9) 여호와여 과히 분노하지 마옵시며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구하오니 보시옵소서 보시옵소서 우리는 다 주의 백성이니이다

(10) 주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으며 시온이 광야가 되었으며 예루살렘이 황폐하였나이다

(11) 우리 열조가 주를 찬송하던 우리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전이 불에 탔으며 우리의 즐거워하던 곳이 다 황무하였나이다

(12) 여호와여 일이 이러하거늘 주께서 오히려 스스로 억제하시리이까 주께서 오히려 잠잠하시고 우리로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리이까

(사 64:8, 새번역) 『그러나 주님, 주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님은 우리를 빚으신 토기장이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주님이 손수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사 64:9, 새번역) 『주님, 진노를 거두어 주십시오. 우리의 죄악을 영원히 기억하지 말아 주십시오. 주님, 보십시오. 우리는 다 주님의 백성입니다.』
(사 64:10, 새번역) 『주님의 거룩한 성읍들이 광야가 되었습니다. 시온은 광야가 되었고, 예루살렘은 황폐해졌습니다.』
(사 64:11, 새번역) 『우리의 조상이 주님을 찬송하던 성전, 우리의 거룩하고 영광스럽던 성전이 불에 탔고,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곳들이 모두 황폐해졌습니다.』
(사 64:12, 새번역) 『주님, 형편이 이러한데도, 주님께서는 그저 가만히 계십니까? 그렇게 잠잠히 계셔서, 우리가 극심한 고통을 받도록 하시렵니까?』
(고전 2:9, 새번역) 『그러나 성경에 기록한 바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한 것들, 사람의 마음에 떠오르지 않은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마련해 주셨다" 한 것과 같습니다. / ㉤사 64:4』


주님께 경배드리세 주님 앞에 나와 모두 무릎 꿇고
주님께 경배드리세 주님 앞에 나와 모두 무릎 꿇고
그는 나의 하나님 우린 그의 기르시는 백성
그의 손의 양이라 그의 손의 양이라

가스펠에서 자주 불렀던 가사가 오늘 본문을 보고 생각이 났습니다
지금은 가스펠을 거의 부르지 않다 보니
그때 무슨 의미인줄도 모르고 그저 음가락이 좋아서 불렀었죠

그의 손의 양이라 라고 고백하는 것은
경배드릴때에
무릎 꿇을 때에 나온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성경에 들어가 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경배 가 아니였던 거죠
마치 내가 대상물로 삼아서 경배 드리는 방식은 대부분 우상적인 제사였던 겁니다
그래서 가스펠 찬양 조차도 오락게임처럼 불렀던 거죠

마치 이제 이단들의 사람들을 흥분시키고 끌어모으는 삐끼 라고 하나요?
손님을 끌어모으는 호객꾼 이라고 검색이 되네요

어떤 목사는 성가대 지휘자를 모시기 위해서 호텔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첫인사를 한다 라고
평상시 지론이 이 성가대에 의해서 교회가 부흥이 되냐 마느냐 라고
한 부분을 크게 차지 한다고
그러니 귀한 사람 모시듯이 해야 한다 라는 지론을 가지고서 모신다 라고 하더라구요

과연 찬양이 바로 그런 눈에 보이는 교회의 부흥을 위한 도구로써 사용하기 위함이겠냐 말이죠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그의 손의 양이라

(8) 그러나 여호와여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라

주의 손으로 지은 것이라 라는 말씀은
인간 쪽에서의 숙제를 거부하겠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대해서 앞의 글 에스겔에서의 애굽왕의 창조주라고 우기는 모습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껍데기 거룩 곧 지옥 갈 자의 대표성을 

오히려 까발리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주의 손으로 지은 피조물은 주님의 대상물이지
인간의 대상물이 되는 말씀이 아니다 라는 겁니다

율법을 뭐 지키겠다고요? 지 키 겠 다 고 요?
율법은 인간의 대상물이 될 수가 없어요
말씀을 지키겠다 라고요? 
말씀은 인간이 지켜주길 바라는 대상물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 말이죠

일주일에 한번씩 용돈 던저주고 더 이상 1주일 동안 간섭하지 말라고
시어머니를 가두는 식의 말씀지킴 주일성수라는 것은 껍데기 거룩이다 라는 거죠

진짜 거룩은 바로 일곱
즉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을 이 둘을 합쳐서
하나님의 의 이라고 합니다
잃어버렸다가 다시 되찾는
불에 다 태워 죽였다가 다시 남겨둔 남은자만 구원하는 식이
바로 하나님의 구원이다 라는 겁니다.

(사 10:22, 개역) 『이스라엘이여 네 백성이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돌아오리니 넘치는 공의로 훼멸이 작정되었음이라』
(사 10:23, 개역) 『이미 작정되었은즉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온 세계 중에 끝까지 행하시리라』

(롬 9:20, 새번역) 『오, 사람아, ㉫그대가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 ㉫실제의 특정한 인물을 지칭하는 대명사가 아니라 가상의 논쟁 상대자를 지칭하는 대명사임 ㉬사 29:16; 45:9』
(롬 9:21, 새번역) 『토기장이에게, 흙 한 덩이를 둘로 나누어서, 하나는 귀한 데 쓸 그릇을 만들고, 하나는 천한 데 쓸 그릇을 만들 권리가 없겠습니까?』
(롬 9:22, 새번역) 『하나님께서 하신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심을 보이시고 권능을 알리시기를 원하시면서도, 멸망받게 되어 있는 진노의 대상들에 대하여 꾸준히 참으시면서 너그럽게 대해 주시고,』
(롬 9:23, 새번역)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롬 9:24,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롬 9:25, 새번역) 『그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 ㉭호 2:23』
(롬 9:26, 새번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 ㉠호 1:10 ㉡그, '아들들'』
(롬 9:27, 새번역) 『그리고 또 이사야는 이스라엘을 두고 이렇게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사람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 ㉢사 10:22; 23』

(롬 9:6, 개역)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롬 9:7, 개역)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칭하리라 하셨으니』
(롬 9:8, 개역)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롬 9:9, 개역)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라 명년 이 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라』
(롬 9:10, 개역) 『이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롬 9:11, 개역)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에게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롬 9:12, 개역)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롬 9:13, 개역) 『기록된 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롬 9:14,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롬 9:15, 개역)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롬 9:16, 개역)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19, 개역)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롬 9:20, 개역)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롬 9:21, 개역)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롬 9:23, 개역)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24, 개역)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뿐 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롬 9:25, 개역)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롬 9:26, 개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곳에서 저희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롬 9:27, 개역)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 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롬 9:28, 개역)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롬 9:29, 개역)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 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롬 9:32, 개역)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
(롬 9:33, 개역) 『기록된 바 보라 내가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즉 앞의 글 마태복음의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왜 지옥가는 대표성으로서 언급이 되느냐 하며는
바로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지 않고 자기 의를 의지하는 행함을 의지했기에
부딪히는 돌에 부딪혔다 라는 겁니다.,

그럼 천국가는 대표성은 누굽니까
바로 이방인으로써 아무것도 행한 것이 없이(즉 상대적인 막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염두한 거죠)
의를 쫒지 아니한 이방인이 오히려 의를 얻었는데
믿음에서 난 의이다 즉 주님의 대상물이 되었다 라는 겁니다.

즉 의를 좇은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했다 라고 합니다

(롬 9:30, 개역)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롬 9:31, 개역)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즉 좇았다 라는 말은 자기 숙제를 했다
대상물로 삼았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쭐꾸덕 미끄러지면서 나 너의 임금 되기 싫다 라고 도망칩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는 나의 임금이 되어주세요 라고 이방인이 요청도 하지 않았는데
임금이 너는 나의 백성으로 삼겠다 라고
임금이 백성을 대상물로
토기장이가 진흙 토기를 대상물로 삼아서 인간의 선택권을 피해 가시더라 라는 겁니다.

(롬 9:23, 새번역) 『영광을 받도록 예비하신 자비의 대상들에 대하여 자기의 풍성하신 영광을 알리시고자 하셨더라도, 어떻다는 말입니까?』
(롬 9:24, 새번역)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되, 유대 사람 가운데서만이 아니라, 이방 사람 가운데서도 부르셨습니다.』
(롬 9:25, 새번역) 『그것은 하나님이 호세아의 글 속에서 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을 '내 백성'이라고 하겠다. 내가 사랑하지 않던 백성을 '사랑하는 백성'이라고 하겠다." / ㉭호 2:23』
(롬 9:26, 새번역)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다' 하고 말씀하신 그 곳에서, 그들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 ㉠호 1:10 ㉡그, '아들들'』

결국 인간이 생각한 창조주 개념을 다 요리 조리 피해 가심으로써
인간의 구원론도 다 피해가고
창조론도 다 피해가고
오로지 주님 쪽에서의 창조주 되심을 펼치실때에

다 죽였다가 다시 살리시는 남은자 개념으로써
자신의 구원을

저 애굽왕의 구원론과 차이를 벌리시고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라고 애굽왕이 창조주라고 토기장이 라고 우기는 모습과 대조를 이루시면서)
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구원론인 의로운 행함과의 차이로써 창조주 너 모르지 알려줄게 라고
그 차이로써 믿음에서 난 의를 펼치실때에

모든 입술과 무릎이 주님께 경배 드리더라 말이죠
어디에? 십자가 앞에서 말이죠

정작 유대인이 구원론은 십자가가 아니였기에
졸지에 구원론이 차이가 나 버리는 겁니다

그럼 저 유대인은 이방인에게 펼쳐진 구원과 다르다 라고 또 우길테니
그들의 뿌리는 결국 행함 곧 자기 의가 되고

예수님의 구원의 뿌리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 외에 한 의 곧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단번에 다 사해버리시는 의입니다

이것을 유대인들은 단번에 다 드려버리면
유대인 종교가 해체가 되고
회당 운영비가 없어서 쫄딱 망하게 되더라 말이죠
코로나 덕분에 전도사들 다 짤라야 하고
순땡음처럼 사 뒀던 땅을 다 팔아야 만 한다 말이죠
즉 망한다 말이죠
망하면 안된다 내 행함으로 내 손으로 지었다 라고 나와야 하거든요

네 맞아요 손입니다 손
누구 손으로 짖느냐
토기장이의 권한은 토기장이의 손에 달렸는데
저 마다 자기 손으로 지었다고 나서는 순간
그 자는 애굽왕 바로왕처럼 창조주의 자리에서
또 선악 선악
자기가 창조주처럼 귀한그릇 천한그릇을 지멋대로 나눈다 말이죠

그럴때에
예수님이 졸지에 진노의 그릇으로 와 버리시니까

인간의 손으로 지은 토기가 졸지에
아무도 자신을 진노의 그릇으로 놓지 않는 판국에서

위선
거짓
가짜 권력이 다 들통나 버리더라 말이죠

주의 오른손이 나타났다 즉 구원의 손이 나타났다 라는 말은
다말처럼 불 속에 들어가서
너희들을 불 속에서 끄집어내시는 구원인데 구원의 손인데
정작 우리 손은 예수님을 불 속에 집어넣기에 바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 바빴다 말이죠
아 그런데 고맙게도 그 손이 그 불태워 버리고자 불 속으로 집어넣은 손이
내 손이였다 라는 거죠

내가 내 손을 십자가에 못 박는 줄도 모르고 남의 구원의 손을 못 박는줄 알았다 라는 거죠
 
자기를 높이는 자 낮아지겠고
자기는 낮추는 자 높아지는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겠고
자기 목숨을 얻고자 하는 자는 잃는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모든 종교에서 있는 그런 덕담이나 지혜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헬라의 지혜에 해당되기에
어리석고 미련한 십자가와 무관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겸손 즉 껍데기 인 거죠

그렇다면 성경에서의 의미란 종말에서 보는 의미 이다는 겁니다
즉 이전 것은 다 사라진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새 것이 있기에
더 이상 이전 것에 
사라질 것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 라는 겁니다.

자기자리가 있을 필요가 없다 라는 거죠
그러니 내 숙제는 없고
오로지 예수님의 숙제의 대상이 되는
십자가가 들통내는 원수로써 드러나는 삶 밖에 없는 겁니다

내가 움직이는게 아니라 내가 말씀을 지키는게 아니라
말씀이 나를 가지고 다루시며 지킨다는 겁니다.



즉 나의 자리가 날라가 버린 오로지 맡겨진 삶 이라는 종말의 삶 뿐이다는 겁니다
끝에서 주어진 삶 뿐이다는 거죠 곧 용서 뿐입니다

이것에 반발하는 자들이 바로
토기장이에게 힐문 하는 자입니다.
(놀랍게도 지난 주에 종말의 기도자에 대해 나누면서
아 그래서 히브리서 10장의 믿음의 사람들이
분명 구약에서는 도망쳤다 라고 기록해 놓고서는
히브리서는 도망치지 않고 애굽왕과 맞섰다 라고 노골적으로 대놓고서
거짓말처럼 기록했다 말이죠
이것은 역사의 시선에서는 거짓말 곧 속이는 자 같으나
종말의 시선에서는 참말이다 라는 겁니다
어떻게 거짓말이 참말이 될까요?
믿음 곧 종말의 믿음 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편파해석 편파 부조리 편애 십자가 스캔들)

(히 11:27, 개역)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임금의 노함을 무서워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으며』

(히 11:29, 개역)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히 11:23, 새번역)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믿음으로 그 부모는 석 달 동안 아기를 숨겨두었습니다. 그들은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 ㉭다른 고대 사본들에는 다음 내용이 첨가되어 있음. '믿음으로 모세는, 어른이 되었을 때에, 이집트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가 자기 백성(그, '형제들')의 굴욕 당하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출 2:14, 개역)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모세가 두려워하여 가로되 일이 탄로되었도다』
(출 2:15, 개역)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 곁에 앉았더라』

(행 7:27, 새번역) 『그런데 동료에게 해를 입히던 사람이 모세를 떠밀고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를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느냐? / ㉤출 2:14』
(행 7:28, 새번역) 『어제는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오늘은 또 나를 그렇게 죽이려 하는가?'』
(행 7:29, 새번역) 『이 말을 듣고서, 모세는 도망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거기서 그는 아들 둘을 낳았습니다.』

(행 7:29, 개역)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으니라』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의 설교에서도 도망 도주 라고 나오잖아요 zzz
즉 종말의 해석이란 원인 없는 결과입니다
주님의 숙제가 곧 믿음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기록했다 그럼 게임 오바 인 거죠

십계라는 영화에서도 얼마나 원망하든지 믿음으로 안 건넜어요
마지 못해서 건너요

분명 구약에도 원망하더라 라고 나와요
그런데 왜 신약에서는 믿음으로 건넜다 라고 했을까요?

오히려 애굽이 쫓아온 것이 원망도 하게되었지만
도리어 안 건너고는 못배기도록 했다 말이죠
앞 뒤 모순 밖에 없어요 다 얼룩이다 말이죠
이 공백을 무슨 수로 해석하냐 말이죠
해석 되면 그게 가짜인 거죠

네 일방적인 편파해석으로 카파르(덮다) 저들의 허물을 다 덮은 믿음으로 해석하시는 겁니다
믿음으로 건넜다 라고 믿음으로 해석해요
모든 것이 믿음 곧 주께로 와서 주께로 말미암아 주께로 돌아가는 해석인
종말의 해석만 해요 글쎄

마찬가지로
다 불태워 죽였는데 그 다 타버린 죽은 나무에서
남겨둔 한 씨 덕분에
남은자가 나와요

죽음 속에서만 나오는 남은자 곧 종말에서만 나오는 새언약의 피조물 증상물이다 라는 겁니다.

남은자만 돌아온다
이것이 토기장이의 권한이다 말이죠

여기에 이스라엘도 반발하고
즉 따로 꼬불쳐서
자기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들에게서는
이 남은자가 나오면 안되거든요

아니 자신들이 남은자 운동을 펼쳐요 글쎄
주님이 토기장이 인데
자기가 자신을 토기장이로써 자신을 긍휼의 그릇으로 만들겠데요 글쎄
이것이 행함이다는 겁니다

그래 그럼 믿음으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보라 말이죠
토기는 굽는 것이거든요

오래 참았다 라고 하십니다
토기가 아니라 토기장이가 말이죠

(롬 9:22, 개역)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누구죠
그 윗 구절의 애굽왕 바로 왕입니다

(롬 9:17, 개역)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롬 9:18, 개역)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강퍅케 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애굽왕은 앞의 글 에스겔에서 언급했듯이
창조주를 거부하는 창조주의 자리인 강퍅한 자리에 앉도록 되어 있는
지옥 갈 자의 대표로 다루어졌고

또 앞의 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몰고온 천국에 의해서
지옥 갈 자의 대표성으로써 강퍅한 애굽왕처럼
완악한 수건을 벗지 않고
단번에 드린 제사를 거부하고 여전히 제사와 번제를 고수하는
믿음을 거부하고 행함을 주장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저주를 통해서도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은 것을
심판 하시더라 말이죠

그리고 행함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오로지 믿음으로써만 나오는 남은자가
이방인에게서도 나오는
주의 이름을 부른적 없는데 부르신바 되고
주를 찾은적도 없는 주의 이름 조차도 몰라요 모르는데 찾으신바 되도록
주님이 그들을 대상물로 삼았다 말이죠

그러니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 하는 자로 말미암은도 아닌

오로지 주님의 숙제인 예수님의 믿음으로 난 의 이다는 겁니다

이것을 로마서 4장에 다윗이 아브라함을 보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다 라고 합니다

종말의 믿음 곧 이삭이 죽음으로 아버지가 나음을 입는
인애와 자비를 
종말의 단번의 제사인 십자가를 봤다 말이죠

의문의 반복인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
남을 7번 용서하기 라는 의문이 아니라

또렷한 십자가가 밝히 보이는 단번의 제사 말이죠
또 다윗이 그렇게 아브라함을 보고 믿음이 벌린 대상물이 된 아브라함고
그 아브라함을 보고 용서 받은 것을 기뻐하면서
다윗 자신도 용서 받은 것을
다시 사도바울을 천하의 일급 살인자로써 또 용서받은
그 십자가의 대상물이 되었다 라는 믿음의 숙제의 대상이 된 것에
기뻐하는 복음을 외쳤듯이

그 어떤 조건이나 
원인
연결점
일체 없이 이방인이 호세아의 예언처럼
남은자에 속하게 된다는 것은

믿음에서 난 의
예수님 에게서 난 의가 아니고서는

율법으로써는 안 되는

율법 외에 한 의로써 난 것이다 라는 겁니다

여기에 율법을 대상물로 삼아버린 이스라엘이 힐문 할 수 밖에 없고
반박하고 거부할 수 밖에 없는 거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애굽왕 바로왕을 오래 참고 참아서 심판했듯이
너 힐문하는 자 너 또한 오래 참았다 라는 것을 또 무시하냐 말이죠
그저 그저 자신의 의
말씀 지켰다
어릴적부터 다 지켰다는 둥 (부자청년 아 오랜만에 나오넹 ~~~ 다는 둥~~~)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는 둥 (탕자의 형 맏아들)
십의 일조 이레에 두 번 금식 저 세리처럼 세금갈취하지 않았다는 둥

이것이 배설물을 가지고 와 놓고서는(모잘라 모잘라 함량미달 666)
거룩이다 라고 우기면서 구원해 달라고 하는 판국에

주님은 전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는
죽은 자를 살리는 금식, 율법의 완성, 자기 목숨 내어줌(이웃사랑)
이라는 산 자의 하나님
곧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닌 산 자의 하나님을 증거해 보라 라고 했을때에
저들은 죽은 자의 하나님 밖에 내놓지를 못하더라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러합니다
이사야 곧 기도자는 걱정 합니다
솔로몬에게 약속하시기를 성전을 통해서만이 보호하시겠다 라는 약속이
보장해 주고 있었는데
그 성전이 불타고 있는 입장에서
더 이상 성전이 중간의 뭐였죠 매개자
아닌데
단어 갑자기 까먹었네

아 중보자 의 기능을 했는데
성전이 불타 버림으로 인해서 성전이 없기에 더 이상 중보자의 기능이 없게 되면
이스라엘은 누가 위로해 주냐 라고 말이죠

그래서 8절에 아버지 라고 토기장이의 의미로써 아버지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토기장이요 우리는 토기 라는 관계는
로마서 9장에서 나타납니다

진노의 그릇과 긍휼의 그릇의 차이로써
토기장이 되심을 나타내시는데 있어서

마치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나타냄에 있어서
맏아들은 도리어 아버지와의 관계성에 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거죠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 곧 긍휼을 보여주고 있고
그러나 맏아들은 아버지 율법을 지켰다 라고만 내세울 뿐이지 의에 이르지 못하다 보니
도리어 탕자를 용서하시는 그 긍휼에 반박 하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여기서 누가 힐문하느뇨 라고 하시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누가 반박하느냐 라는 겁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행함으로 된 관계 입니까
아니면 인애와 자비로 된 관계 입니까

아니 세상을 법으로 창조했나요 아니면 은혜로 창조했나요

토기장이 곧 아버지는 두 그릇으로써 자신의 창조주 되심을
토기장이 되심을 나타내는데 있어서
두 아들
두 언약
두 그릇이 동원이 되는 것에 있어서
그릇이 왜 나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들었느냐 라고 반발할 수가 없도록 되어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반박하는 애굽왕과 같은 강퍅함을 드러내도록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고 주님 손해 보시는 것 없습니다
오히려 창조주가 누구인줄 도리어 더 잘 보여주시는 심판성을 펼치시니까 말이죠

일곱 이라는 완벽한 심판과 완벽한 거룩
이 앞뒤 모순 되는 공백을 펼치시는데 있어서
더 잘 된 셈인 겁니다.

누구 하나는 악역을 해야하는데 서로 자기가 감독인냥
왜 나를 악역으로 맡기냐
주인공으로 만들어라 라고 하면
감독은 왜
말라꼬
있냐 말이죠

자신이 진노 받아야 할 그릇임을 모른다는 자체가 진노의 그릇의 특징이다는 겁니다

반면에 긍휼의 그릇은
그 진노 속에 함께 거하면서도
아버지 라고 토기장이를 부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기 직전까지도
아버지 아버지 라고 불렀듯이
이 관계성을
심판 속에서 부르짖는 겁니다

자신이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서 반박하는게 아니라 말이죠

그래서 악인은 이 심판을 건디지 못하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의인은 이 주의 성실하심으로 펼쳐지는 이 심판을 통과 하여서
주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아침을 맞이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저들은 아들의 혼인잔치에서 쫓겨나서 어두움 속에서 이를 갈며 울부짖는
밤을 통과하지 
심판을 통과하지 못하는 하이에나처럼 늑대처럼 울부짖으면서
채워도 채워도 먹어도 먹어도 계속해서 배고픈 
그 지옥과 같은 밑빠진 장독대처럼 감사함이 없이
배고파 울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여기에 그 심판이라는 죽음 속에서도 긍휼을 베푸시는 그 은혜에
감사하면서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아버지의 사랑
토기장이의 긍휼의 그릇 만드시는 대상물로써의 증상을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거죠

탕자는 아버지의 용서 외에는 구원이 없다 이고
맏아들 곧 지옥 갈자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아버지 말씀을 단 한번도 어긴적 없는
껍데기를 지키는데 몰두 하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는 뭘 해도 사랑 없는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치중할 뿐이지
알먕이 없는 것이 상한심령 통회하는 심정
아까 에스겔 글에서 뭐라고 적었더라 ~~

아 자복

우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우는 자

이 잃어버림이라는 주님의 의 속에

예수님 자신 조차도
그 잃어버림 속에서
하나님의 의로 다시 살려내심을 당하는
대상물
하나님 곧 토기장이의 대상물이 되더라 라는 겁니다.

온전히 맡겨져버린

아니 십자가에 달려 죽는 예수님을 보고서
나의 구원을 챙긴다 라는 것이 말이 되냐 말이죠

아들이 죽는데 욥이 옆에 있어본들
다니엘이 옆에 있은들
노아가 옆에 있서본들
내 혼자 구원 받아 본들
그거 다 껍데기 이다 라는 겁니다

진짜 구원은 아들이 구원 받는 겁니다
그래서 주께서 내 주께 라고
다윗은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 라고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그런 자기 의 쌓기
율법 지키기에 더 이상 손을 대지 않고 떼어버립니다

아들이 죽는데 그게 무슨 소용이 있냐 말이죠

그 동안 구원 받기 위해서 축척해 놓은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고요
십의 일조 내었구요
이레에 두 번 금식했구요

그 껍데기
그 똥덩어리
그 배설물
다 털어버리고

오조리 탕자로써 아버지의 용서만을 바라는
그 심판 속에 들어가는 겁니다.

주여 불쌍히 여겨 주소서 나는 죄인 이로소이다

성전이 불타 버린 입장에서
더 이상
중보해 줄 것이 없는 이상
이제 이스라엘은 아무리 율법 지켰다는 둥 뭐둥 다 우겨도
무조건 이유 없이 탕자가 된 겁니다

네 맞아요 무지 무지 강조했죠
다윗 개인의 고백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으로 다윗의 운명 속에 집어넣어서

더 이상 율법으로 구원이 되는게 아니라(심판 밖에 없기에)
오로지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탕자는 용서 받는

탕자로써
긍휼의 그릇으로써 만들기 위해서
애굽왕 바로왕 강퍅한 자를 동원시키는데 있어서

어라 이스라엘 속에서 바로 이런 애굽의 바로왕처럼 힐문하면서 따지는
여호와가 누구관데 자기 멋대로 토기를 만드느냐 라고 따지는 놈이 있더라 말이죠

다 탈락입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아무리 율법 지키고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십자가의 피 용서를 거부한다면 무조건 탈락이다 말이죠

그리고 그 빈자리에 남은자로써
정작 남은자 운동을 펼치는 렘넌트 Remnant 운동가들인 서기관 바리새인 등등의 유대인은 정작 남은자가 되지 못하고

남은자가 뭔지도 모르는 즉 대상물로 삼아서 실천한 적도 없는
도리어 남은자라는 약속이
이방인을 곧 남은자가 뭔지도 모르고 주의 이름도 모르고 찾은적도 부른적도 없는
이방인에게 주님의 자신의 의를 믿음을 선물로 주어서
대상물로 삼어버리니
남은자로써 주께로 돌아와서
무릎 꿇고 경배 드리더라 말이죠

남은자 운동을 하는 유대인은 무릎 꿇지 않고 경배 하지도 않고 말이죠

이 팔의 어긋남이

바로 주님이 토기장이로써 직접 대상물로 삼았다는 사실

인간이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아서 믿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자기 의 쌓기이고
하나님께 열심히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 곧 사랑을 모르고
울리는 꽹과리 였다는 거죠
달그닥 달그닥 거리는 무기 소리
나 십의 일조 했다 꽹과리 달그닥
나 이레에 두 번 금식 했다 꽹과리 달그닥
나 남을 7번 용서 했다 꽹과리 달그닥

아니 이런 의미를 분면히 이야기를 대 놓고서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분의 후배가 도리어 더 대 놓고서
자기가 차를 몰고가다가 쓰레기 박스를 주어다 파시는 어르신을 도와주었다 라고
대 놓고서 인증샷까지 올려가면서 자랑하는 것을 보고
우와 나 보고 엿먹어라 라고 대놓고서 반항을 하더라 말이죠 ㅋㅋㅋ

나 아버리 말씀 단 한번도 어긴적 없다 배설물
나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켰다 똥덩어리
나 율법 네 배나 갚으라 라는 바른 판결 바른 재판을 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

자 이런 것들을 그 동안 얼마나 성전에 도배를 했냐 말이죠

치매 걸린 할머니처럼 온 벽에다가 똥칠을 하듯이 말이죠 성전 벽에 까까득

그래서 성전에 불을 주님께서 지르시는 겁니다
눈에 더 이상 의지할 것 없는
빈털터리로 만들기 위해서 말이죠

그 어떤 연고나
그 어떤 구원 받을 끈덕지기를 다 없애 버리는 겁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매개물 자진철거입니다
아웃소싱 용역꾼 앗수르 바벨론 불러와서 철거해 버리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회개 눈물 금식 기도로 아이를 살려 보겠다 라는
그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라는 4종 세트를

더 이상 통하지 않도록 자진 철거할때까지
니 행함에서 나올수 있는거 다 해보라 다 짜내어 보라
아이를 살릴수 있는지를

그래서 성전 불때워 버리듯이
회개 눈물 금식 기도 날려 버리시는 겁니다

오로지 꺽으신 뼈 로만 기뻐하는 복음만으로
십자가의 피 용서가 아니면 구원이 없도록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는 끝까지 안됩니다
절대로 십자가 지시면 안됩니다 라고 거부했다 말이죠

왜 내가 아버지 곧 토기장이에게 모든 권한을 맡기는데
니가 와 안되니 되니 마니 하냐
사탄아 썩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뜨리는 자다
하나님의 일을 생가지 않고
즉 토기장이의 권한을 생각지 않고
니가 뭔데 왜 나를 진노의 그릇으로 만드느냐 라고 힐문하고 따지냐
나는 십자가라는 하나님의 저주 받을란다

그 어떤 중간 매개체물
중보자
그 어떤 눈에 보이고 만지작 거릴수 있는 그 어떤 중간물을 다 없애 버리시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오로지 믿음 그것도 내 믿음이 되어버리면 이것은 또 중간 매개자 노릇을 한다 말이죠
즉 행함이지요

믿음이란 외부에서 오는 선물입니다
즉 이 말은 내 쪽에서는 아무것도 나올수 없는 단절의 상태이다는 거죠
성전이 불타는 것처럼

그로 인해 이사야는 절망한다 말이죠

아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안 버리면 또 우상숭배 하거든요
예수님마저도 임금 삼아서 자기 배를 채우는데 자기 배를 위하여
자기를 위한 우상으로 말이죠

그래서 구원의 근거가 되었던 성전(죄에서 더러움에서 거룩으로 이동시켜주는)을 파괴하심으로써
우는 자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이 아바 아버지여 라고 우시듯이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것이 
그 구원의 근거가 된 성전을 불사름 조차도 아버지의 뜻이지
나의 뜻이 아님을 알게 하십니다

아바 아버지여 하실수만 있다면 이 잔을 나에게서 옮겨주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즉 내 눈물 기도 회개 금식으로 아이를 살려주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이 뜻에 맡기겠습니다 라고

맡겨버리는 삶

물에 안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지니까

회개 눈물 금식 기도를 자진 철거해 버리니까

꺽으신 뼈로 기뻐하는
외부에서 주시는 선물
여디디야 여디디야 여디디야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꼬끼오 곱하기 세 번

더 이상 타락이 없이
도리어 음부의 권세 속에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교회를 세우심으로써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
사람의 손으로 짖지 않은 성전
그 기능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 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완성 하신 겁니다

이 혼인잔치를 결혼잔치를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사랑을 다 이루었다 말이죠

자기 의를 쌓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는
저 이방인들처럼 도로 이스라엘이 이방인을 따라 해야할 정도로
처음사랑을 다 이루신 것이다 말이죠

이 완벽한 심판이자 완벽한 거룩인 일곱으로 인해서
완벽한 심판으로 인한 완벽한 절망 속에서
나는 더 이상 구원 받을 자격이 아예 애초부터 없었음을 절망하게 됩니다

회개 눈물 기도 금식
자진철거입니다

이 나의 회개 눈물 금식 기도도 안 먹히는 그 절망 속에서
요나처럼 큰 물고기 뱃속
스올
무저갱 속에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의 길이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그 완벽한 절망을 아버지 곧 토기장이가 주셨기에 말이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이 버림받음 속에
우리 또한 동참케 하심으로써

완벽한 죽음 속에서
다시 되찾는 남은자가 돌아오리라를 우리가 아닌
주님이 이루시는 겁니다

이 다윗의 운명에 이스라엘 전체가 나 몰라라 하고 딴 그릇인냥 따로국밥처럼 놀수 없도록
역사를 그런 소용돌이 속에 집어넣듯이

이제 이 예수님의 운명속에 주님의 자녀 또한 같은 운명과
같은 한 몸으로써
동행케 하시는 겁니다.

지금 보니 성령은 개방이지 단절이 아니다 라고 했던 자들을 보면
주님의 운명은 아무도 안 보이고

그저 보이는 것은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만 남아서
대 놓고 자랑질 하는 모습을 보니

아무리 천재니 뭐니 해도
지옥갈 자로써
자기도 천국 안가고
남도 천국 못가도록 가로 막고
얼마나 또 전도는 열심인지
두루 두루 온 동네 싸돌아 다니면서
백배나 지옥 자식으로 만드는 것을

아니 이 말씀 그대로 지금 현재도 보여주신다는 자체가 얼마나 소름이냐 말이죠

아 그래서 아직도 안 죽이시고 그거 보라꼬
너도 그랬었다
저 지옥 갈 자 인 저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라고
이상하다 죽이실 때 벌써 넘었는데 왜 안 죽이시는지

아 감사하라꼬
아니 구원 받을 자격이 없다니깐요

구원 포기 했어요
아 그런데 왜 주님은 안 포기 하시는지
이해가 안 된다 말이죠

병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에게 뭘 기대 하실려고 말이죠
자신의 숙제를 마구 마구 심어버리시겠다 라고

의도적으로 모든 것을 빼앗았다는 것이다 말이죠

이 시기와 질투의 사랑이 아니였으면
우리는 벌써 소돔과 고모라였을 것이다 말이죠

이 죽음 속에서만
아무것도 없는
무화과 나무 잎이 마르고
이 손에 아무 증거 없고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모든 것이 다 날라가버린 상태에서

난 여호와로만 즐거워 한다 라는 요나의 표적
꺽으신 뼈로만 기뻐한다 라는 다윗언약

이 십자가의 피용서만 옳았다 라는 십자가라는 새 언약
하나님의 일을

나의 자리가 날라감으로써 비로서 침략해 오신다는 것에
이 천국의 침략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기뻐하시면 됩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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