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포도송이 즙과 기업 (사 65, 8-12).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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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6 포도송이 즙과 기업 (사 65, 8-12)


이방인을 구원하시는 질투의 하나님 (사 65, 1- 7)
이사야 2017 2020. 12. 5. 22:39
18-115 이방인의 구원으로 이동하는 주의 이름 (사 65, 1- 7)

〈이사야 65: 8-12, 개역한글, 구약성경 1045 쪽, 찬송가 205장 예수 앞에 나오면, 455장 주 안에 있는 나에게〉

(8)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포도송이에는 즙이 있으므로 혹이 말하기를 그것을 상하지 말라 거기 복이 있느니라 하나니 나도 내 종들을 위하여 그같이 행하여 다 멸하지 아니하고

(9) 내가 야곱 중에서 씨를 내며 유다 중에서 나의 산들을 기업으로 얻을 자를 내리니 나의 택한 자가 이를 기업으로 얻을 것이요 나의 종들이 거기 거할 것이라

(10) 사론은 양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1) 오직 나 여호와를 버리며 나의 성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베풀어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너희여

(12) 내가 너희를 칼에 붙일 것인즉 다 구푸리고 살륙을 당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지 아니하며 내가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고 나의 눈에 악을 행하였으며 나의 즐겨하지 아니하는 일을 택하였음이니라

〈요 15: 1-27, 개역한글, 신약성경 174 쪽〉

(1) 내가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그 농부라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3) 너희는 내가 일러 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6)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9)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 65:8, 새번역)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포도송이에 즙이 들어 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없애지 말아라. 그 속에 복이 들어 있다' 하고 말한다. 나도 이와 같이 나의 종들을 생각하여, 그들을 다 멸하지는 않겠다.』
(사 65:9, 새번역) 『내가 야곱으로부터 자손이 나오게 하며, 유다로부터 내 산을 유업으로 얻을 자들이 나오게 하겠다. 내가 택한 사람들이 그것을 유업으로 얻으며, 내 종들이 거기에 살 것이다.』
(사 65:10, 새번역) 『샤론 평야는 나를 찾는 내 백성이 양 떼를 치는 목장이 되고, 아골 골짜기는 소들이 쉬는 곳이 될 것이다.』
(사 65:11, 새번역) 『그러나 나 주를 떠나서, 내 거룩한 산을 잊고, ㉠갓에게 상을 차려 놓으며, ㉡므니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부어 바치는 자들아! / ㉠행운의 신 ㉡운명의 신』
(사 65:12, 새번역) 『내가 너희를 칼에 죽는 신세가 되게 하겠다. 너희 모두가 살육하는 자에게 몸을 구부리게 될 것이다. 이는 내가 불러도 너희가 대답하지 않으며, 내가 말하여도 너희가 듣지 않으며, 너희가 내 눈에 악하게 보이는 일만을 하며, 내가 좋아하지 않는 일만을 골라서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든 활동에는 열매를 목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앞의 글 마태복음에서는 십일조 곧 맏물 장자가 바로 기업이 되는 거죠

기업이 없다 라는 것은 이제 발을 붙일 곳이 없게 된 겁니다.
고아 과부 나그네처럼 말이죠
한 마디로 말해서 죽은자 인 거죠

그런 자들에게 온전한 십일조 되신 곧 기업 유업이 되신
고아에게는 아버지가 되고
과부에게는 새남편이 되고
나그네 에게는 임금이 되어주시는
고엘의 하나님 곧 기업이 되어주시는 기업을 물려줄 자가
바로 온전한 십일조 곧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미쁘신
믿음직 스러운 
믿음으로 죽은 자를 살리는 온전한 십일조 곧 열매요 기업이다 라는 겁니다.

네 맞아요 열매를 통해서 그 나무를 안다 라고 했잖아요

그 사람의 주가 누구인가를 통해서
그 사람의 임마누엘을 통해서 여호와가 누구인지를 아는 겁니다

그런데 남유다 왕 아하스 왕 조차도 임마누엘을 안 구해요
그 일만달란트가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 것과 같다고 보는 겁니다.
젖먹이가 뭐 이 전쟁의 상황에 맞기는 맞냐 라는 거죠
소년 다윗을 쫒아내야 하는 겁니다
골리앗을 무슨 수로 물리치냐 말이죠

그들에게는 오로지 큰 의미는 저 애굽과 손 잡느냐 안 잡느냐에 달렸다 라고 보는 겁니다.
전쟁의 승패를 말이죠
사느냐 죽느냐를 말이죠

자 바로 이런 열매를 통해서 그들의 나무가 누구인지를 보는 겁니다
1300년 전에 죽은 애굽왕 바로왕 스스로 토기장이라고 우기는
최초의 인간
그 인간의 나무의 열매인지

아니면 내 주는 강한 성이요 이 장수 누군가 라는 젖먹이 보다 강한자 없다 라는
보라 세상 죄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인지 이 어린양 나무의 열매 인지를 말이죠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고 

(요 15:5, 개역)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많은 열매를 맺는다 라는 말은 내 쪽에서 열매 맺는게 아니라
주님 쪽에서 나를 열매 삼는 식으로 주님의 나무의 열매이다
그 신랑에 그 신부이다 오로지
신랑의 죽음으로서만 신부를 거룩케 하시겠다 라는
앞의 글 온전한 십일조 섬기는 희생의 일만달란트 라는 질투의 사랑으로써만
질투의 십일조로써만 맺는 열매 기업 유업이
나 여호와 다 라고 나오시는 분이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런 좋은 나무의 좋은 열매가 있다면
반드시 한 세트가 되는 악한 나무의 악한 열매가 있어야 겠지요

바로 시드기야처럼
큰 것을 버리는 자들 말이죠

온전한 십일조를 버리고
그 용어를 가지고 와서 종교오락게임으로 만들어서
누가 누가 이기냐 라는 싸움 붙이는 놈들 말이죠

그리고 애굽왕 바로왕처럼 모세의 자리에 앉는 놈들 말이죠
유대교 라는 종교오락 게임에서는 토기장이의 자리가 모세의 자리 이니까 말이죠
오죽하면 실로암 소경을 날 때부터 소경인자 죽은자를 고치니까
갑자기 너 3년 짜리 예수의 제자 이지
난 너 보다 커
난 1300년 짜리 묵은 모세의 제자야

앗 실수 그동안 앞의 글에서 1300년이 아니였네
에스겔 기준에서는 900년 곧 천년 인데
예수님 당시의 기준으로 적었네요 ㅋㅋㅋ 패쓰 통과

껍데기는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 라고 하지만 그래야
유대인들을 세뇌 시키잖아요
오늘날 목사처럼 말이죠
그런데 예수님이 겁도 없이 도발 하십니다
그게 바로 애굽왕 바로왕처럼 토기장이 자리에 앉은 것이다 라고
껍데기가 아니라 확 껍질을 벗기니
그들의 속내는 하나님의 자리인 창조주의 자리에 앉아버린 것이다 말이죠

하나님 너 까불면 죽어 라는 자리
그 놈의 말 실수가 아니라
한국 교회 목사들의 사고방식을 대변해 주고 있어요
무의식이 튀어나온 겁니다
집단적인 무의식이 말이죠
아무리 성화된 수준높은 성화론자라고 
저런 저급한 목사와는 비교 불가라고 우겨도 막상 격어보니까
다 이런 놈들 밖에 없어요

자기가 창조주요 토기장이야 글쎄

죽은자를 살리는 목사를 본 적이 없어요


오늘 본문에 포도송이에서 즙이 나온다 라고 했습니다

(사 65:8, 현대어) 『[남아 있는 의인들의 구원] 그러나 남아 있는 의인들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포도송이가 별로 탐스럽게 열리지 않았더라도 `덩굴째 모조리 없애 버리지는 말아라! 그런 포도 송이 속에서도 짜면 즙은 나온다'라고 농부들이 말한다. 그래서 나도 내 백성을 모조리 멸망시키지는 않겠다. 아직도 이스라엘 백성 속에는 변함없이 나에게 충성하는 사람들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기능은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겁니다
마치 오늘 본문을 앞앞의 글 에스겔의 이스라엘의 뿔과 연결이 되거든요

즉 열매의 끝은 뭡니까 바로 즙이 되고자 선별작업을 하는 타작마당이 되는 거죠
알곡처럼 좋은 열매는 곡간으로 곧 천국이지요

(마 3:12, 개역)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나쁜 악한 열매는 쭉정이처럼 불에 태워버린다 말이죠

그 선별 작업의 기준이 바로 요한복음 15장에서는 나 포도나무 인 예수 안
그리스도 안 이라고 하시는 겁니다.

나의 안에 거하면 좋은 열매 많은 열매 큰 열매를 맺고
나의 안에 거하지 않으면 깨작 깨작 장난치는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라는 나쁜열매 악한 열매를 맺는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아무도 이 임마누엘을 아무도 구하지 않아요
그저 인간들은 성전에 바친 금으로 드린 맹세를 지키는데 정신팔려 있다 라는 겁니다.

그 맹세가 뭐 겠습니까
네 맞아요 인간 또한 자신으로부터 출발하여서 좋은 열매를 맺고자 하는 목적이 있거든요

그게 바로 악하다 라는 겁니다.

아무리 선한 의지로 출발해도
끝을 모르고서 행하기 때문에 말이지요

온전하다 라는 온전한 십일조를 앞의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온전한 것은 믿음이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기뻐하심 이다는 겁니다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죄 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바로 나에게서 나오는 것은 종교오락 깨작 깨작 장난질 치는 것이고
오히려 믿음직 스럽고 미쁘신 믿음은
주님이 주신 선물이다 말이죠

자 그럼 누구 안에 거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온전한 열매가 나오겠냐 말이죠

사람들이 생각하는 좋은 열매는 정작 나쁜열매가 되었고
다들 무시하는 열매는 온전한 곧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가 되었다 말이죠

그러니 오늘 본문은 완전히 요한복음 15장 5절의 구조와 똑같습니다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 맺고
이것이 이사야 65장 8절에서 10절 까지이고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죽는다 라고
이것이 이사야 65장 11절에서 12절 까지의 내용이다 말이죠

즉 인간이 자기로부터 출발하는 누가 좋은 열매를 염두하고서 출발하지
누가 나쁜열매를 맺고자 출발하겠냐 말이죠
그런데 아무리 선한 의도로 출발해도
나 로 출발하면 무조건 악한 열매이다 라는 겁니다

그럼 좋은 열매란 무엇이냐
앞의 글에서 그 동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뭐뭐 라고 언급했듯이
종말의 뭐뭐
믿음으로 하는 뭐뭐 라고 했다 말이죠

그것이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뭐뭐 이다 라고
뭐뭐는 금식 기도 눈물 회개 등등 뭐든지 다 붙여도 되듯이 말이죠

아 하나 빠졌네
온전한 뭐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뭐뭐
믿음으로 하는 뭐뭐
종말의 뭐뭐 등등

그러니 이 기준이 바로 종말에서만 나타나는 딱 한 인물
그 인물에게 붙어있느냐 안 붙어있느냐 라는 기준으로 인해
좋은 열매냐 나쁜열매냐 로 판가름이 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내 쪽에서 출발하는 그런 의미는 애초부터 의미가 없어요

부자청년이 바로 그런 기준을 들고온 겁니다
어릴적부터 율법 다 지켜서 열매를 좋은 열매라고 자부합니다 라고 말이죠

그래? 그럼 전 재산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 라고 하니까
바로 나쁜 열매로 드러나더라 말이죠

죽은자를 살리지도 못하는
율법의 완성인 사랑이 아니다 라면
그 동안 어릴적부터 율법의 껍데기만 지켜왔다는 거죠

마치 성전에 바친 금으로 맹세한 것만을 지킬려고 했고
성전으로 맹세한 것은 아에 깡그리 무시했다 라는 겁니다
주님이 어떻게 이 약속을 성취하시는가에 대한 관심이 없고
자기가 율법 지키니 못 지키니 그것만 깨작 깨작 장난쳤다 라는 거죠

결국 좋은 열매를 만드시는 분은 나에게 있지 않고
이 분에게 달려 있습니다를 말하기 위해서
우리는 태어났다 라는 겁니다.

그럼 무엇이든지 구하면 다 이루어 진다 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24장로들은 면류관을 도로 반납할까요?
그것을 구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 아니겠냐 말이죠

그런데 막상 그 면류관을 받아 보니
내가 목소리 높여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쳤던
그 분이였다 라는 겁니다.

자 그럼 게임 오바입니다 끝에서 다시 봐야 합니다
면류관 받는 것이 큰 것 큰 영광 입니까
아니면 면류관을 반납할 정도로
안 타 죽는 것이 다행인
일만달란트 용서인
십자가의 피 용서의 십자가 영광이 큽니까
이미 목숨 값을 다 받은 판국에서 말이죠

무엇이 큰 줄 저절로 아니까 반납하는 겁니다.

즉 더더욱 성소 앞에 나아가는
주님의 십자가의 피 용서 앞에 나아가는
서로 사랑하는
이 관계 
사랑이 관계 이다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이 보기에 무시꺼리여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 번제를 원치 않고 단번데 드리신바 된 것은

큰 질투의 사랑
질투의 십일조 되심 이라는
그 사랑의 관계이다는 거죠

나를 버리고 나에게 붙어 있지 않는 자는
그럼 어떤 자입니다
지금 사랑이 중요하냐 일만달란트가 중요하냐
지금 당장 애굽과 손 잡지 아니하면
나라고 뭐고 국가고 뭐고
가족이고 뭐고
신앙이고 뭐고 다 날라간다
국가가 있어야 교회가 있든 말든 할꺼 아니냐 라고

모세의 자리를 앉더라 말이죠
남을 7번 용서하는 자리에 앉아요
네 앉는거 뭐 지 마음대로 이지요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7에 70번의 용서하심은 얼마나 무시했는가가 드러나는 거죠
아무도 이 예수 안에 거하지 않을려고 해요

아무도 예수님이라는 나무에 가지로써 붙어 있을려고 하지 않아요

다른 기준이 그들에게 있는 겁니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내 열매는 내가 직접 좋은 열매를 맺으리라

그러니 성전에 바친 금으로 맹세한 것을 반드시 지킬려고 하지
누가 돈까지 금까지 바치면서 맹세한 것을 무시하겠냐 말이죠

정작 가난한 한 과부는 전재산을 바치면서
어서 이 껍데기 성전 뿌쌋뿌고
성전에 바친 금으로 장난질 깨작 깨작 하는 짓 그만 없애버리도록 성전 뿌쌋뿌고
진짜 성전 
참 실상이신 성전
그림자 성전 말고 실상이신
온전한 십일조 되신
죽은 나 가난한 과부를 살리시는 예수님 오시라 라고
예수 안에 거하고자 
하나님이 기뻐하는 헌금
종말의 헌금을 하더라 말이죠
온전한 헌금 말이죠
죽은 자를 살리는 그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 되신 예수님을 바라고 있는데

인간들은 바리새인들은 성전 뿌수면 안된다
그 성전에 바친 나의 금과 같은 나의 정성 노력 온갖 충성들을 바쳐가면서 맹세했는데
그거 지켜지는거 보고 뿌쌌뿌라 라고 나온다 말이죠

성전의 의미를 그 큰 의미를 여전히 무시하고
예수 안에 거할려는 마음 추호도 없고

잿밥에만 관심 있더라 말이죠
예수님을 임금 삼고자 하는 이유가
먹고 배부른 까닭으로
자기 배를 우상화 할려고
예수님을 임금 삼겠다 라는 심뽀로 말이죠
예수님을 우상화 해요

결국 돈 되는 인간은 옆에 두고
돈 안되는 인간은 어서 죽어라 라는 식이다 라는 거죠

모든 인간 관계가 자기 유익이라는 우상으로만 소통 되는
짐승의 세계 666만 매매가 되는
말이 되는 것은 돈 밖에 없어요
돈이 들어가면 다 말이 되고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요

그런데 십자가의 죽음 곧 질투의 사랑이 들어가면
뚝뚝뚝 끊어지고 단절이 되고 소통이 되지 않고
매매할 수가 없어서 굶어 죽게 된다 말이죠

세상은 심지어 교회 조차도
애굽왕 바로왕이 소통한 토기장이 됨이 소통이 되지
말이 되지

여호와 하나님이 토기장이 되심은
예수님이 토기장이 되심은 말이 안된다고 규정해 버렸다 말이죠
십자가 이야기 하면
십자가 고만 캐라 마이 무따 아이가 이제는 부활을 이야기 해야 한다 라고
목사가 그 따위 소리를 해요
그런 껍데기 벗기면 그냥 돈 달라는 소리 예요

십자가는 돈이 안되고
부활은 돈이 되는 경험치가 쌓였거든요

부활이 큰 돈이 되기에
십자가는 굶어 죽게 될 판국이다 라는 거죠

일만달란트를 개 무시하고
천만원 띠 먹은 놈 찾아서 족치는 겁니다.
주변인들이 민망해서 고자질 한다 말이죠

남 7번 용서 하는 것만 의미 있고 가치 있고 좋은 열매 라고 우겼지
내 열심히 특심이오니 나만 남았다 라고 남은 나만 의미 있다고 우겼지

칠천명
7에 70번 용서는 개 무시 하는 것이 우리이다 말이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안 보이거든요

당연히 안 보이죠
예수 안에 거하지 않으니까 말이죠
즉 일곱 되신 심판의 주이시자 구원의 주 에 거하라 말이죠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보라 말이죠
엥 7천명 대따 크게 보입니다
7에 70번 용서가 보여요 면류관 반납한 24장로처럼 땅에 쳐 박고 고개를 못 들면서 말이죠
봐버렸거든요
무시 무시한 완벽한 심판의 주 이시자
완벽한 거룩으로 새 옷을 입혀주시는 일곱을 봐 버렸거든요
이 일곱 안에 심판과 구원의 주에 붙어 있지 않는 자는

나와 상관이 없다 라고 버리시더라 말이죠

그러니 눈에 안 보이는 7천명은
믿음으로만 보이거든요
자신에게서 출발한 눈의 시선이 아니라
종말의 인물의 시선에서 보는 믿음으로만 보이는 7에 70번의 용서가 보이는 겁니다

뭐가 보이나

질그릇에 담긴 보배는
접시를 깨어야만 보인다 말이죠

나의 죽음이라는 그 끝에서 종말에서만 보이는 겁니다.
안 그러면 또 나를 이 그릇을 반짝 반짝 빛나게 할려고

아이고 그것도 빛나는 기가

지금 착각하는게 그릇이 크고요 그 속에 담는 보배는 작아서
그래서 그릇 속에 폭 담기 좋게 그렇게 보배를 보시는데
아닙니다
우주의 운석 덩어리 같은 큰 보석에 거꾸로 종이컵이 쪼그마한 그릇이 
본드 접착제로 붙어 있는 듯이 붙어 있는 겁니다

그릇이 보배는 담는다는 둥 마는둥의 주체처럼 보이는게 아니라
마치 큰 보석이 쪼그마한 종이컵을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고서
본드로 발라서 떨어지지 않도록 섬기고 있더라 말이죠

그럼 나 라는 시선에서 벗어날 날줄 모르는 우리가
이 접시 이 그릇을 깨뜨리면
벗어나면
비로소 실상이 보일꺼 아닙니까
그릇이 보배를 담은 겁니까
보배가 그릇을 붙잡고 있는 겁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의 뿔은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해체되는 그 속에서만 뿔이 비로소 보이는 겁니다

뭐가 보이나????????? 뿔이 보입니다
구원의 뿔

우리의 허물을 빵꾸멍 뻥뻥 뚫어버리는

뭐가 문젠데??
저는 요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고 천하의 나쁜놈입니다
그래? 그거 내가 다 깨뜨리고 다 없앴다 자 됐나? 됐제?
또 뭐 있노
다 뿌사 주마

뭐든지 다 구해라 다 뿌사주마

네 맞아요 뭐든지 다 구해라 다 이루어 준다 라는 것은
우리 욕심을 채워주겠다 라는 또 우상숭배하라는 말이 아니라

죄 가지고 오라 라는 겁니다
성전으로 맹세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성전의 기능이 바로 어떤 허물도 다 덮는 
더러움을 거룩으로 변이 이동 바꾸는 기능이거든요

다들 그거 관심 없어요

그저 자기 의를 쌓고자 금까지 바쳐가면서 맹세를 합니다
오늘은 남을 7번 용서 내일은 8번 용서
그것이 좋은 열매로 본 거다 말이죠

그런데 그 끝은 쫄딱 망하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은
아이고 아직도 깨작 깨작 장난하냐 라는 겁니다
멈출 인간 없고
스스로 철거할 인간 없어요
성화된 나의 모습을 점점점 확대 시켜서
다마꼬치 키우듯이 점점점 성장 시키기에 바쁘거든요
누가 철거할려고
에이 똥덩어리 라고 배설물로 여기면서 버리겠냐 말이죠
없어요

그것을 못하니까 주님에게 뭐든지 다 구하는 겁니다.

즉 열매란 중간에서 이래 이래 해서 다듬어져서 되는게 아니라
처음부터 좋은 열매와 나쁜열매로 규정해서 나오는 겁니다.

창세전에 말이죠
또 전 과 후 라는 말을 시간 개념으로 보시면 안됩니다.
처음은 나중에 의해서만 드러나요
시공간의 역사 개념이 아니라 묵시 개념 믿음 개념
시간과 공간을 찢어버린 종말의 개념입니다

그 종말 되신 예수님에게 붙어있냐 안 붙어있냐로 규정 되는 것이지
내 쪽에서 시작하는 것은 애초부터 나쁜열매 이다 라는 겁니다.

기도하기를 지키는 사람이 되지 마시고
기도하는 사람으로 태어났음을 믿어라 말이죠

평생을 기도할 줄 모르는데도 
죽을때까지 몰라도 말이죠

벙어리로 날 때부터 태어났어도 말이죠
그 사람 자체가 예수님에게 붙어있냐 안 붙어있냐 로 규정되지

기도를 너무 너무 잘하는 사람이 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라는 겁니다.

실로암 소경은 날 때부터 소경인데 예수님이 그를 붙잡아 버렸다 말이죠
예수 안에 뭐든지 구하니까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큰 것을 보기를 주님을 보기를 말이죠

그런데 바리새인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과 안 붙어 있을려고 합니다
그들은 종교오락 게임 깨작 깨작 장난질은
이 날 때부터 소경인 실로암 소경의 죄가
자기 죄냐 부모 죄냐 라는
이거 규정하는 겁니다
그래야 모세의 자리에 앉은 값어치를 하는 것이니까 말이죠
너무 너무 애매 하잖아요

장애인으로 태어난 사람은 자기 죄 입니까 부모 죄 입니까

강도 만난 자 이야기 곧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정작 강도는 등장하지 않아요

현장에서 간음 하다 잡힌 여인의 사건에서 정작
그 여인과 간음한 남자는 등장하지 않아요

마귀들은 이 점을 파고 드는 겁니다.
그래야 모세의 자리에 앉은 값어치를 하게 되니까요

정작 예수님은 우리를
이스라엘을 쫄딱 망한 자리에 놓고서
이 놈들이 물기를 바라는 미끼로 삼아서
이들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시는 심판주요 구원의 주로써
자신을 나타내시는 겁니다.

그러니 실로암 소경이 날 때부터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서 이다 말이죠

즉 애굽군사와 애굽 왕으로 인해 영광 받으셔야 하고요
이스라엘은 원망을 함으로써 그들의 죄악을 사하시는 영광을 베푸시는 겁니다.

두 상황을 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펼치시는 겁니다.
애굽 왕에게는 에게 에게 그것도 토기장이 이가 라고
그 차이로써 토기장이 되심을 보여주시고

이스라엘 에게서는 방금 애굽이 하는 짓에 손 떽지 하게 하시고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 내 나라는 내 예수님은 내 스승님은 내가 지킨다 라는
애굽왕 따르지 말고
도리어 애굽왕과 손잡다가 도리어 애굽왕에게 포로되도록 만들어서
원망 실컷 듣고서도
그 죄를 
그 남을 일곱 번 용서하겠다 라는 애굽왕 바로왕을 쫓지 말고 가짜 토기장이 말고
도리어 원망 하도록 유도해서
7에 70번 용서 받는

깨작 깨작 장난질이 아닌
이런 죄도 용서하십니까 라는 일만달란트의 용서에 눈 뜨라 라고
의도적으로 절망의 광야
죽음의 광야
이스라엘의 멸망의 자리
그 황무지에서
그 죽음의 홍해 바다 속에서
죽였다가 다시 살아나는
탕자를 만들어서
왕같은 제사장 나라
거룩한 나라
그의 소유된 백성
그의 손의 양이라

그에게 맡겨진 바 된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나의 원함은 남을 7번 용서하는
좋은 열매를 내가 직접 좋은 열매 되겠다 라는 깨작 깨작 방식이고

그렇게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맡겨진 바
세 번 부인해 임마
내가 니 아부지도 알고 임마
내가 니 형이라 사우나도 가고 임마

죽였다가

그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이 미쁘신 믿음

아무리 봐도 전혀 믿음이 안가는
도리어 불신하게 되는
누가 자기를 죽이는데 믿음이 가냐 말이죠
불신이 가지
불신이 가야 원망을 하고 원망을 해야

자기 믿음 조차도 탈탈탈 털려서 쓰잘데기 없음을 알아야

외부에서 온 믿음이라는 선물이 비로소 보일께 아니겠냐 말이죠
자기 것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남은 믿음으로 어떻게 해서든 좋은 열매로 만들어서
알곡이 될려고 할꺼 아니겠냐 말이죠

그 손 떼라 말이죠

절대로 우리는 포기 못해요
그래서 미쁘심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구원의 뿔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다 뿌셔서 확실히
김영상 학실히 죽여서

내 쪽에서 더 이상 사랑했다는 둥 그런 소리 못 나오록 철저하게
원망하게 만들고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니 임마 내 사랑하나 임마

네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더 잘 아십니다

왜 주께서 더 잘 아냐 라고 대답하냐 말이죠
주님이 이 고백을 하게 만들고자
십자가의 피 용서 곧 일만달란트
7에 70번 용서를 준비 했따 아입니까

이것 땜에 세 번 부인케 만들어서
깨작 깨작 장난질 하는 절대로 세 번 부인하지 않겠다는 둥
남을 의식해서 나온
남들은 다 버려도 나는 나 만큼만은 절대로 부인하지 않겠다는 둥
남들은 다 속아도 주님은 안 속는다 말이죠
다들 끔뻑 하고 넘어가는 이 진심어린 고백을 주님은 끝까지 안 속습니다.
함량 미달
사람의 일
사탄
곧 너 왜 내가 1300년 전에 죽은 애굽왕을 끄집어 낸지 모르지
모르니까 그 소리를 하는 겁니다.

그 가짜 토기장이의 사고방식과 같고 같은 소리를 한다는 겁니다
어 왜 내 고백을 너 애굽왕도 하느냐

깨작 깨작 장난질임을 비로소 안다 말이죠

그거 이미 마귀가 다 했어요

광명한 천사 이다니깐
거짓선지자들이 다 했어요
시드기야 악한 무화과 나무
나쁜 열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 가룟유다의 독립운동
이미 다 했어요

과연 죽은자 살려 보라 말이죠
함량 미달 

부족해 부족해
택도 없어요
깨작 깨작

장난하냐 말이죠
성전을 아직도 깨작 깨작 46년 동안 짖고 있으니
네 맞아요 못 짖도록 주님께서 유대총독을 강퍅케 했다 말이죠

손 때라 꼬

바리새인 보다 더 나을 생각 하지 말라꼬
애굽 왕 바로왕 보다 나을 생각 하지 말라고

내가 이 놈들을 타 넘어서 너에게로 가마
이 여호와를 보라 라는 겁니다.

이것이 저들 창조주 라고 우기는 토기장이와 다른

전혀 다른 질투의 사랑
죽음 보다 더 강한 시기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 이다 라는 겁니다.

이 사랑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나쁜 열매이고
붙어 있는
이 사랑 안에 거하는 자
이 사랑의 섬기심에 의해
사로잡힌 바 된 자가
좋은 열매로써
내가 책임 지는거 하나 없이
주님이 끝까지 책임 지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또 깨작 깨작 장난치면 다 털어버리시는
내 목숨 줬는데 왜 그 장난지 하냐 라고
또 바리깡으로 밀어버리시고
또 불도져로 밀어버리시는 겁니다.

이것이 미쁘심 든든한 믿음직 스러운
끝까지 섬기심입니다

네 맞아요 섬긴다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리지만
네 맞아요 눈치 채셨군요
다 죽여 버리겠다 라는 겁니다.

그리고 다시 살려서
리셋 해서
주님 안에서
주님에게 맡겨진 삶을 살도록 만들어 버리시겠다 라는 겁니다

그럼 나는 없고 로봇이네 라고
자유의지는 없는거네

그 놈의 자유의지 ㅋㅋㅋ 곧 인공지능에게 다 빼앗기는
창조주가 도리어 노예 되는 꼴이 무슨 놈의 창조주인지

그래서 쓰레기 통에서 애굽왕을 소환해서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자유의지 있다는 스스로 토기장이 된 놈과의 차이로써

죽기까지 복종한
예수님 조차도 자유의지가 없어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원함이 소용이 없어요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이 맡겨진 바 된 종말의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죽은 자를 살리는
죽은 우리를 살리시고자
대신 매맞음으로써 우리가 나음을 입게 되는

이 꺾으신 뼈로만
밀어붙이시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더 큰 사랑 있으면 나와보라 말이죠

이런 질투의 사랑 
시기의 사랑

질투의 십일조 있으면 나와 보라 말이죠

이 사랑으로만
새하늘과 새땅을 짖겠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 짐승의 세계에서
그저 성전에 바친 금으로 맹세하고 반드시 지키겠다 라는
의문의 반복만을 소통하고 매매 하는
광명한 천사에게 빠져서
서로 서로가 큰 자가 되고자
누가 먼저 모세의 자리에 앉느냐 라고
종교로 도배를 할 겁니다
남을 7번 용서로 SNS를 도배하듯이
깨작 깨작 그 장난질을 멈출수 없게 되는
도리어 주인은커녕
주체는커녕
종노릇 하게 되는 겁니다.

오히려 심판의 주를 만나는 것 보다 더 큰 축복이 없습니다.
그 의문의 반복을 이스라엘의 뿔이 깨뜨려 주시니 말이죠

진정한 복의 계통 곧 유업, 기업은 딱 하나 이것 뿐입니다

(고후 4:10, 개역)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일만달란트를 짊어진 자 만이 좋은 열매 곧 복된자 8복입니다
탕자처럼 말이죠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그 십자가의 한 쪽 강도가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받은 자입니다

오냐 오늘밤 너와 내가 낙원에 있으리라 ~~~~~~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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