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독한 댓가

메모장 2008. 11. 25. 17:22



행함(법)에 대한 혹독한 댓가

2008년 11월 25일 아침 8시 즈음에

행함을 얼마나 죽도록 미워하시는지
잘못은 정작 내가 해 놓았는데
옆사람의 사정을 전혀 모르는 나에게
그 옆사람을 내 눈 앞에서 붙잡아 결박시켜 놓고
내 눈 앞에서 행함의 댓가가, 법을 쥔 댓가가 어떠한가를
혹독하고 참혹한 실상을 톡톡히 보여줌으로써
혹독한 댓가를 치르게 하신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이다.

먼지 찢으시고
그 다음 다 찢어버린다.

이것이 부활이다. 곧 그 다음은 너가 찢겨질 차례다 라는 의미 이다.

왜냐하면 자유란 자유의 종이 되는 자유의 노예로 되는 것이다.
자유의 노예 라는 노예라는 모순이 자유와 결합함으로써 자유의 진면목을 증거 한다.

자유가 뭔데 라고 누가 물으면
내가 자유의 노예 이거든 이라고 증거토록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자유성이 얼마나 자유로운지
사람들이 무시 할정도로 자유로운 그 정도로 자유롭다는 것이다.

정작 남들은 다 무시하는 자유를
본인 또한 과거에 무시했던 자유를

이제는 자유의 노예 자유의 종이 되어서
혼자만이 그 자유를 무시하지 않는 자유를 무서워하는 자유를 주인으로 증거하는
두려움과 벌벌벌 떰으로써 자유(구원.피)를 증거 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철저하게 무시 받을수 밖에 없도록 하시는 것이다.
 
그 약함이 미련함이 어리석음이 강함을 부끄럽게 하고자
십자가가 주체가 되어서 주변의 구도를 짜 내시는 것이다.

왜 자유 이니까?

그럼 가짜 자유가 뭔가를 밝혀내어야만 한다.

가짜 자유는 자유의 철저한 종이 된 모습이 아닌
자유를 가지고 법을 쥘려는 놀이를 장난치는 모습이다.

이것이 인간들이 행하는 성화다.

일부러 십자가의 지혜는
이런 인간들에게 자유의 종을 붙여서

율법의 혹독한 댓가를 자유의 종에게 부음으로 말미암마
먼저 심판을 이 땅에서 받음으로써 구원을 자유를 보여주지만

정작 자신들 마저도 심판 받아야 할 그 심판을
자유의 종(목베인 영혼)이 먼저 심판받는다고 손가락 질 하도록 유발케 한다는 것이다.

저봐 저봐 나무에 달려 죽는 것 보니 하나님으로 부터 저주 받지 라고
그 저주 받는 하나님의 법에 동참케 해서 법을 쥔 재판장의 생각을 유발케 하는 것이다.

이 생각은 마치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마음과 같이
이미 마음 속에 선악을 구분했다는 자체가 그 형벌집행에 참예케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의 종을 그렇게 죽이시는 이유는

정작 바로 그런 법을 쥔자들의 미래의 심판을 미리 앞당겨 주는 종말(성령의 일)을 보여준 것인데
그 종말은 지금 나에게는 아직일 뿐이고 미도착 이기에
그 종말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는 (똑똑하기 짝이 없는 5명의 처녀인 셈이다.)
정작 법만으로도 충분히 버티기를 하겠다는 취지인 셈이다.

그러나 자유는 이런 비자유(선악법)를 동원해서

어느 정도로 자유로운지
법을 모조리 다 쥐도록 해 놓고서는

정작 본인은 법을 쥐지 않았다는 이유로 법에게 집행처벌 당하는 모습으로 오는 자유(종말 현상-모든가치를 교체)
의 모습으로써 법이 죽음을 맞이하면 더 이상 군림 할 수 없는 그 죽음의 자리를 자유롭게 가는 것이다.

자유의 노예의 모습으로써 말이다.


자 결국 이렇게 율법에 의해 분쇄시켜버리는(갈아버려서 해쳬시키는) 것과

버림받는 모습인 자유(순종<노예>이 제사<법,주인> 보다 나음)에 의해 분쇄(해체) 것

두 분쇄기로 인해

다 이루심을 완료하시는 것이다.

이제 천국 분쇄기 지옥 분쇄기를 이루심으로 인해

다 이루심 앞에서 모든 것들이 다 박살나도록 하셨다.

혹독한 댓가를 치르도록 말이다.

완료가 완료 다움은 미완료인지 아닌지를 이 두 분쇄기에 집어 넣어 보면 안다.

행함에 대한 어떠한 댓가가 있는지
철저하게 미움을 퍼붓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 속에 넣어보고 물 속에 집어 넣어 보고
불 속에 집어 넣어봄으로써

행함이라는 법을 쥔 자들에게는 행함의 댓가를 톡톡히 혹독하게 치르게 하고
믿음(사랑=다 이루심=십자가)을 쥔 자들에게는 사랑의 댓가를 톡톡히 혹독하게 치르게 함으로써

과연 어느 것이 다시 일어나는지를 마귀에게 보란듯이 떳떳하게 자랑하시는 것이다.
(마귀가 반드시 동원되는 이유)

이런 주님의 믿음은 어떤 인간의 믿음과도 족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의 모든 믿음을 가짜로 만들어 버리신다.

그래서 자기 믿음 곧 행함 쳐다볼 입장이 못되도록
예수님의 믿음이 옳았고 나의 믿음은 아니였다는 것을 혹독하게 물증으로 삼아버리신다.

그 박스가 십자가요 그 속에 담겨진 우리의 물증들은 믿는척 까불다가 얻어터진 그 증거물을
예수님의 믿음은 반드시 비웃음을 비언약을 웃음으로 교체시키는 피를 뿌리고

영의 일에 동원되는 자들 또한 인자라는 박스로 삼아서
상대방의 허물을 물증잡듯이 잡아서 그 위에 뿌려진 피를 증거케 한다.

이런 십자가의 미련한 지혜가 아니면
인간들은 자기 믿음의 정당성만 추구하는 법만을 쥐도록 되어 있다.

법은 사랑을 죽이기 때문이다.

(갈 3:10, 개역)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온갖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갈 3:13, 개역)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히 7:19, 개역) 『(율법은 아무 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율법 때문에 그림자 때문에 실체를 소망함 실체가 있긴 있구나 - 긍휼을 바라봄
그러나 그림자(행함이라는 허상-선악법)는 아무도 온전케 못함)

(마 23:13, 개역)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눅 11:52, 개역) 『화 있을진저 너희 율법사여 너희가 지식의 열쇠를 가져 가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느니라 하시니라』

(마 23:4, 개역)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눅 11:46, 개역)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또 너희 율법사여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에게 지우고 너희는 한 손가락도 이 짐에 대지 않는도다』

(마 18:6, 개역)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리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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