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성으로서만 증거되는 하나님 나라 비유

(고전 1:27, 개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고전 1:28, 개역)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9, 개역)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休閑空間(행원소구 휴게실)  자유게시판

비유 연구-4)요청하신 비유에 관한 자료입니다. 글쓴이: xian 08.10.29 13:58

http://cafe.daum.net/xingyuanxiaoqu/15zr/611 




무화과나무 비유 - 마태복음24:32-35

질문)
마 24:32-36의 무화과나무 비유에 대해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너무나 비유가 아닌 비유해석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서
이 참에 한번 정리를 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해서
부탁 드립니다.

답변)

무화과 나무 비유는,
이 세대에서 일어나는 흔한 현상을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등장은
이 세대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세대에 속합니다.

무화과 나무의 실체는
바짝 마른 나무 가지가 아닙니다.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가 나는 것이
진정 여름 한철에 볼 수 있는
무화과 나무의 진면목입니다.

따라서 지금 이 세대에서는
예수님의 위광이 초라하지만
오는 세대에서는
예수님께서 영광스러운 자태와 위력으로
등장된다는 겁니다.



열처녀 비유 - 마태복음25:1-13

◈ 열 처녀 비유 - 구원은 본인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

마태복음 15장에 이런 비유가 나옵니다.? 열 명의 사람이 있는데, 열 명 다 처녀입니다.? 이들 중에서 이혼한 사람이 있다거나, 동거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다 처녀라는 말입니다.? 다만 여유 분의 기름을 준비했다는 것과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의 차이가 있지요.?

그런데 기름 준비한 그것을 다섯 처녀가 기름 준비할 때 신랑이 와 버려요.? 미처 기름 준비 못한 사람들이 기름을 사러간 사이에 말입니다.? 그들이 사서 돌아올 때 신랑이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명도 도착하기 전에 신랑이 왔어요.? 왜 그렇습니까?? 다섯 처녀?혼인잔치에 참석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말입니다.?

여기에서 기름이 등장한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합니다.? 애초에 다섯 명만 들어가도록 되어 있어요.? 그래서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본인의 행실이 아니라, 기름을 준비하라는 주님의 요건 때문에 천당에 가고 지옥에 가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위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 예수를 믿으면 구원시켜 줄게" 라고 요한복음 3장에서 말했잖아요.? 그러면 날 때부터 불교 집안에 태어나서, 학교도 불교 재단학교에 다니고 그러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잖아요.? 이것은 마치 주일학교 학생의 질문처럼, "조선시대에는 목사도 없었고, 선교사도 안 왔고, 교회도 없었는데 어떻게 됩니까?" 하는 것과 같은 말이지요.

이것은 일부러 천국에 못 오도록 가로막는, 즉 사랑을 못 받도록 하는 그러한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기어이 지옥에 갈 사람을 지옥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솜씨에 대해서 찬양해야 되지요.? "야, 주님 참 끈질기다. 역시 하나님의 능력은 대단해!" 라고 찬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제가 이런 소리해서 얼마나 욕을 많이 들어먹는지 모르는데, 하지만 성경을 한 번 찾아봅시다.? 누구 말이 맞는지 말입니다.? 시편 69편 27, 28절입니다.

( 시 69:27)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 시 69:28)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이 말씀은, "죄를 짓게 해서라도 기어이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신다" 라는 것이지요.? 신약시대에는 이러한 역할을 누가 합니까?? 구약의 여호와가 하시는 일을 신약에서는 예수님이 하시지요.? 구약에 나오는 모든 말씀을, 빈틈없이 신약에서 예수님께서 성취해 내시는 그런 자리에 지금 주님이 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냥 '예수'가 아니고, '주 예수' 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 라는 말은, 구약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을 다 성취해서 오직 사랑을 입은 자에게만 천국을 허락하시는 그런 분이란 말이고, 이런 주님의 활동 때문에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 열 처녀의 비유 - 공평의 원리는 없다 !!

사실 조금 전에 말한 열 처녀의 비유에 있어서 공평의 원리는 없습니다.? 인간 측에서 보자면 전혀 공평하지 않지요?? 그리고 디모데전서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만민이 구원되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이 말씀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무슨 뜻입니까?? 구원을 얻기 위한 어떠한 장벽도 하나님은 일체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구원을 결정할 때 인간들이 "너는 이런 죄를 지었으니 구원을 못 받아, 너는 이런 삶을 살았으니 반드시 구원받게 되어 있어" 라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안 통한다는 말입니다.

구원의 조건에 그 사람이 유리하든 불리하든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 모든 장벽을 허시고 자신이 원하는 자는 다 구원해 내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편을 가르고 하는 것이 하나님께는 통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름을 준비할 때, 기름을 준비하라는 소식이 다 같이 들었잖아요.? 그것을 보고 공평하다고 생각하시는데, 과연 맞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꽃 한 송이씩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라고 말했다면, 어떤 사람은 금방 가서 꽃을 준비한 사람이 있을 것이고, 어떤 사람은 급한 일 먼저하고 나중에 준비하려고 한 사람도 있고, 아예 잊어버린 사람도 있겠지요.? 우리 같으면 모든 사람이 꽃이 있어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면 다 꽃을 준비해 오도록 기다리겠지요.?

그런데 다섯 처녀들은 미처 기름 준비가 늦었지만, 그래도 준비를 했는데 혼은 잔치 집 대문은 닫혔고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열어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라는 취지는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사람만 부르겠다" 라는 뜻입니다.? 뭐가 어렵습니까??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이렇게 쉬운 이야기가 왜 납득이 안 되고 이상하게 들리는가 하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방법과 우리가 평소에 생각했던 구원방식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운 것이 아니고 다르기에 생소하다는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 - 마태복음25장14-30

달란트 비유를 통해서 본 주인의식
박윤진

흔히 주인의식이라고 하면, 내가 이 물건, 이 사회, 이 국가의 주인이기 때문에 보다 책임있게 행동하려는 정신 자세를 말합니다. 내가 주인이기 때문에 보다 적극적으로 내 소유물의 질적, 양적 성장을 위해 자연스럽게 매진하도록 유도하기 위한 체면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주인의식은 위에서 말씀드린 개념과는 다릅니다.

나를 종으로 여기는 마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게는 주인이 따로 계신다는 의식입니다. 종으로서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는 마음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소속되어 있는 자라는 것을 잊지 않고 나를 소속시켜주신 그 분을 항상 염두하는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습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종이며 나를 종으로 삼으신 분이 엄연히 따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나는 그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창조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항상 깨닫기를 소원하는 것은 마치 돼지가 먹을 것 앞에서 절제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습니다. 오히려 아담된 속성은 어떻해서든 주인의 영광마저 빼앗아 자신의 소유물로 챙기려고 합니다. 도적 심보가 항상 주인의식을 추월합니다.

우리가 아주 잘 알고 있는 천국 비유 중 하나인 달란트 비유는 진정한 종이 누구인가를 심도있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이란 주인 의식에 사로 잡혀 있는 자입니다. 자신의 소유물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의 노동가치도 최종적으로 주인의 것으로 환원됩니다. 주인이 현재 자신의 눈에 보이든지 보이지 않던지 여전히 자신의 신분이 종이라는 것에 분노하거나 탈출을 시도하지 않으며 다만 관심이 있는 것은 주인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드리는 것 뿐인 자입니다. 이런 자들이 이미 놓여진 곳이 바로 천국인 것입니다.

주인이 종들과 함께 있을 때, 겉으로 보기에는 모두 종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멀리 여행을 떠나 주인이 종들의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마치 주인이 없어진 것과 같은 배경을 깔면 누가 진짜 종이며 누가 가짜 종인지를 확연히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재물의 소유과 연결시키면 종을 지배하고 있는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 얼굴을 알아 볼 수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은 멀리 타국으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5, 2, 1 달란트를 각각 나누어 줍니다. 이 때, 평소 종들이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5, 2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장사를 함으로써 2배의 소득을 얻게 됩니다. 주인이 계시지 않지만 이 두 종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주인과의 관계인 것입니다. 주인을 어떻게 하면 흡족하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는 것이 내가 소속되어 있는 주인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까를 고민하고 고민했을 것입니다. 즉, 이들은 여전히 주인과 함께 있는 자들이며 천국에 있는 자들입니다.

열심히 벌면 성과급으로 나에게 얼마가 떨어질 것이라는 계산은 없습니다. 반대로 금전적 손실이 주인과 나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음도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이 종들은 주인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장사를 했다는 것입니다. 장사라는 것은 돈을 벌 수도 있지만 잃을 가능성도 큰 게임입니다.

만일 이 충성된 종들이 자신의 행동여하에 따라서, 그러니까 돈을 많이 벌면 주인과의 관계가 더욱 견고해 지고, 돈을 잃게되면 주종관계가 단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쉽게 장사에 나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주인의 부재 중에도 여전히 주인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이 달란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던 것은 주인과 따로 떨어진 독립된 나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인의 돈을 활용해서 두 배의 이익을 얻는 경우와 반대로 돈을 잃게 되는 경우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 결과입니다.

이렇게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에게 유리하면 성공, 나에게 불리하면 실패라고 단정하게 되며 이 성공과 실패라는 잣대를 가지고 다른 종과의 경쟁에 나서면서 자연스럽게 우열을 가리는 것입니다. 우열을 가리면서 챙기는 것은 여전히 잘난 나, 혹은 못난 나가 되겠지요.

그러나 주인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다른 종과의 경쟁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경쟁의 결과물인 우열은 나를 중심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종이라면 그렇습니다. 종의 모든 결과물은 모두 주인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1등 종과 2등 종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종의 개념입니다. 단지 주인만 드러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있을 때와 없을 때가 그들에게는 아무런 차이도 만들지 못하며 장사에서의 개인적 성취정도 역시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실상은 주인이 종들에게 한 명령자체가 이들을 완전히 지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떻게 주인과 분리되어 있는 독립된 나는 잊고 주인이 하신 명령에 의해서 완전히 사로잡힐 수 있을까요? 이러한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주인과 종으로써 관계를 맺게 된 이들은 상호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해서 어떤 계약을 맺음으로 성립된 관계가 아닙니다. 종이란 이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주인때문에 종이 된 것이지 종이 원해서 주인을 선택하고 그 사람의 종으로 자처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이라는 말에 담겨진 의미입니다. 정리하면, 종이 어떠함이 종됨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어떠하심에 따라 종이 결정되기 때문에 종 쪽에서 어떻게 해야 참 종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처음부터 성립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초점은 과연 주인이 어떤 분이가에 모아지게 되어있습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종의 모든 것은 아무 의미가 없음이 밝혀 졌기 때문입니다. 천국의 주인이 어떠하신 분인가를 알면 그 천국에 살게되는 종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지금 달란트 비유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를 알려주기 위한 비유이고 천국의 주인은 예수님이신데 그 분께서는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기 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종으로서 사신 분이시며 이러한 순종의 결과물로 결코 종이 될 수 없는 악한 그들이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입니다. 즉, 지금 5, 2 달란트를 받은 종들은 자신의 주인이 종을 위해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그리고 죽음조차 이길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 종인 것입니다. 나의 실패와 성공으로 쌓아올린 주종관계는 조작된 허위의 것임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주인께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하시기 때문에 그냥 그 분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즉, 나를 중심으로 파생되는 이익과 손실은 종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반면, 한 달란트를 받아 그것을 땅에 숨긴 종은 여전히 나를 중심으로 한 성공과 실패를 저울질 하는 종입니다. 그래서 5, 2달란트를 받은 다른 종들과 자신이 받아 줜 1달란트를 비교했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가장 뚜렷한 것은 이 종이 평소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입니다. 종이라고 자처하면서도 정작 그 주종관계를 이루고 계신 주인을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 달란트를 땅에 묻은 종은 주인을 이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굳은 분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씨 뿌리지 않은 곳에서도 곡식을 모으시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저는 두려운 나머지 나가서 주인님의 돈을 땅에 감춰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여기 주인님의 것이 있습니다.'

자신의 주인을 굳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 주인의 것과 자신의 것이 분리되어 있는 사람, 그래서 자신의 종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이 최대한 노력해야 하는 사람, 이 사람이 바로 게으르고 악한 종입니다.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체로 자신의 것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한 사람이 바로 주인이 보기에 악한 종입니다. 이 종의 진짜 주인은 자기 욕심이며 이것이 장성하여 죄가 되고 결국 사망을 낳게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천국의 주인입니다. 그것이 맞다면 예수가 어떻게 천국을 이루셨는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가 밝히 우리 눈에 보임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얼마나 오해하고 있습니까? 그래서 내가 종이라고 우기고 싶어서 내민 노력봉사와 금전상납이 얼마나 뿌리깊게 한국교회에서 횡행하고 있습니까? 진정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굳은 자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잘난 1등 종이 된 나를 위해 매진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를 위해 죽음까지도 마다 하지 않으신 주인이 따로 계십니다. 그 분때문에 우리가 종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지금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주인이 된 것은 아닙니다. 그 분은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 주인의식이 바로 천국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소속된 종입니까?



악한 종 비유 - 마가복음12장

* 여기서 마가복음 12장을 한번 보자.

( 막 12:1) 예수께서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 짜는 구유 자리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 막 12:2) 때가 이르매 농부들에게 포도원 소출 얼마를 받으려고 한 종을 보내니
( 막 12:3) 저희가 종을 잡아 심히 때리고 거저 보내었거늘
( 막 12:4) 다시 다른 종을 보내니 그의 머리에 상처를 내고 능욕하였거늘
( 막 12:5) 또 다른 종을 보내니 저희가 그를 죽이고 또 그외 많은 종들도 혹은 때리고 혹은 죽인지라
( 막 12:6) 오히려 한 사람이 있으니 곧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최후로 이를 보내며 가로되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 아들을 공경하지 않는 인생은 저주받은 인생이다 !!

*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고 하니,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저주받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북한에 소를 천 마리나 보내주어도 말이다. 여기 6절에서, '최후로 이를 보내며' 라는 말이 나오는데, 아들을 공경하지 않으면 심판이라는 것이다. 여기 '최후' 라는 말은 하늘 보좌에서 결정했다는 것이다.

*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최후는 최후가 아니고, 하나님의 관심사는 '아들공경' 뿐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아들을 공경을 하지 않는 자들이 맞이하는 그것이 바로 '최후' 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하늘 보좌를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 진행되는 요한 계시록의 해석을 이 하늘 보좌에다 한번 맞추겠다는 것이고 말이다.

* 여기에서 요한복음 3장을 한번 보자.

( 요 3:35)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만물을 다 그 손에 주셨으니
( 요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 요 5:23)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게 하려 하심이라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

◈ 요한 계시록은 아들을 죽인데 대한 복수의 책이다 !!

* 여기서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아들이라는 것이다. 다른 것에다 관심을 두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아들이라고 되어있지만, 요한 계시록에서는 '보좌' 이고 '책' 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 책을 펼치니까, 아들을 찔러 죽인 그 대가가 역사적으로 증거되는 것이 요한 계시록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요한 계시록은 아들을 죽인데 대한 복수의 책이라는 것이다.

* 여기에서 우리는 원초적인, 이것을 '시원(始原)적인'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계획이 다 드러난다는 것이다. 생명 책에 기록된 자는 구원을 받지만, 나머지는 끝까지 반발하다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런 구원과 심판의 서로 다른 궤도가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 바로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 보좌가 등장했기 때문에, 하늘보좌는 바로 '심판의 자리' 라는 것이다. 이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 24장로와 4생물인데, 4생물은 심판의 기능을 하고, 24장로들은 이러한 무서운 구사일생으로 구원받은 그 기쁨으로 말미암아 너무나 통쾌하고 상쾌함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면류관마저도 반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 그렇게 큰 평안과 큰 기쁨이, 이 지상에서의 아픔이 큰 대조를 이루며 나타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사도요한이 걱정이 되어서 이 책을 펴느냐고 하니까, 24장로들이 하는 말이, '걱정하지 마라. 결국 이를 다윗의 뿌리가 할 것이다' 라는 것이다. 이 다윗의 뿌리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사야 11장에 나온다는 것이다.

( 사 11:1)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그 뿌리에서 한 가지가 나서 결실할 것이요
( 사 11:2)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리니
( 사 11:3)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그 눈에 보이는대로 심판치 아니하며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치 아니하며
( 사 11:4)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 사 11:5)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

* 이새의 줄기에서 왜 한 싹이 왜 나는가? 심판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들이 하나님께서 선택한 이새의 뿌리를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이새의 줄기에서, 다윗의 뿌리에서 나타난 사람들을 심판한다는 것이다.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자기 마음대로 '예수, 예수' 라고 하지만, 그러나 그분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분인가?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 - 누가복음 10장

예수님의 선한일이란, '부자냐 가난하냐', 그 문제가 아니고 '얼마나 착하냐, 안착하냐', 그 문제도 아니고, '네가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 그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다. 세상은 이미 끝날 세상이고 정죄 받아야 할 세상이니까 정죄 받는 세상과 함께 멸망 받지 말고 그 세상에서 너만은 빠져 나오거라,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뭘 알아야 되겠어요?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 그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내가 그토록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고 세상에서 크게 되고 싶은데, 그런데 예수님의 구원은 "네가 너희들만큼은 세상과 함께 멸망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너희들을 빼돌리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했으니까,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느냐를 알아야 우리가 세상에 협조 안하고 세상과 함께 살지 않을 수 있잖아요.

'아, 이래서 세상은 멸망 받았구나. 이래서 우리는 구원 받았구나'라고 하면서 구원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멸망되는 요소에 대해서는 거부할 것이라는 말이죠. 그러면 세상이 왜 멸망당해야 되는가를 이야기해 봅시다. 두 번째 시간은 좀 어렵습니다. 선한일을 하려면 반드시 누가 옆에 있어야 됩니다. 혼자서 볼펜 돌리고 있다고 선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옆 사람에게 볼펜이 필요할 때 그것을 줄 때 선한 일이 됩니다.

이렇게 선한 일이라는 것은,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선한일을 받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이에 뭐가 형성됩니까? 선한일이 되는 겁니다. 혼자서 도 닦는 것은 선한일이 될수 없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드는데, 어린이 여러분들도 많이 들어 보셨지요?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죽도로 얻어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건져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도록 길바닥에 누워 있을 때 마침 그 길을 어떤 제사장이 가다가 그것을 보고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이 오길 래 강도만난 사람이 도움을 청했지만 그도 못본척 그냥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이 오는데 그 사람은 평소에 동네 사람들이 믿음 없다고 깔보는 사람이 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바로 유대인들이 아주 싫어하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다가와서 피가 난 상처를 닦아주면서 "어디 사십니까? 제가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당신은 살았습니다. 제 등에 업히세요."

그렇게 해서 치료도 해주고 머물 곳을 마련해 주면서 "주인장! 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다 해주세요. 제가 다 낼 것이고 만약에 이 돈으로 모자라면 내가 다시 와서 다 갚을테니 이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세요" 하면서 자기 이름도 안 밝히고 그냥 갔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중에서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습니까? 첫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아니지요? 세 번째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할 때 혼자서 사랑, 사랑, 한다고 사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중요합니다. 아무 영문도 이유도 없이 그냥 사랑 받아야 될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제가 여기 앉아 있는데 아주 못생긴 사람이 와서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하면 제가 좋아하겠습니까? 못생겼는데. 화를 내면서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원했는가?"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사랑이 형성 됩니까 안 됩니까? 안되지요. 사랑하고 하고 싶은 사람이 있더라도 사랑이 안 되잖아요. 그러면 언제 사랑이 형성됩니까? 누가 와도 나는 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라는 그런 지경 상태에 놓여 있어야 사랑이 형성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할 때 우리는 어떤 지경에 놓여 있어야 하느냐 하면, 내가 내 힘으로 아무것도 될 것이 없을 때, 그리고 세상과 더불어서 멸망당해도 싸다, 하는 그것이 확정되었을 때, 가족도 떠나고, 친구도 떠나고, 심지어 국가에서 일주일 안에 사형을 집행한다고 할 그런 순간, 모든 사람이 다 침 뱉고 돌아설 때에 그때 비로소 뭐가 됩니까?

그때 누군가 나를 구원하면 그때 비로소 나는 뭘 느끼느냐? 사랑이라는 것을 느끼죠.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은 누구지요? 십자가 옆에 달려 있던 누구입니까? 강도입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사형 집행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 사형수가 예수님보고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니까, 이제 사랑받을 대상이 나타났지요? 그때 예수님 하시는 말씀이,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어디에 있으리라?)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누가 사랑받을까'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사랑이 담기는 그것을 보고 좋아합니다. 자기 사랑이 사랑 값을 하면서, 사랑이 사랑의 행세를 하면서 그 속에 녹녹하게 담겨 있을 때 그것보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한 인물이 없습니다. 강도가 되었든 창녀가 되었든 예수님의 자기의 사랑이 담겨 있는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고 "99마리의 양보다 한 마리 양이 더 귀하고 좋은 것"(마 18:12,13)입니다.

같이 집에서 농사짓던 부지런한 아들보다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모든 유산을 다 탕진하고 몰골도 형편없고 몸에서 냄새는 풍기고, 슬리퍼 질질 끌면서 염치 불구하고 아버지 집에 와서 "아버지, 아들 대우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고 그저 종이나 시켜주시고 밥이나 먹여주면 감사합니다. 아버지, 절 받아 주시겠습니까?" 라고 나오는 그 집나간 그 아들에게 주님께서 "너 같은 인간에게 주려고 내가 금가락지 마련했고, 소를 잡았다"고 하십니다.

"제가 그럴 자격이 됩니까?" "네가 받을 수 있는 자격을 묻는 것이 아니고 내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 내 사랑이 네 속에 녹녹히 그냥 있다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주특기나 재치나 재롱이나 이런 것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여전히 감하지 아니하고, 녹슬지 아니하고 생생하게 우리에게 담겨 있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뭘까요? 그 사랑이 한글자로 "피"입니다. 우리는 피가 필요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피는 선지국할 때나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피가 필요하냐, 필요없냐, 그런 것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첫째시간에 이야기 했습니다. 우리는 자기가 유리하냐, 불리하냐를 누가 판정한다고요? 내가 판정해서 내가 유리한 것만 골라서 선택합니다. 그게 아니고 정작 우리에게 뭐가 필요한지는 우리자신도 몰라요.

그러나 뭔가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을 통해서 내가 저것 없이는 못사는 인간이라는 것을 비로소 아는 겁니다. 예수님의 피가 왔다는 것, 그것도 용서하는 피가 왔다는 것은 우리는 무슨 짓을 해도 용서 못 받는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우리는 어떤 선한 일을 해도 그것이 나의 구원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것이 뭐냐?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 3:1)입니다.



예복입지 않은 비유 - 누가복음14장

여호와깨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다고 되어 있는데 아브라함이 보니 한 분이 아니라 세 분이 오시고 있었습니다. 한 분은 여호화 하나님이고 다른 두 분은 그 여호와를 보필하는 수행 천사일까요?

창세기 19:1에 보면, "날이 저물 때에 그 두 천사가 소돔에 이르니 마침 롯이 소돔 성문에 앉았다가 그들을 보고 일어나 영접하고 땅에 엎드리어 절하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세 분 중에서 두 분의 천사만이 소돔과 고모라도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러면 빠진 한 분은 천사의 역할을 하실 분이 아님을 알 수 있지요. 그런데 이런 특별한 분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실 때에, 아브라함을 직접 만나기 위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것이 인간으로서는 황송스러운 일입니다. 아브라함도 얼마나 반갑고 고맙고 놀랬던지 세 분을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해 드리려고 합니다.

먼 길을 여행하는 피곤한 여행자처럼 여기면서 친히 물을 떠서 발을 씻기려고 했고 천막 안으로 인도해서 편히 쉬게 하고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성대한 음식까지 즉석에서 준비합니다. 성심성의를 다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서 세분의 천사 입장을 우리가 가정해서 생각해보면, 천사 세분이 평범한 인간들의 나그네 모습으로 왔음에도 불구하고 낯선 자를 경계하지 않고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공손하게 대접하니 참으로 칭찬할만한 태도이지요. 따라서 많이들 얻어 잡수시고 많이들 축복해주리라 우리가 짐작할 것입니다.

참고로 떡을 만들어 드리는 세 스아라는 고운 가루 양은 요즈음 부피로 해서 24ℓ나 됩니다. 엄청난 양이지요. 뿐만아니라 세 분들이 고기 잡수시라고 송아지 한 마리를 다 잡습니다. 50인분은 충분히 더 될 수입니다. 한 사람이 넉넉하게 1㎏씩 잡수신다고 계산해 보세요.

아브라함은 겸손하게 말해서 '조금'이라고 말했지만 실상은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는 성대한 잔치입니다. 과연 이 세분은 아브라함의 태도 여하에 따라 아브라함의 가정을 더욱 더 복을 주시려고 오신 분들일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왜 오셨습니까? 잡수실 것 실컷 잡수시고는 엉뚱하게도 자기들과 얼굴 맞대고 있는 아브라함에 대해서 언급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라가 어딨느냐?" 하시면서 사라를 찾습니다. 왜 그 현장에 없는 사라를 찾으실까요?

이 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누가복음 14장의 한 대목을 거론하겠습니다. 15절-24절에 보면, "함께 먹는 사람 중에 하나가 이 말을 듣고 이르되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 하니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 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이 본문에서 하나님과 인간과 함께 하는 장의 구성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함께만 있으만 기쁜 잔치가 성립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쁜 잔치에 같이 기뻐하는 심정으로 참석해야 될 자가 따로 있고 참석해서는 아니될 자가 따로 있습니다. 결코 숫자 한 사람이 아쉬워서가 아닙니다.

잔치의 의미를 모르는 자는 기어이 참석치 않게 하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좀 더 진전된 내용이 마태복음 22장에 나옵니다. 9절-14절에 보면 누가복음이 없는 내용이 추가해서 나오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 대 종들이 길에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 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올쌔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가로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저가 유구무언이어늘 임금이 사환들에게 말하되 그 수족을 결박하여 바깥 어두움에 내어 던지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여기에 보면 잔치에 참석하도록 초청되었다고 해서 제대로 된 잔치 손님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청함'과 '택함'의 차이를 예수님은 분명히 하십니다. 단순히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으로 천국 잔치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이 사람은 청함을 받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가 가슴에 담긴채 참석하는 자라면 그 사람은 '택함'을 받은 자입니다. 이런 취지에서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세 분의 천사들은 아브라함에게 후한 대접이나 받으려고 오신 분이 아니라 나름대로 복안을 가지고 오신 분입니다.

그 복안이 무엇입니까? "사라가 어디 있느냐?"로 시작하십니다. 창세기 3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수풀 속에 숨어 있는 아담 부부에게 다음과 같이 먼저 말씀을 던지십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입니다. 어디 있는지 몰라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름대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너를 찾아왔다는 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 분에 있어 진정한 기쁨의 잔치는 아브라함의 접대나 사라의 음식 솜씨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방적으로 통고하고, 예고하신 그 내용이 진정한 하나님과 인간과의 만남을 성사시킵니다.

실제로 천사는 말씀하시기를 "내년이 다시 올 터인데 오게 되면 그 때는 벌써 사라가 임신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즉 이삭의 잉태는 결코 아브라함 개인의 소원 성취 차원 일어날 일도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의 앞선 뜻이 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이삭을 잉태함이 예언의 마땅한 결과라면 앞으로의 모든 여호와의 예언도 빈말이 아니라 동일하게 성취될 내용을 지니고 있음을 분명히 하시겠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천국의 본질은 인간의 숫자로 자동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하나님께서 탱크처럼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는 뜻에 의해서 성립된 잔치이어야 합니다.

흔히들, 교회 교인들은 모두 자신들이 하나님의 택함을 받았다고 자부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간증이라는 것을 들어오면 자신들이 아쉬워서 애탈 때 그것을 채워주시는 식의 하나님으로 소개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옳지 못합니다. 전혀 하나님을 믿고 사랑할 마음도 안되고 도리어 하나님에 대해서 적대적 마음을 지니고 있었는데 하나님의 일방적인 밀어 닥치기 식의 능력으로 인해 비로소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라면, 예수님이 비유로 하신 말씀, 즉 예복 입지 않는 자를 마구 결박해서 지옥 어두운데로 데려가서 영원한 형벌을 충분히 실감 하고 있을 것입니다.

결코 자기 소원 성취의 하나님이 되어서는 아니됩니다. 하나님께서 잘 대접하니 하나님의 복주시더라는 식으로 나오면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으신 것이 "아브라함 착하다"가 아니라 "사라는 어디 있느냐"입니다. 사라에게 잉태하는 힘은 남편인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잘 모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아들 낳기 위해 천사를 초청하고 사전에 음식을 많이 준비한 것도 아니요 발 씻을 물까지 준비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천사 세분씩이 무엇 때문에 자신을 한꺼번에 찾은지 전혀 감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알게 되겠지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일에 참여되어 하나님의 일방적 뜻이 내장된 자만이 신자입니다.



잃어버린양 비유 - 누가복음15장

사람에게 있어 진정한 죄관념은 예수님과 더불어 있을 때만 밝혀집니다. 일찍이 다윗은 자신이 진정 죄가 무엇인지를 아는 상태에서 죄인됨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결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모친의 죄 안에서 출생한 그 자체가 죄인 되게 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윗 자신이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자신을 되레 죄인 되게 만드는 과정에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죄의 권세는 나의 허락도 없이 들락달락 마구 나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흔히들 사회에서 ,'정직하라 살라'라고 말을 하지만 이 세상에서 인간이라고 생긴 존재치고 매일같이 거짓말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울고불고, 반성하고 자책해도, 되레 그것이 자신이 죄를 가리는 역할 밖에 못하는 겁니다.

도박판에서 돈을 따기 위해 수고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의 기술과 오기와 투지와 집착을 나의 기술과 오기와 투지와 집착으로 꺾어버렸다는데서 오는 순간적인 희열을 맛보기 위해 끝까지 올인합니다.

우상이란 바로 이런 겁니다. 우상이란 자기가 반성해서 끄집어낸 죄를 자신이 실시하는 있는 방법을 사용하는 우상입니다. 이런 우상 가지고서는 늘 새롭게 피어오르는 죄를 그때그때마다 대처할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과거에 한 번 효과 본 그 방식에서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이로서 우상이란 이미 과거에 굳어져버린 것을 두고 말합니다.

인간의 반성 행위 다음에는 반드시 우상이 달라붙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해서 자체적으로 자신의 죄를 제거한 방식을 사용하게 되어있고, 그렇게 해서 스스로 의인으로 거듭 난 처럼 행세하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 안에서 도박판이 벌어지는 겁니다. 나의 기도의 능력과 헌금과 신에 대한 충성도가 자기를 지켜주는 판돈이 됩니다.

이 판단에 의해서 상대방의 판돈의 기세를 꺾는데서 오는 쾌감을 즐기는 곳이 교회가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만들고 이어놓은 사랑의 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우리 자신으로부터 출발래서 하늘까지 닿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우리 외부에 있습니다. 외부에서 쏟아부는 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받은 자는 자기 방어를 하지 않습니다. 이 사랑의 관계가 회개를 형성시킵니다. 이 회개에 대해서 적절한 예를 우리 주님께서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보면 '잃어버린 양' 비유가 나옵니다. 목자 뒤에는 목자를 졸졸 따라다니는 99마리의 양이 나옵니다. 하지만 진정 하늘나라에 기쁨을 주는 양은 그 99마리의 양이 아닙니다. 되레 잃어버린 양 한 마리가 기쁨을 줍니다. 목자가 그 잃어버린 양이 무사히 찾아 귀환할 때에 너무너무 기뻐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에서 오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의 관계로만 이어져야 하는 것이 성도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신자들은 이런 기쁨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이 쏟아지니,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강력하게 반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들이 스스로 미처 발견해내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 안에 이런 반발이 들어있습니다. 그래놓고서도 우리는 우리들의 반성력을 믿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자신이 근사한 존재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우리는 스스로 매일같이 잃어버린 양임을 자인해야 합니다. 매일같이 건져주시고 또 건져 주시는 주님 앞에,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두지 맙시다.



탕자비유 - 누가복음15장

하나님은 알기 쉬운 말로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소개하십니다. 젖먹이 아이와 그를 낳은 어머니의 관계랍니다. 젖먹이 어린아이는 비록 자기 엄마를 잊을지라도 성인인 어머니는 결코 자기 자식을 잊지 않습니다. 여기서 젖먹이 수준의 안목과 어머니 수준의 안목의 차이를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언제 젖먹이 같은 백성들이 하나님을 생각할까요? 13절 끝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그 백성을 위로하였은즉 그 고난 당한 자를 긍휼히 여길 것이니라". 즉 사람이란 고난 중에 있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알지 못합니다. 도리어 자립하려고 설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긍휼, 즉 불쌍히 여겨달라기 보다는 자기 하는 일에 협조하라고 기도할 것이 뻔합니다. 만약에 자기 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무응답이면, 인간들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나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하나님은 매정하게도 나를 버렸다"고 말입니다. 이것은 성경 말씀하고는 다른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이 어려워서 사람들이 성경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답변을 안 해주니 성경 말씀으로부터 눈을 돌려버리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토록 아쉬워 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긍휼이나 '십자가 피의 복음'이니 하는 것으로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것은 근본적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상의 성격이 결국 우리로 하여금 죽음으로 몰아넣는 세상인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남들보다 더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이 세상 자체가 우리를 죽이는 세상이고 우리는 그 세상 안에서 출생했습니다.

어떤 분이 암에 걸러서 우리보다 조금 일찍 세상을 하직하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자신은 더 좋은 나라에 먼저 가서 편히 쉬게 되었는데 남아 있는 여러분들을 여전히 세상에 남아 있으면서 고생을 계속해야 하니 참 미안하고 죄송스럽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이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져주기 위함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대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저 한평생 아무렇게 살다가 죽어서 눈 감으면 편안히 쉬면 그만이지"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십니다. 그 죽음의 세계라는 것이 단순히 눈 감은 깜깜한 세계 정도가 아니라 말로 표현이 다 안 될 정도의 고통의 세계라는 겁니다.

마가복음 9:43-45에 보면,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불구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나으니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생 손, 생 발을 톱으로 슬근슬근 잘라낸다고 생각해보세요.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진심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십니다. 장차 인간들이 죽어서 들어가게 될 지옥은 이정도 고통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극심하게 고통스럽다는 겁니다. 따라서 차라리 범죄한 생 손과 범죄한 생 발을 톱으로 잘라내는 한이 있더라도 나머지 지체로서만으로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될 곳이 지옥이라는 곳이라고 하셨습니다.

천국과 지옥을 만드신 예수님께서 친히 당부하시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참으로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하는 곳은 예수님 본인이 더 잘 아시기에 예수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것을 주시지 않고 도리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불쌍히 여겨주심'입니다.

빌립보서 1:29에 보면,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받아야 믿음이 생기게 되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단순히 믿음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 받는 것도 옵션처럼 따라 붙습니다.

왜 우리가 그냥 천국에 가면 되는데 고난이 따라와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떤 집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당겨 챙기고서는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그는 아버지없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을 몽땅 다 날려버리고 완전히 거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상거지꼴로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런데 아무 것도 없을 것이라고 여긴 이 탕자는 실은 가출하고 난 뒤에 많은 것을 들고 들어온 셈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빈 호주머니'입니다.

그는 자아가 비워있는 공간을 듬뿍 갖고 온 것입니다. 자기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바로 '전혀 없음'이 많이 달고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제 탕자에게 남은 것은 그 비워있는 자리에 오로지 아버지 것으로만 가득가득 채워지는 시간만 남아 있습니다.

그가 자기 것이 있다고 할 때에는 결코 아버지 것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것이 모두 상실했을 때, 비로소 아버지의 것이 들어오게 됩니다. 탕자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할 때는 아버지를 잊었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아버지는 아들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이 지옥같은 세상에서 탕자같은 우리를 예수님께서 건지시는데 왜 우리로 하여금 고난의 길을 가게 하시는 걸까요? 그것은 천국이란 오로지 주님의 것으로만 채워진 자에게 허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완전히 탕자임을 알게 된 자에게만 예수님의 것이 들어갈 여지가 생기는 겁니다.

아버지는 탕자를 위하여 소를 잡고, 가락지를 끼우고, 좋은 옷으로 입혔습니다. 만약에 이 복장을 하고 탕자가 이웃 어른들을 만나면 그 탕자는 만나는 사람마다 오직 아버지 자랑만 할 것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평생토록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를 지켜드렸다고 여긴 맏아들은 화가 잔뜩 나있습니다. 그는 자립형 인간입니다. 자기의 행함으로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칭찬받을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는 평소에 자기 생각만 한 것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고난을 모릅니다. 그저 자기를 위해 평생 고생만 했을 뿐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자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인간들이 이렇게 옳고 그름을 따지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연하게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감사하기 보다는 인간들이 나름대로 목적을 노리고 에덴동산에 산다는 것은 하늘 나라가 인간 나라가 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목적을 버려야 하는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천국가기'가 동원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지 않는 태도일 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비유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원래 뜻이 무엇인가가 잘 나와 있습니다. 아버지는 그동안 늘 곁에 있어준 맏이에 대해서는 크게 생각해주지 않으면서 아버지 재산을 바깥으로 돌아다니면서 다 탕진한 그 아들에 대해서 지극히 사랑하십니다. 그 탕자가 돌아왔을 때, 좋은 옷과, 가락지를 손수 끼어주시고, 소까지 잡아서 동네방내 잔치까지 베풉니다.

왜 그렇게 하실까요? 그것은 맏이하고는 달리 탕자는 아무 것도 자기 목적과 음흉함을 더 이상 내세울게 없기에 고스란히 아버지가 주신 사랑이 그 탕자의 심령에 안착할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대우받는 탕자에서는 결코 아버지 사랑이 흠집나거나 누수될 염려가 없습니다.

그래서 '많이 용서 받은 자가 많이 사랑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최종적으로 사랑만이 남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관계 말고는 다른 관계로 구원하시지 않습니다. 흔히들 기도를 어떻게 하면 되냐고 묻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사도 바울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에베소서 3:14-15, 18-19에 보면, "이러하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타인을 대하면서 노림수를 갖고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성도에게는 이것은 자신의 본성이 되어서는 아니되고 도리어 주님의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충만함이 본성이 되어야 합니다.


◈ 제2의 출애굽 !!? 제2의 출애굽 !!
* 애굽에서 출애굽했던 이스라엘이, 이제는 거꾸로 현재 이스라엘이 애굽화되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이것이 제2의 출애굽이 되는 것이다. 장소가 바뀌어 바벨론으로 잡혀가는 이것이 출애굽인데, 바벨론에는 고레스라는 새로운 메시야(고레스가 메시야 역할)가 나와서 70년만에 돌아오도록 한다는 것이다. 70년만에 말이다.?
(렘 29:10)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 70년만에 돌아온다는 것을, 이것을 나중에 다니엘이 알게 되는데, 그러면, 다니엘이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선지자가 이 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벨론 그 쪽에서 일어나서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인가?
(렘 29:15) 너희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바벨론에서 우리를 위하여 선지자들을 일으키셨다 하므로
(렘 29:16) 여호와께서 다윗의 위에 앉은 왕과 이 성에 거하는 모든 백성 곧 너희와 함께 포로 되어 가지 아니한 너희 형제에게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느니라
◈ 남은 자 - 하나님께 저주받은 경험이 있어야 회복된 자들이다 !!
* 잃어버린 돌멩이, 또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쪽에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잃어버린, 버림받은, 즉 하나님께 저주받은 경험이 있어야 회복된 자, 그들이 바로 남은 자라고 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 노아도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경험이 있었듯이, 하나님께 심판 받은 경험이 있는 자라야 남은 자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백 마리 양 중에서 한 마리 양을 기뻐하는 이유는, 그 한 마리 양이 잃어버렸던 경험이 있기에 그것을 고백하기에 기뻐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탕자 등, 이 비유들이 다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이 비유들에서 잃어버린 경험이 초점인데, 그러나 맏아들(바리새인)은 인간적인 상식 선에서 생각을 하는데, 나는 이렇게 잘하고 있으니까, 아버지의 기쁨에 참여할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탕자와 자기를 동일시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 [ 1. 저주 내려서 → 2. 잃어버려서 → 3. 되찾음 ] !!
* 예레미야의 남은 자도 역시 마찬가지인데, 아버지에 의해서 잃어버린 경험을 간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름대로 계획이 있는데, 그 계획이 [ 저주 내려서 → 잃어버려서 → 되찾음 ] 라는 계획인데, 그런데 세상의 인간들은 이런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 잊어버리지 아니하고(심판 받음이 없이) 그냥 이 상태에서 점점 더 위대하게 되어 구원되겠다는 것이 인간들의 보통 심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 세상에 거짓이 판치는 유다나라에 잃어버림의 계획을 집어넣는 것이다.
* 이것이 말씀대로 다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말씀대로의 계획에 예레미야가 동원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70년만에 돌아가는 이것이, 하나님의 원래 계획과 같기에 지금 포로로 잡혀가는 이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7이라는 숫자가 들어가는 경우는 반드시 하나님만이 하실 수가 있는 계획이라는 것이고 말이다.
* 예를 들어, '7일만에 창조' 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다 하셨다는 것이고, '70년 계획' 도, 이스라엘이 죄를 지은 양이 아니라, 하나님의 원래 계획이고 잃어버린 경험을 가지고 일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 여기서 다니엘서를 한번 보자.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 나가시는구나', '하나의 방해도 없이 기꺼이 이루어 나가신다' 라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말한 것을 다니엘이 받아서, 하나님께서 자기 계획대로 반드시 이루어 나가심을 깨닫는다는 것이다. 철저한 하나님의 고집 '하나님의 열심'이 이룬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열심 !!
(단 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 '연수를 깨달았다' 라는 것은, 70년만에 마친다는 예레미야의 말을 다니엘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70년이구나' 하는 것을 안다. 그러면 이 70년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 뒤에 보면 알 수 있는데, 선지자하나 뽑아 내는 기간이 70년이라는 것이다.
* 다시 말하면, 70년이 하나님이 손수 한 년수 라고 했는데, 그러면 70년 동안 하나님이 노시는 것이 아니고, 그 기간 동안에 이스라엘이야 놀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다윗 같은 왕을 만들어 내고, 선지자 만들어 내고, 성전 만들어 내고, 영원한 언약을 만들고, 새로운 영원한 공동체 만들어내고, 이런 일들 하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억수로 바빴다는 것이다. 즉, 그것이 완성된 이 일을 다니엘 9장에서 '70이레' 라고 하는 것이다.
* 지금 예레미야가 말하고 있는 그 내용을 다 충족하는 기간이 70이레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70년간 포로 잡혀 있는 이 기간도 하나님께서 하신 그 모든 70이레의 계획 속에 일부에 다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이다. 성전을 가서 짓는데 성전이 와장창 깨지고 새로운 완벽한 성전 세워지고, 메시야가 등장하는 이것이 이미 예레미야의 말씀 속에, 즉, 예레미야의 가방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이다. ?



불의한 청지기 비유 - 누가복음16:1-9

성경에 나와 있는 나쁜 자들을 보게 되면 정말 자신을 지으신 자를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증오심을 절로 일어납니다. 하지만 어느새 점차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가 되어가는 우리 자신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즉 자신이 오로지 하나님만을 위해 살겠다고 나설 때,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를 하나님과 더불어 미워할 수가 있는데, 어느새 자신조차도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면, 도리어 하나님을 안 믿는 그들 편에 서 있고 싶은 충동을 갖게 됩니다.

동질감을 느낀다고나 할까요. 하나님을 멀리 할 수밖에 없는 자들끼리의 동질감을 공유하게 되는 겁니다. 즉 그동안 하나님 믿어보려고 최선을 다했지만 역시 하나님은 없더라는 겁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사용되는 각종에 용어들과 개념들을 남발해보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신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척하는 것도 세월지나면 따분하고 지겁기만 합니다. 차라리 속질하게 "신은 없었더라"라고 양심선언하고 나서는 편에 속시원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이 실은 예수 잘믿는다고 여기는 각자의 마음 속에 다 들어있습니다. 지금 잘 믿는다고 자부하기에 하나님에 소홀히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당연히 분개하겠지요. 그러나 어느새 자신이 전에 비난했던 자들보다 더 하나님과 멀어진 생활을 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튜브 가지고 해변 가까이 논다고 여기다가 한 눈 팔다보면 벌써 해변하고는 저만치 멀어져서 자기 힘으로 도저히 되돌아 올 수 없는 지경까지 가버리는 경우와 같습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듣게 되는 말들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엄마가 지옥간다면 나도 엄마 따라 지옥갈거야"

글쎄요. 지옥 가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지옥도 하나님의 허락과 능력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서 2장에 보면 엘리 제사장이 나옵니다. 이 집안은 저주받게 되어 있는 집안입니다. 저주받는 이유도 나와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랍니다.

그렇다면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면 저주받지 않는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논리로만 그렇지 실제로는 어느 인간이 하나님을 자기 자식보다 더 사랑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엘리 제사장이 하나님보다 자기 자식을 더 사랑하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했다는 조건을 가지고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구원될 자가 없듯이 어느 누구도 자력으로 하나님을 자식보 더 사랑할 위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엘리 제사장의 두 자식은 평소에 하나님이 어떻다는 것을 이론상 많이 듣고 자라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이론을 앞장 세운다고 그 사람을 신자라고 간주해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단지 하나님은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 자기 마음대로 본색이 드러나게 하시고야 마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삼위일체에 정통하고, 신학을 많이 안다고 해서 그것으로 인하여 '신자'라고 하나님께서 인정해주시기 않습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힘으로 구원이 어떻게 성사됩니까? 성사될 수 없습니다. 성사가 불가능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어린 사무엘을 보세요. 부모는 그를 던져 놔버렸습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무엘은 구원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방식을 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약속입니다. 즉 약속이란 사람들에 의해서 포착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방식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약속 성취의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있지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위치에 있습니다.

소위 불의한 청지기라는 비유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어떤 경리보는 직원이 장부를 제멋대로 조작해서 자신의 앞길을 여는 자금이 되고자 했습니다. 이것은 횡령이요 도덕질입니다. 누가 봐도 이 직원은 나쁜 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하필이면 만인이 보이기 나쁜 자를 거론할까요?

그것은 소위 자기 능력으로 구원될 수 있겠다고 자부하는 소위 의로운 지혜자들을 부정해버리기 위해서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들이 주장하는 신에 관한 화려한 용어들이나 행위들을 피해서 숨어있는 약속의 능력으로만 구원하십니다. 인간들하고 구원에 대해 타협할 의사가 없으시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관심두지 않고 무시하는 자리에 있습니다. 인간들이 열심히 해서 자기 자신을 꾸미고 자기 자신을 성숙케 하겠다고 노력하는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묵묵히 제 모습을 갖추어나갑니다. 마태복음 13장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악마가 뿌리 가라지에 대해서 손대지 말고 그냥 두러라"라고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이 세상은 가라지도 함께 자라납니다. 우리 인간들이 나서서 가라지를 아예 뿌리채 제거하려고 해서는 아니됩니다. 인간들은 마치 자신의 최고로 의로운 사람인 것 같지만 실은 숨어있는 하나님의 작업이 따로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앞에서 조그마한 어린 아이를 내세우시는 식이 예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같이 하늘나라를 섬기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섬김을 받기 보다는 섬기는 자가 되어라 는 말씀은 인간들을 대단한 열성이나 속은 맹렬한 저항과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작업이 차질나는 경우는 없다는 말입니다. 엘리의 두 아들은 필연적으로 죽이기로 하나님께서 작정해 두신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훈계로 고쳐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믿음없는 자는 그냥 믿음없는 자로 살아갈 뿐이요 그들의 눈에 띄지 않는 사무엘의 세계는 차질없이 등장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방식입니다. 악마의 일로 너무 불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마의 일꾼이 악마답게 하는 것도 다 하나님의 약속 속에 포함된 내용들입니다. 인력으로 존중할 수 없는 하나님을, 하나님의 약속의 능력에 의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만 아는 자들이 성도입니다



소경된자를 고치시는 예수님 비유 - 요한복음9장

( 요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 요 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며 - 혈통으로 나지 않은 것을 강조하는데, 그러면 혈통으로 나면 어떠한가? 그러나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나시지를 않았는가?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군의 혈통으로 태어났다고들 하는데,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위에다가 성령을 주시면 안 되는가? 그런데 왜 혈통으로 나지 아니했다고 강조를 하는가?

* 우리가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면 예수님도 혈통으로 나지 아니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님이 혈통으로 난다 안 난다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예수님을 [ 인간 + 하나님 ] 이라는 개념으로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예수님이 인간 혈통 안에서 무슨 일을 하셨느냐? 이 말은, 혈통으로 나지 않는 다른 방식으로 적용시킨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 인간 + 하나님 ] 이라는 존재론적인 방식은 예수님에게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다' 라고 하는 것은 성경하고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이 인간인 동시에 하나님이라면, 우리도 혈통으로 나지만 또 하나님으로 나야만 한다는 과정을 거쳐야만 하지를 않는가? 그러나 이와 같은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 라는 이야기는, 바로 '예수님이 인간이며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언급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가 성도라면(요 1장), 예수님도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로마서에 의하면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났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수님의 다윗의 혈통으로 태어났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인성(人性)을 취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 세계에 무엇을 하시기 위해서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이 인간이 안 되면 뭔가 불완전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처음부터 성자에게는 무엇인가 불완전한 것이 존재하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인간이 안 되면 성자로서의 미흡함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 성경전체가 '성자의 존재를 어떻게 만드느냐' 라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을 하실 것이냐' 라는 것에 초점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다윗 혈통으로 오신 것은, 인간 세계에 일을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빌립보서 2:5-11에 나와 있다.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함' 이라고 말이다.

( 빌 2: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 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 빌 2:7)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 빌 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 빌 2: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 빌 2:10)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하시고
( 빌 2:11)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 이것을 그대로 우리에게 적용을 시켜보면,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난 뒤에 인간이냐 천사이냐' 하는 것과 관련이 있는데, 그러나 차영배 교수는 여기서 인간에게 두 인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반대하는 것이다. 예수가 있고 또 우리가 있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다중 인격체로서 귀신에게나 적용되는 것이지, 인간에게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 교수의 주장은 뭔가 본 의미에 대해서 초점을 잘 못 맞추고 있는 것이다.

*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로 난 자라는 말을 요한복음 9장과 연관해서 살펴보면, 요한복음 9장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누구 죄 때문입니까?' 라고 묻는 대목이 나오는데, 여기서 제자들은 소경을 죄와 연관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소경이 죄인繭窄? 소경이 아닌 사람은 의인이 되고 마는 것이다.?

( 요 9:1)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 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 그러나 요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의 해결책은 '소경이 아닌 사람이 소경이고, 소경인 사람은 의인이다' 라고 하시는 것이다. 오히려 역전이 된다는 것이다. '사물을 본다고 하니 네가 바로 소경이다' 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부모의 죄도 자기의 죄도 아니라는 하시는 말은, 그 소경에게는 전혀 죄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는 죄와 의에 대한 관점으로서 인간을 파악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존의 죄관과 기준점으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다.

* 이 사람이 소경이 된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의 일인 것이다. 지금 소경 앞에 예수님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소경은 예수님 자신의 반사체가 된다는 것이다. 지금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죄와 의에 대하여 잘못된 관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 하는데, 어두움 속에 있으니 몽땅 소경이라는 것이다.

* '몽땅 다 어두움이며 소경이다' 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소경 하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경의 눈에다가 진흙을 바름으로서 씻을 거리를 주었다는 것이다. 진흙을 바르기 전에는 씻을 거리가 없는 반면에, 진흙을 바른 후에는 씻을 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 보내심을 받았다 - '실로암 못에 가서 씻는다' 라고 하는 것은, 즉 소경이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는다는 것은, '보내심을 받았다' 라고 하는 실로암이라는 못 가에 가서 씻는데, 이러한 모든 과정은 예수님의 모든 속성을 반사해 준다는 것이다.

* 소경을 고치신 이유 - 예수님의 존재를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왜 이 땅에 오셨는가를 보여주기 위해서 소경의 눈에 진흙을 바르고 실로암 못 가에 가서 씻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씻어주기 위해서, 하늘에서 이 땅에 보내심을 입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소경 하나를 불러서 이런 일을 시킨다는 것이다.?

* 그런데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그들은 예수님을 외모로만 본다는 것이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라고 말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자꾸만 혈통적으로나, 존재론적으로만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너희들이 내가 행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을 보라" 라고 하셨던 것이다. 예수님의 외형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신 것을 통해서 판단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 아주 놀라운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고, 기존의 우리가 생각하고 의식하고 있는 것을 뒤집는 일을 자꾸 반복하신다는 것이다.

* 우리가 살아가면서 명심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은 성경에서만 뒤집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우리의 생각하는 것이나 예상치 않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속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택행위를 이용하셔서 뒤집어 놓으신다는 것이다. 설교를 한번 잘했다 싶으면 그 다음 주일에 왕창 빠져 버리고, 죽을 쑤었다 싶으면 은혜 받았다고 고마워하고 말이다.

* 이 내용이 열왕기상에 나오는 것이다. 남쪽 유다나라가 전쟁을 할 때에 르보호함이 북쪽 이스라엘과 싸워서 이기고 난 후에, 까불다가 애굽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솔로몬 때의 보물을 다 빼앗겼다는 것이다. 후대에도 계속해서 겸손할 때는 전쟁에서 이기게 되어 있지만, 그러나 한 번 이기고 난 후에는 철저하게 망한다는 것이다. 남쪽이든 북쪽이든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 그러면 '계속 겸손하면 되지 않겠는가' 라고 하겠지만, 그러나 계속 겸손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교만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 있어서 겸손이라는 것은 없고, 나아가서 신앙생활은 절대로 못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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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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