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가 판치는 난무함 속에 부르짖는 자 단 하나도 없는 세상으로 만드시는 인자

기도가 판치는 세상 속에서 부르짖는자 없는 믿음을 못 보겠다는 인자의 때(마지막 날)

예수님의 비유는 항상 부재성으로써 그 차이를 드러내신다.

공산국가에서 기도 하나로 버티다가 내려온 자유를 맞이한 자들의 기도와 간증은 이제 한 물 간 유행이 되어버린지가 오래 되었다.

이제 어디에도 부르짖는자는 없다.

아쉬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거짓선지자들에게 미혹이 되어 평강이다 평강이다 심판은 없다고 라고 선언된 이 땅 이 세상인 마당에 무슨 부르짖음이 있으랴?

그래서 예수님은 못땟고 잔인하고 강퍅하기 짝이 없는 애굽 파라오 왕 하나를 키워 두신다.

이유는 딱 하나 이다.

예수님만의 아이디어로 나타나는 사건이다. 즉 탈출 사건인 엑소더스다.

탈출이란 어디에서 갇혀서 어디로 빠져나가는 두 영역의 선이 그어지는 상황이다.

그래서 주님만이 벌리시는 일이 부르짖음을 유발케 하는 강퍅한 왕 세우기요
그 세상 왕과의 차이성이 바로 부르짖음을 듣고 탈출케 하시는 분의 등장이다.

바로 이런 전쟁의 구도에서 적과 그리고 그 적의 손에서 끄집어 내는 자 인데

오늘날이나 노아때나 롯의 처가 있었을 때나 예수님이 활동하던 그때나

믿음은 없었다. 즉 부르짖음이 없었다.

적이 없다.

그래서 억울한 한을 풀어 달라고 부르짖는 자가 없다.

적이 없으니 뭐가 아쉬워서 부르짖겠으며 원한을 풀어달라고 악한 재판관을 붙잡고서라서 풀어달라고 하소연을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고상한 티를 내는 사적인 기도 사적인 구원 챙기고 때우고 그런 우상에게 빠져 있는 증거로써 기도채우기에 바쁠 뿐이다.

즉 기도(기적)가 가득한 악한 세상에서 더 기도 잘하는 테크닉만을 요구할 뿐인 악한세대일 뿐이다.

그러나 주님이 보여주실 기도는 (일용할 양식인 예수님의 살과 피인 그의 나라와 그의 의 이다.) 십자가 상에서 보여주신 다 이루었다 라고 외치신 완료 이다.

그런데 그 완료가 전혀 완료스럽지 않은 [없음]으로만 보인다.

맞다 그 [없음]을 가지고서 모든 기도를 깨뜨리시는 것이다.

모든 우상에게 기도하는 그 기도를 거짓되게 하는 액션인

바로 성령의 한 풀이인 탄식이다. 여기에 모든 피조물들도 부르짖는다. 어서 주님의 자녀가 나타나기를 말이다. 왜? 전쟁을 벌릴자들이기 때문이다.

즉 집단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사조직화 된 이스라엘은 적이 없다.

적이 없는 성도는 가짜다. 사조직을 결성해서 자기유익만 챙기는 우상만을 쫏는다.

그래서 일 주일에 두 번 금식 기도 했고 십의 이조를 드렸다고 사적인 행위만을 내세울 뿐이다.

그러나 바로 그런 자들에게 공격받는 세리야 말로 인자의 덮어줌 앞에서 발가벗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는다.

맞다 성전 안에서 두 사람의 기도에서

적을 발생시키는 기도와 부르짖음은 바리새인이 아니라, 세리 였다.

이스라엘이 정작 주님 앞에 드러나는 모습은 섰다고 먼저 되었다고 하는 행적 실적이 아니라.

아무것도 한 것 없이 주님 앞에서는 늘 발가벗겨진 죽은자요(세례: 물 속에) 무능자요 무가치한 죄인되고 원수된 모습 뿐이라는 것이다.

그 기도의 부르짖음이 오히려 바리새인의 공격성을 더욱더 자극한다.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한다고 차이성을 저들의 입에서 스스로 내 뱉도록 말이다.
(눅 18:10, 개역)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눅 18:11, 개역)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바로 이런 부재성을 가지고서 주님은 비유로 증거하신다.

바리새인 저들이 차이성을 두고싶을 정도로 세리의 행동들이 바리새인의 눈에는 반드시 부정스러운 것이다. 맞다 부정하고 악취가 나니 멀리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인자는 그 허물을 덮어주시는 발가벗은 자를 찾으신다.

주님이 덮어줄 옷을 들고 오셨으니 누가 그 주님에게 딱 맞는 자 일까?

벗은 자 이다. 고아 과부 나그네 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의 모습이요 이런 모습으로써 구약의 여호와 전쟁을 벌리신 것이다.

반드시 여호와의 전쟁에 앞서서 단 한 사람도 빠짐 없이 할례를 하신 이유다.

즉 힘으로 하지 않는 전쟁이요 행적 실적으로 인간의 능으로 행함으로 하지 않는 전쟁이다.

도리어 발가벗겨짐으로써 하는 전쟁이다.

누가 덮어준줄 아느냐? 우리 주님이다 라고 덮어준 주님을 무시하는 놈들 다 치겠다는 전쟁이다.

그래서 발가벗겨진 자를 찾으시는 이유도 여호와의 전쟁 십자가의 전쟁 성령의 전쟁
육의 소욕과 영의 소욕의 차이성이 드러내는 전쟁으로써

발가벗겨진 자와 그것을 비방하는 자를 들추어내는 긍휼을 용서를 모독하는자를 유발케 하여 심판하는 전쟁이다.

노아는 그 자체가 할례 덩어리로써 발가벗겨진 자로써 뒷걸음질 쳐서 덮이움을 당한 은혜였다.

그 은혜를 엉터리로 사적인 구원 사적인 은혜로 챙겨버린 이 함에 대한 공격이 (함땅=애굽나라, 가나안 땅)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이 없는 세대는 악마가 다 장악한 세대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기준으로 해서 할레 언약이 주어진다.

즉 일부러 무능케, 발가벗겨진, 아무것도 한 것 없는, 처음자리인, 그 피 발리움만을 증거하는 피의 믿음의 조상인 것이다. 피남편인 모세처럼 말이다.

왜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가? 성령의 탄식으로써 성령의 적을 보시게 하고

십자가의 원수를 보여주심으로써 그 십자가의 원수가 자기 살려고 구원을 사적으로 챙기는 자임을 들추어 내고자 벌거벗기움을 당한 죽은자와 방불하고 불임여성과 같은 바로 부정한 자들이다.

이 부정한 자들을 미끼로 삼아서 저들의 선함이 얼마나 더 악하고 더 더럽고 사적으로 챙길려는 사조직인 우상숭배자임을 들추어내신다.

그래서 불의한 청지기가 딱이요, 세리와 강도와 창녀가 딱이다.

누가 저들을 공격하는가? 선줄로 아는 자들이다. 그들이 바로 이들의 적으로써 숨겨진 적이 등장케 되는 유발성을 바로 부정한 모습 심판 받은 모습 벌거벗겨진 모습

할례의 모습 세례의 모습으로써 저들의 숨겨진 악마성을 드러낸다.

할례를 여호와의 전쟁 전에 한다는 것은 곧 자살 행위 이다.

아니 이미 난 죽은 자입니다 라고 선언하는 전쟁이다. 그래서 개인적인 승리를 따로 챙길수가 없다.(여성에게서의 할례의 의미는 곧 불임여성이다. 부자에게서의 할례의 의미는 세례의 의미는 가난한자에게 다 나누어 줌이다.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베드로에게서의 할례의 의미는 먼저 된 자 나중되고 나중 된자 먼저 된다는 버린 행적을 지워버리는 일이다. 삭제 이미지다. 발가벗기움이요 잃어버림이요 무능이요 처음자리이요 고아 과부 나그네인 기업무를자가 외부에서 와야만 하는 의미가 할례요 세례의 의미이다.)(현재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여성 할례 문제로 여자가 더렵혀 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여성의 자궁을 다 드러내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러다 죽어도 거룩한 일을 수행했기에 그것으로 족해버린다. 의무와 책임을 다 한 것처럼 위선을 떤다. 마치 이슬람 문화에서의 딸을 총으로 쏴 죽이는 [명예 살인]과 동일하다. 즉 인간이 안 더러운 것을 지킨다는 짖이 바로 더러운 짖으로 치다는 것과 같은 식으로 인간의 선이란 곧 악이다.)

도리어 죽은자로써 도저히 나타날 수 없는 승리를 보는 것은

물에 빠진자로써 비로소 보게 되는 물 위에서 건져내시는 분과의 차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를 물 위를 계속 걷도록 하면 안된다. 반드시 빠뜨려야 하신다. 반드시 세 번 부인케 만드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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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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