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지나가리라 (사 65,17-20).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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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19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지나가리라 (사 65,17-20)


(고후 5:17, 개역)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계 21:1, 개역)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롬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롬 8:8, 개역)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사 7,10-16)
이사야 2017 2020. 12. 27. 12:56
18-118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라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사 7,10-16)

〈이사야 65:17-20, 개역한글, 구약성경 1046 쪽, 찬송가 403장 나 위하여 십자가의, 
318장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18) 너희는 나의 창조하는 것을 인하여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으로 즐거움을 창조하며 그 백성으로 기쁨을 삼고
(19)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하리니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그 가운데서 다시는 들리지 아니할 것이며
(20)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 받은 것이리라

(사 65:17, 새번역)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니, 이전 것들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떠오르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사 65:18, 새번역)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길이길이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아라, 내가 예루살렘을 기쁨이 가득 찬 도성으로 창조하고, 그 주민을 행복을 누리는 백성으로 창조하겠다.』
(사 65:19, 새번역) 『예루살렘은 나의 기쁨이 되고, 거기에 사는 백성은 나의 즐거움이 될 것이니, 그 안에서 다시는 울음 소리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 65:20, 새번역) 『거기에는 몇 날 살지 못하고 죽는 아이가 없을 것이며,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을 것이다. 백 살에 죽는 사람을 젊은이라고 할 것이며, 백 살을 채우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받은 자로 여길 것이다.』

(사 65:17, 쉬운) 『<새 시대가 온다> “보아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이다. 옛날 일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 65:16, 현대어) 『그때에는 세상에서 서로 복을 빌며 인사할 때에도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인사하고 세상에서 서로 맹세할 때에도 `참되신 하나님'이라고 맹세할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 여호와께서 계속 말씀하셨다. `그때에는 이전의 모든 환난 고통을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과거에 없었던 것처럼 그 환난 고통이 내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왜 저주를 언급하시는 것일까요?

그 정도로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한 세트로써 구성시키시는 이유는

무엇이 철저하게 저주 받아야 할 꺼리인줄 모른다 라면
새 하늘과 새 땅의 의미도 모른다 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네 맞아요 기존의 것은 철저하게 저주 꺼리이다 라는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의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후손들에게 바른 길을 인도하고자
선지자의 무덤을 아름답게 꾸미면서 교육함에 있어서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다면은 절대로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세상 사람들끼리 통하는 말이지
정작 진리 되신 하나님에게는 통하지 않는 소리이다 말이죠
아무리 바른 소리이고 올바른 소리 일지라도 말이죠
왜냐하면 경건의 모양은 대따 갖추었는데
경건의 능력이 없기에

역시나 다시 되돌아 가본들 선지자를 또 죽일 수밖에 없다 라는 겁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사회 구조를 짜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는 겁니다
인간이 아무리 개인 사적으로
성경 지식을 습득해서 아무리 자신을 바른 길로 간다고 여겨도
이미 땅 자체가 우리를 몰고 간다 라는 겁니다

사람은 착각하기를 차가 있고 그 차를 운전하는 내가 있고

그 차와 내가 하나가 되어서 운전하면
어떤 길이든 내가 차를 끌고 가고픈 대로 갈수 있다 라고 여긴다 말이죠 (개인 숙제)

마침 데브스 라는 미드 리뷰 때문에
갑자기 양자컴퓨터와 자유의지에 대해서 언급을 많이 하더라 말이죠

넷뗑렉스는 어떤 분의 도움으로 볼수가 있지만
이거는 아무리 구할려고 해도 안되어서 어떻게 보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도움 주실수 있는 분이 있으면 좋겠군요 메일로 보내주이소 ㅋㅋㅋ
아무튼

결정론이 되어버리면 자유의지란 없게 되거든요

자유의지란 쉽게 말해서 판단권이 있다고 착각하는 것인데
없음을 앞의 글 마태복음에서 언급했습니다
그렇다고 결정론이 맞냐
그것도 틀렸어요 어떻게서든 판단한 것이거든요
판단이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음으로써 하나님과 같이 되었기에
지극히 사적인 결정론이다 라는 겁니다
자꾸 개인을 바꾸고 싶어 해요
왜? 개인이 하나님이 되었고
하나님이 되고자 판단을 해야 하니까 말이죠

그런데 그런 개개인의 차가 발통을 굴려서 굴러가는게 아니라
땅이 움직여서 자동차의 바퀴를 돌리고 있다 라는
전체 구조가
새 하늘과 새 땅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라는 겁니다
마귀도 지 마음대로 못하는 판국인데 인간이 자유의지라는 둥 결정론이라는 둥
그래서 과학은 종교가 되어버린 것이다 말이죠 자꾸 믿음을 집어넣을려고 해요 글쎄
종교가 가진 권력을 부러워 해서 말이죠

그래서 다들 과거에 집착 하잖아요
그때 조상때로 돌아가게 돼면 절대로 선지자를 안 죽였을것이라꼬
개인 사적인 소망을 넋두리 하듯이 한풀이 하는 겁니다

즉 이들에게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별 신통찮은 소리일 뿐이다 라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기존의 것이 왜 저주를 받아야 하는가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꾸 과거의 것을 끄집어 와서
잘 된 것은 옳게 여기고
실수한 것은 늘 찝찝하게 수정하고픈 대상으로 남다 보니
그래야 미래를 좋게 열수 있다 라고 본거다 말이죠

그런 미래는 미래가 아니지요 과거의 반복일 뿐

정작 새 하늘과 새 땅은
과거의 것을 없애 버린다 라니깐요

그런데 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언약은 바로 십자가가 되어버리니까
유대인들이 이 십자가를 얼마나 무시할까요

목에 탁 걸려 넘어가지도 않고 뱉어지지도 않는 겁니다.

미래고 과거고 현재이고 나발이고
졸지에 목에 탁 걸려서 다 빨려들어가는 블랙홀
시간도 공간도 다 무의미해져 버리는 블랙홀에 걸려 넘어지게 되어버렸으니 말이죠

이게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라는 겁니다

즉 저주를 도리어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왜 애굽이 멸망 당해야 함을 구체화 하고자
1000년 만에 천년이 넘으면 역사에서 벗어난 사건이다는 겁니다 묵시 이다는 겁니다
다시 살려냈다가 
겨우 살려놓고 바로 또 죽여버리는 겁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을 하실까요?
누구 보라꼬

네 이스라엘 보라꼬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를 애굽에게 보여준다 라고 알까요?
결과적으로 누구에게 알리시는 겁니까

네 맞아요 이스라엘입니다
존재가 아닌 기능

그럼 이스라엘은 이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라 라는 것을 알아서
지식적으로 알아서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내가 여호와인줄 알리시는 그 주의 이름의 증상물로써

죄인으로써
죄인 중의 괴수로써
원수로써 등장하는

증상물이다 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루살렘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이 아니무이다 가 되는 거죠

내가 여호와 인줄 알리라를 알려주시지도 않았는데

등장하는 이스라엘은 아무리 혈통 육정 사람이 뜻으로 이스라엘이라고 도배를 해도
이스라엘이 아닌 겁니다
존재라고 우겨도 말이죠

기능은 정작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잉태한 증상물이 새이스라엘이어야 하니까 말이죠
그렇다면 도리어 기존의 이스라엘은 저주 받아야 함을 도리어 나타내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등장 때문에 말이죠

그러니 좋아 기뻐할까요 아니면 저주 할까요
예수님을 저주 하는 겁니다

자신들의 저주를 감추기 위해서 말이죠
그러니 반드시 맞물리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저주 받아야 할 자를 구체화 시키는 겁니다.

어떻게?
100세를 못 넘는 수명은 다 저주 받은 자 라꼬 말이죠

생명나무 안에 거하는 자는 축복이고
생명나무 안에 거하지 못하는 자 곧 선악의 판단으로 사는 자는 저주 이다는 것을
100세라는 증표로써 오늘 문에 언급하고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상대적인 한 세트로써 대조적인 이 땅 곧 헌 땅에서 나이 들어 늙어서 죽는 모습이 저주 받은 모습이다 라고 말이죠

다윗언약에 기초하고 있는 이사야의 증거는
그럼 다윗은 그럼 100세를 넘었나
당연히 못 넘었죠

그럼 이 100세는 어디서 온 겁니까

어떤 장로님은 므두셀라를 아주 부러워 했다 말이죠
성경에서 가장 오래 산 사람을 므두셀라로 다들 알고 있습니다
만약 그 당시에 므두셀라가 965세로 살 정도면
실제로 그 당시는 700 800은 기본이다 말이죠
그러니 므두셀라 보다 오래 산 사람들이 많았다 말이죠

문제는 그것만 우리 관심사 이지
정자그 1000년을 못 채웠다 라는 의도적으로 천년을 못 살게 했다 라는 겁니다
그것도 죽었더라 족보에서 말이죠 아벨족보 말이죠

그러니 오래 살았다 라는 의미가 아닌 거죠

공장에서 일할 때 그 장로님이 므두셀라만 생각하면 그저 웃어요
너무 너무 부러워서 말이죠
그런데 놀랍게도 에녹은 안 부러워 해요 이상하죠
더 나은 더 큰 것은 안 부러워 해요

(창 5:21, 개역)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개역)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3, 개역)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창 5:24, 개역)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창 5:25, 개역) 『므두셀라는 일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창 5:26, 개역)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7, 개역)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자 그럼 다윗은 몇 살을 살았을까요?

네 맞아요 70세
그 당시 평균 수명이 50 정도이다고 하던데 70이면 장수했다 라고 인터넷에 그렇게 검색이 되던데 아닙니다

므두셀라 965년 도 저주 받은 것이고
다윗 또한 70세 저주 받은 것이고
솔로몬은 더 적어요 60세 쯤 61 인가? 솔로몬 역시나 저주 받아 죽는 겁니다

1000년도 못 살았고
100년도 못 살았다 말이죠

(시 90:9, 개역)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일식간에 다하였나이다』
(시 90:10, 개역)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얼마나 빠른지 날라간다 즉 포착할 수가 없다 라는 겁니다

나 참 오래 살았지 라고 했는데 이미 죽어야 한다 라는
시작하자마자 태어나자마자 늙어 죽어야 한다 끝마쳐야 할 정도로 날라간다 라는 겁니다
포착 불가인데 
포착했다 라고 우겨도 아이고 의미 없다 라는 것이 된다는 거죠
다윗도 이런 판국인데 우리일까 보냐 말이죠

천년이 하루 같을 정도로 일식간에 다 해버리는 이것이 주의 분노 진노 중에 저주 중에 있다 라는 것을

남도 아닌 다윗이 보여주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모세가 변화산에 나타나서 주여 죽어주소서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일관적으로 우리에게 계속해서 펼쳐졌다 라는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우리가 만약에 그때에 있었다면 조상들처럼 선지자를 안 죽였을텐데 라는 다짐이

먹혀들지가 않는다는 겁니다

늘 일관적으로 하나님의 저주 속에 노출 되어 왔다 라는 겁니다
출애굽에서 애굽군사가 따라오면서 여호와가 누구인줄 보여주시는 것은
바로 애굽 보다 이스라엘 보라꼬 하신 겁니다

즉 너희도 이렇게 저주 받아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은혜로 두손을 아쿠아 룸처럼 보호하셨다 라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을 자기가 잘났다 라고
바르게 살았다 라고 여기게 될까봐
사탄의 가시를 푹 찔러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라 라고 하시는 겁니다.

광야 죽음 황무지 모래사막 속에 집어넣어서
너가 잘 나서가 너의 선악의 판단 옳은 것은 선택하고 잘못된 것을 버리겠다 라는 그 심뽀를 탈탈탈 광야에서 털어서
오로지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써만 오로지 은혜로만 구원받는 줄 알아라 라고
이 하나님의 지식 아는 지식
이 하나님의 의 곧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리심 예수님의 십자가 지심 덕분인줄 알아라 라고
100세도 못 넘는 저주 받은 주제에
너무 너무 불쌓이 여겨주셔서

너가 남을 7번 용서해서가 아니라
도리어 너를 7에 70번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용서를 받았기에
이 은혜로만 들어가는 나라가 바로

주여 당신의 나라에 저를 기억해 달라는

진리의 하나님 나라
아멘의 하나님 나라
뭐든지 예가 되는 십자가의 피 용서라는 십자가의 사랑이다 라는 것을

이 새 하늘과 새 땅에는
헌 이름을 가진자
곧 새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자는 못 들어가는
저주 속에 놓여져서
그 기존의 옛이름대로의 운명으로만 살도록 되어 있는

독사의 자식아 지옥을 피할려고 아무리 선함을 갖추어도 안 된다 라고 하시는 겁니다

이미 지옥 자식이 결정이 되었는데 뭘 피할려고 무덤을 회칠 아름답게 겉 모양을 경건의 모양으로 채우느냐
그 자체가 이미 악하다 라는 겁니다
속은 악으로 가득차 있는

조상의 몫을 또 채우고파서 한다 라고
아무리 육체가 속마음을 감출려고 꾹꾹 누르고
겉으로는 옳게 보일려고 나타낼려고 드러내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은
곧 새 하늘과 새 땅은 뒤 바꿔 버리는 겁니다

만약 새 하늘과 새 땅이 예수님 이라는 인물이다
그 인물을 줄게 라고 하면

또 다들 아뇨 싫습니다 라고 할 껍니다
왜죠
네 맞아요 나를 삭제 시키겠다 라는 의미이거든요

우리는 주님이 가진 소유물을 원하는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을 바라고 있지
요나의 표적 곧 예수님 자체를 예수님의 운명을 저 주세요 라고 바라는 자는 아무도 없다 라는 겁니다.

자 이렇게 우리는 이 선악에 대한 하나님의 질투를 봄으로써 보고 느끼고 겪음으로써
이 진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 곧 질투의 사랑으로 인해
여호와가 누구인줄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 저주를 거쳐서
저주를 통해서만 은혜를 알게 하시는 겁니다

이런 육체의 일은 진리의 하나님으로부터 새 이름 다른 이름을 부여받지 못함을 말이죠

육체의 일은 도리어 가장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바리새인들로 인해서
주님께서 들추어 내셨습니다

그들이 옳게 여기는 금식이나 회개나 기도나 안식일 지키기나 이웃사랑 실천이나
이 모든 것들이 겉으로는 옳게 보이고자 함이고 속으로난 악을 감추는 식임을

여기에 비해 예수님은 아예 죄가 되버렸으니
하늘 영광의 보좌를 비워 버리고 죄인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니까
저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런데 도리어 그것이 주의 이름에 주선에 주는 꼴이 되는
뭐든지 아멘 
뭐든지 예가 되는
진리의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시는 겁니다

아무리 음모를 꾸며서 예수님에게 하나님의 저주든 죄든 뭐든 온갖것 증거물을 다 때려부어도

예 함이 되지
아니오 함이 없는 것은

이미 대신 매 맞으러 오신 율법의 완성인 원수를 사랑하시고자
이 십자가를 이루시고자 함이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괜히 독사의 자식들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도록
그들이 그 역할을 충실히 해 주고 있는 겁니다

아무리 옳음으로 겉을 꾸며도
진리를 막을 수 없습니다
생명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결정된 것은 창세전에 인간 개인의 구원이 아니라
십자가의 피 용서만 예정이 되었거든요

개인이란 없어요
예수 안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혜택을 받고 있는 예루살렘 딸이라고 합니다

에스겔서를 통해서 아무리 더럽고 더러운 창녀 중의 창녀인 오홀리바 일 지라도

예수 안에는 무조건 예가 되는
무조건 신부가 되게 하심은

예수님이 직접 그 죄 값을 치르신 십자가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더러운 자를 마귀가 잡아와도 말이죠

이 십자가의 용서를 거부하는 자는
성령을 훼방하는 자는 용서함이 없는 겁니다
마귀세력들 밖에 없습니다
십자가의 피 용서를 못 쳐다보도록

윤리로 선함으로 옳음으로 겉을 꾸며도

경건의 모양을 갖추어도

경건의 능력 곧 십자가의 영의 능력을 거부하기 때문에
이 십자가를 거부하는 겁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바로 이런 명백한 거부 속에서 펼쳐지는 은혜입니다

남을 7번 용서하겠다는 그 옳음을 거부하고
그 거부 속에서
도리어 7에 70번 용서 하시는 더 큰 십자가의 피 용서로만
은혜로만 들어가는 나라가 바로 진리의 나라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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