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사 65,21-25).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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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0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사 65,21-25)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지나가리라 (사 65,17-20)
이사야 2017 2021. 1. 3. 10:30
18-119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지나가리라 (사 65,17-20)

〈이사야 65:21-25, 개역한글, 구약성경 1047 쪽, 찬송가 48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46장 찬양하라 복되신 구세주 예수〉

(21) 그들이 가옥을 건축하고 그것에 거하겠고 포도원을 재배하고 열매를 먹을 것이며
(22) 그들의 건축한 데 타인이 거하지 아니할 것이며 그들의 재배한 것을 타인이 먹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 백성의 수한이 나무의 수한과 같겠고 나의 택한 자가 그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릴 것임이며
(23)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그들은 여호와의 복된 자의 자손이요 그 소생도 그들과 함께 될 것임이라
(24)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겠고 그들이 말을 마치기 전에 내가 들을 것이며
(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사 65:21, 새번역)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 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
(사 65:22, 새번역) 『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 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백성은 나무처럼 오래 살겠고, 그들이 수고하여 번 것을 오래오래 누릴 것이다."』
(사 65:23, 새번역) 『그들은 헛되이 수고하지 않으며, 그들이 낳은 자식은 재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주님께 복 받은 자손이며, 그들의 자손도 그들과 같이 복을 받을 것이다.』
(사 65:24, 새번역) 『"그들이 부르기 전에 내가 응답하며, 그들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내가 들어주겠다.』
(사 65:25, 새번역)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풀을 먹으며,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으며, 뱀이 흙을 먹이로 삼을 것이다. 나의 거룩한 산에서는 서로 해치거나 상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을 것이다." 주님의 말씀이시다.』
(롬 10:20,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 ㉠사 65:1(칠십인역)』
(롬 10:21, 새번역)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 ㉡사 65:2(칠십인역)』
(벧후 3:13, 공동)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여 있습니다. / ㉠이사 65:17.』


지난 주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이야기 했습니다
곧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새 약속은
예수님의 소원입니다
다른말로 예수님의 소욕이 된 겁니다 그것을 자녀 라고 하잖아요

곧 아들의 소원 즉 인자의 소원입니다

그러나 이 아들의 소원을 받지 못한 자는
새 이름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존의 이름으로 승부를 걸려고 합니다
그 기존의 이름이 바로
아들의 소원과 반대 되는 죄의 소원으로 운명지어져 있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죄의 소원은 임마누엘 이라는 아들의 소원을 구하지 않을 뿐더러
구할 수도 없을 정도로
(또 ~~ 뿐더러 가 나오네요)(롬 8:7, 개역)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소원 곧 오로지 죄의 소원만을 빌 뿐입니다

그 죄의 소원이 바로 앞의 글 마태복음에서 독사의 자식들이 가르치는 내용
조상때에 있었다면 선지자를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겁니다
즉 선을 취하고 악을 버렸을 것이다 라고 하는 것이 죄의 소원 선악의 소원이다는 거죠
그럼 문턱을 넘어서 보라 말이죠
오히려 그 말 때문에 그 다짐 때문에 또 조상의 양을 채우고
예수님도 죽이고
스데반도 죽이더라 말이죠

오늘 본문에 나오는 여호와의 복 된 자손은 말 그대로 자손의 소원이 아니라
여호와의 소원이 임한 자 이기에 복된 자손이라고 합니다
곧 육의 소욕과 반대되는 성령의 소욕이다는 거죠

이 성령의 소욕 소유물이 된 자들은 잃어버린 자입니다

자기자신을 더 이상 챙길수가 없는 잃어버린 자 말이죠

그러니 두려움과 겁냄이 없습니다

(사 44:8, 개역) 『너희는 두려워 말며 겁내지 말라 내가 예로부터 너희에게 들리지 아니하였느냐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나의 증인이라 나 외에 신이 있겠느냐 과연 반석이 없나니 다른 신이 있음을 알지 못하노라』

더 이상 자기를 챙길 자아가 없기 때문에 두려움과 겁냄이 없어요
즉 자기자신을 챙길려고 하고
자기자신을 여전히 내 소유라고 여기다 보니 두려움과 겁냄이 생기는 겁니다

이미 물에 빠졌다면 물에 빠질까봐 두려워 하거나 겁낼 이유가 없잖아요

즉 인간이 특수부대 귀신잡는 해병대 훈련을 해서 두려움과 겁냄을 없애서 없는게 아니라인간의 숙제로써가 아니라

분명 두려운데 이상하게 두려움이 없고 (죽은자 같으나 산 자요)
겁나는데 이상하게 겁나지 않는 것은 
(겁내지 않아서 겁이 없는 원인 있는 결과가 아니라
원인 없는 결과로써 근심하는 자 같으나 기뻐한다 라는 겁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겁쟁이와 쫄보 심신미약자 날 때부터 소경처럼 이들이 복 된 자 라고
일방적으로 편파해석을 해 버리시는 겁니다 마치 히브리서 11장의 믿음 장처럼)

(고후 6:8, 개역)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고후 6:9, 개역)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고후 6:10, 개역)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나 보다 더 실패한 주님을 보고서
그것도 겁냄이냐 그것도 두려움이냐 겁냄 축에도 두려움 축에도 못 드는
정녕 죽으리라를 즉 십자가를 봄으로써 비로소 두랴움과 겁냄이 없게 되는 겁니다
내 소유물이 다 사라져 탈탈탈 털리고
도리어 마귀에게 잡혀서 두려워 겁이나 벌벌 떠는데도 불구하고

너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시는 그 음성 덕분에
믿음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신 예수님의 기도 덕분에
곧 사랑은 두려움이 없기에
그 미쁘심 덕분에 더 이상 나를 내가 챙길 필요가 없는
주님이 나를 소유하심 덕분에 두려워하거나 겁낼 필요성 자체가 사라져 버리는 겁니다
내 대신 두려움과 겁냄을 책임져 버리시는 주님의 넘어오심 때문에 말이죠

이것을 지난 주에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다 말이죠
오늘 본문에서는 복 받은자 라고 합니다
복 받은자 될려고 자기 숙제를 하는 것은 오히려 두려움과 겁냄을 더더욱 크게 만드는 겁니다

아예 맡겨 버리고 내 숙제가 아닌 예수님의 숙제를 봐 버리면
아무리 두렵고 떨려도
기쁨이 되고, 아니 행복할 수가 없는 겁니다
바로 새 이름을 주시는 분의 운명이 나의 운명이 되니까 말이죠

우리가 생각하는 복은 사실은 저주입니다
놀랍게도 교회 마다 복음 이라고 증거하는 복음은 알고보니 저주음 이였다는 거죠

오히려 누가 봐도 저주라고 하는 것이 도리어 복이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았다 라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고간
못 박아라 못박아라 라고 십자가에 처형해라 저주를 퍼부어라 라는 것이 
도리어 복이였다 라는 거죠

알고보면 모든 인간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외친 것은
자신이 달려 죽어야 할 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두려움과 겁냄 때문이다는 겁니다

흔히 살인자를 보면 사람 죽이는데 눈 하나 까딱 안하고 두려움도 겁냄도 없다 라고
공포가 없다 라고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피해자가 공포인 두려움과 겁냄을 격게 된다 라고 합니다

피해자는 그렇다 치더라도
과연 가해자는 두려움과 겁냄이 없어서 살인을 하는 것일까요?
너무 너무 용감해서? 간 땡이가 부어서? 눈에 비이는 것이 없어서?

살인 자체가 두려움과 겁냄이라는 공포에 휩싸여서 나오는 겁니다
안 그러면 죽일 이유가 뭐가 있겠냐 말이죠
얼마나 싫었으면 죽였겠냐 말이죠


모든 인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라 라고 외친 것은 바로 두려움과 겁냄 이라는 공포 때문이지
안 그러면 죽일 이유가 뭐가 있겠냐 말이죠

이것이 기존의 이름 곧 기존의 운명에서 나오는 모습이다는 겁니다

마치 사자 앞에 놓여진 소의 운명처럼
이리 앞에 놓여진 양의 운명처럼 말이죠

바로 이런 배경을 깔고서
우리는 선지자를 죽일 수 밖에 없는데
뭐 안 죽였을텐데 라고 또 의문으로 남겨두니까
또 반복하는 겁니다
또 조상의 양을 채우는 겁니다
그 자체가 스스로 자기를 챙길려고 하니 또 두려움과 겁냄으로써
안죽일려고 하는 것이 도리어 죽이는 
왜 이러는지
다윗은 모친의 죄 중에 태어났기에 그렇다 라고 합니다
이미 창세가 3장에서 인간은 뱀의 유혹에 넘어가 버렸다 말이죠

즉 갇혀버렸기에 그 갇힌 장독대 안의 쥐처럼
장독대의 세계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 겁니다
그 유혹에 빠진 그 세계의 성품 그 장독대의 성품으로 이미 바뀌어져 버렸기에
한 번에 이미 끝난 겁니다 두 번째 유혹은 이길꺼다 라는 그 두 번째 유혹 자체도 없구요
죄가 인간을 다루지
인간은 죄를 다룰수가 없거든요
죽기를 무서워 사망이 왕노릇함에 있어서 평생 종 노릇으로 사는 겁니다.
아니 이미 죽은 거죠 뭐

마치 사자 앞에 놓여진 소의 운명처럼
이리 앞에 놓여진 양의 운명처럼 말이죠

벌벌벌 떨면서 두려움과 겁냄 이라는 알수 없는 공포 속에서 사는 겁니다
전에 이사야서에서 심지도 않았는데 수고도 하지 않고 거두는 그 약속의 땅에서
약속을 거부하고 우상을 쫓다가 쫓겨나게 되니까
졸지에 척박한 세상이 되어버리니 활과 칼이 없으면 먹을 수가 없게 되는 것처럼 말이죠

이렇게 벌벌벌 떠는데

말도 안되는 소리인 
말도 안되는 약속의 땅처럼

두렵고 겁내는데
이렇게 코로나로 전세계가 공포 속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하태평같은 소리인 말도 안되는 소리인
두렵고 겁나는 환경 이 뻔히 눈에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고 말도 되도 않는 소리
새 하늘과 새 땅 이라는

마치 십계 영화에서 약속의 땅 운운 하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한다 라고
우리를 다 이 광야에서 죽일 속셈이지 라고 모세에게 달려들 듯이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를 계속 하더라 말이죠

현실은 공포 뿐인데
사자 앞의 소요
이리 앞의 양인데 말이죠

그것도 가장 미약한 족속이요 가장 작은 수 라서 일부러 의도적으로 뽑았다고 하시잖아요

(신 7:6, 개역)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신 7:7, 개역)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복된 자의 자손이라 라꼬

정말 정말 말도 안되는 소리죠

야야 나 저주 받았다 나 나오미 로부터 떠나라 니도 저주 받는다
무슨 소리 하시는겨 어머니처럼 축복 받은 자가 세상에 어디있는데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이 축복을 마다할 자가 누굽니까 
누 ~~~ 굽 니까 철수는 아니다 말이죠

자 이렇게 말도 안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복의 상태가 바로
새 일. 보라 내가 새 일을 다 이루어 놓았다 라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복이 바로
사자가 도리어 소처럼 짚을 먹게 되는 복이 덮쳐진다는 겁니다

아니 이것이 이 세상에서 말하는 복과 일맥상통하는 소리 입니까 
아니 이것은 오히려 저주 아닙니까 저주
이게 복이래요 글쎄

(사 65:25, 개역)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으로 식물을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렇다면 육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한 세트가 되어서 그 차이로써 서로 영원히 갈라져야 하듯이
인간의 소원 곧 소유와 성령의 소욕 곧 잃어버림과의 차이가 드러나야 겠죠

즉 다시 이 말은 죄의 소원에서는 전혀 복이 아니다 라는 거죠
뭐가? 성령의 소욕이 아들의 소원이 말이죠

누가 잃어버림을 복으로 알겠냐 말이죠

도리어 시어머니 나오미가 말립니다 야야 나 저주 받았다 떠나라
아닙니다 어무이 복 받은 겁니다 어무리 하나님이 내 하나님 맞당께요

다시 또 역으로 말하면 아들의 소원에서는 죄의 소원에서의 복은 복이 아니라 저주 이다는 겁니다

서로의 소욕을 거부하는 거죠
악한 세대가 요구하는 기적 곧 구원 곧 복은
부자 되는 겁니다

그러나 요나의 표적 외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다 라는 아들의 소원에서는
저런 부자가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된다는 겁니다

그것이 계시록에서 이렇게 증거합니다
부자야 부자야 그렇게 돈이 많은데 왜 불에 타지 않는 옷을 돈 주고 사 입지 못하니 라고 말이죠
그러니 부자는 전혀 부자가 아닌 아이고 불에 타는 옷만 입고 다니는 거지 이다 라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는 부자를 거지로 볼 줄 아는 눈이 없습니다

또 거지를 부자로 볼 줄 아는 시선도 없어요, 그런데 계시록은 거꾸로 말해요 글쎄

(계 3:17, 개역)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계 3:18, 개역)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구원은 오히려 역으로 성경에서 언급했습니다 즉 수치를 가려주심이다는 거죠 
우리가 바라는 복 또는 구원 개념은
있음에서 있름을 추구하는
있는데 더 받는 소유의 증가가 복이다 구원이다 라는 것인데 그게 아니다 라는 겁니다
지옥에 안 가도록 용서한다는 것이 수치를 가려줌 이다는 겁니다
남을 7번 용서는, 소유의 증가 개념입니다 스펙쌓기 의로움쌓기처럼 말이죠

그러나 도리어 7에 70번 용서받는 것은 수치를 가려주시겠다 라는 모욕적인 구원이다는 거죠
이것이 여호와의 복을 받은 자손이다 라고 오늘 본문 이사야 서에서도 언급하고계시록에서도 그런 의미로 증거하고 있다 라는 겁니다)

반대로 거지는 부자가 아무리 돈을 뿌려서 살려고 해도 살수 없는 불에 타지 않는 옷을 입었다 라는 겁니다
그것이 복이래요 글쎄

불 곧 심판이 묻지 않는 옷 이라는 겁니다

흰 옷, 성령의 옷 그리스도의 옷 곧 어린양의 피 옷을 입었거든요

(계 7:9, 개역)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계 7:10, 개역)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 하니』
(계 7:11, 개역) 『모든 천사가 보좌와 장로들과 네 생물의 주위에 섰다가 보좌 앞에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계 7:12, 개역)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계 7:13,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4, 개역)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5, 개역)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 7:16, 개역)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계 7:13, 개역) 『장로 중에 하나가 응답하여 내게 이르되 이 흰 옷 입은 자들이 누구며 또 어디서 왔느뇨』
(계 7:14, 개역) 『내가 가로되 내 주여 당신이 알리이다 하니 그가 나더러 이르되 이는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인데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계 7:15, 개역)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계 7:16, 개역)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계 7:17, 개역)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바로 계시록 7장 16절을 보시면 오늘 나온 본문과 똑같습니다
결국 복이란 눈물을 씻어 주실 분이 있다 라는 겁니다.

오로지 잃어버린 자에게만 나타나는 인자 곧 사람의 아들이 아니라
처녀가 잉태하여 낳은 아들 즉 아버지 없이 태어난 아들 말이죠

고아 과부 나그네 에게만 희년 곧 복음이 외쳐진다 라는 겁니다

그 외에는 안 외쳐지는 겁니다
왜? 우상을 쫓고 있거든요
고아 될까봐
과부 될까봐 
나그네 될까봐
우상을 섬기는 바벨론 여자처럼 말이죠

잃어버림 당할까봐 인간은 우상을 섬기는
마귀의 가면 노릇
자기가 자기자신을 잃어버릴까봐 말이죠

자기 소유하고 우기는 겁니다 자기는 자기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내 인생은 나의 것
나를 그냥 내버려 두세요 라고 가수의 노랫말처럼 말이죠

아이고 왜 자꾸 저주를 받을려고 하니
왜 자꾸 멸망의 길로 갈려고 하니

제발 죽지 말고 살아라 라고 해도 죽음의 길로 가더라 말이죠

자 이렇게 사생아는 이 눈물을 씻어 줄 자가 없기 때문에
눈물을 안 흘리고자 하겠지요

그것이 자녀와 사생아의 차이인 거죠
기업 무를자 고엘이 없다 라는 겁니다
신원해 주는 자가 없기에
자기가 자기자신을 변호하고 신원하고 구원해야 하고 바쁘다 바빠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는 복이란 자립하는 것인데 이것을 오히려 성경은 저주 라고 하고요
선악으로 판단하는 세계가 저주 받은 세계이다는 거죠

반대로 복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라고

아니 시어머니
시어머니 말 마따나 쫄딱 망했다 망한 것 보고도 그런 소리 하냐? 라고 하시는데
거 보세요 망했는데도 안 망했잖아요
도대체 시어머니는 어떻게 이렇게 복을 받았는지
아무리 아무리 쫄딱 망해도 안 망할 수가 있습니까
어머니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라고

며느리 룻의 해석이 오늘 본문을 보는 시선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아니 하나님이 그렇게 괴롭히는데도 안 망하네요
지금 우리가 에스겔과 이사야를 하면서
이스라엘을 망하게 했잖아요
즉 죽음 속에 넣어 버렸다 라는 겁니다(고로 이스라엘은 망해야 한다 라는 겁니다 그 망한 자리에서
내 망한 것을 보게 되는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아픔, 상처 입은 얼굴을 비로소 보는 겁니다
십자가가 영광 곧 하나님의 영광임을 말이죠

우는 자가 복 되도다에서 우는 자로 만드시는 것은 내가 우는 그 자리에서
내 눈물 보다 주님의 눈물 주님의 상한 마음을 비로소 보게 된다 라는 겁니다
내 눈물은 눈물 축에도 못 들고 내 죽음은 죽음 축에도 못 들고 내 아픔은 아픔 축에도 못 드는
저 십자가에 달리신 인자를 쳐다 보게 됨으로서 비로소 보는 겁니다 
비로소 우는 겁니다
비로소 구하게 됩니다
내 속에 정직한 영이 없으니 제발 정직한 영 곧 성령을 예수님의 마음을 주소서
예수님의 운명을 주소서 라고 말이죠
이러니 그 아픔을 아는 십자가를 아는 자가 복 되도다 라는 겁니다
바로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사랑)을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우상을 찾는 겁니다
안 잃어버릴려고
어떻게 해서든 자아를 자기가 구원해 보겠다 라고 율법 지키고
십의 일조에 이레에 두 번 금식에 저 매국노처럼 살지 않겠다 라고 다짐을 하면서 말이죠

저런 망하는게 망한게 아니라 실패가 아니라
진짜 실패는 자기 실패 밖에 모르는 자가 실패이고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인 요나의 표적, 예수님의 실패를 못 보는 자가 진짜 실패이다는 겁니다
누구 때문에 실패의 자리에 갖는 지를 못 보는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는 것이 실패냐 말이죠 사랑으로 창조한 세계인데
사자가 더 많은 소를 잡아 먹어야 한다 라는 
울리는 꽹과리인 달가닥 달가닥 거리는 무기를 힘을 모으는 (이데오피아 군대) 세계
곧 선악의 세계에서 못 벗어나는 것이 저주 받은 자 이다는 겁니다

이전 것은 삭제 되었는데 여전히 그 버린 쓰레기를 휴지통에서 다시 끄집어서 주장하니까
남을 7번 용서해야 한다 라고 교육하고 있으니 조상의 양을 채우고자
아무리 봐도 악마로 보이는 참선지자를 삐딱한 부정한 말만 하는 참선지자를 정의의 이름으로 선의 이름으로 악을 심판하겠다 라고 아벨의 피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피 흘리는 겁니다자기 손으로 직접? 아니지요 절대로 자기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죽이는 종교라는 힘 
자기 손에는 절대로 피 안 묻히죠국가(로마, 짐승)와 손 잡고, 666, 사람의 수로, 음녀(제사장의 딸)로써 의인의 피를 흘리는 거죠)

그런데 그 죽음 속에서
오히려 마귀는 우리를 저주의 자리 실패의 자리에 몰아넣었다 라고 좋아라 하고 있는데
오히려 예수님께 맞선 시켜주는 식입니다
그 저주의 자리가 복의 자리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고 있으니 말이죠

요나의 큰물고기 뱃속에서
무저갱 스올 지옥 속에서
생명이요 길이요 진리요 부활 되신 예수님을 만날 줄이야
그 잃어버림의 자리에서 말이죠

여호의의 이름을 부를수 있는 어머니는
여호와께 복 받은자입니다 라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찾으신바 되었고 부르신바 되었다 라는 겁니다
이런 며느리 룻에게서만이 시어머니는 예수님의 족복에 들어가는 자 이다 
이것 보다 복 받은자가 어디있냐 라는 겁니다

탕자의 눈물을 누가 씻겨 줍니까
그러니 탕자만이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라는
여호와의 복 받은 자 이다 라는 겁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핵소름입니다
어떤 분의 질문 덕분에
탕자가 어떻게 왕같은 제사장이 되는지 거룩한 나라가 되는지 그의 소유된 백성인지
그 잃어버림을 당한 자가 어떻게
그 잃어버림 속에서 주님을 만날줄 누가 알았겠냐 말이죠
저도 그 분과 다를바 없는 탕자인데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포로되었고 갇혔고 억눌린 자인데
먼저 말해 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그래서 주님은 이스라엘 집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왔는데
다들 자기 구원 하나 하나씩 지숨 지숨 구원조건을 다 갖춘채로 자기자신을 소유하고 있으니
잃어버리지 않고서 말이죠

그러니 아무도 없는 겁니다
이방인에게서 비로소 찾았다 말이죠
귀신 들린 딸의 어미 말이죠
지금 귀신이 심각한게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는 자가 먼저 있었다 라는 것이 더 급해요 급해

(마 10:6, 개역)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마 15:24, 개역)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엘리야 선지자는 한 과부에게만 보내심을 받았고
엘리사 선지자는 한 문둥병자 에게만 보내심을 받았다 말이죠

왜? 먼저 있었던 것은 7에 70번이 먼저 있었거든요
그 증상물을 찾는 겁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먼저 있었고 그 사랑에 부합이 되는 죄인 곧 탕자가 증상물로 자녀로
복받은 자로 새 일 새 이름을 받은 자 곧 복 받은 자로 나타나야 태어나야 하는 겁니다

이 하나님의 의에 의해 말이죠 물론 한 세트가 되는 
하나님의 의를 거부하는 자기 의를 쌓는 자가 대조적으로 나타나면서 말이죠

탕자의 형인 맏아들 곧 의인과 건강한 자는 여호와께 복 받은 자가 아니다 라는 겁니다

맏아들은 왜 저주 받은 놈에게 복을 주느냐 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긍휼 곧 십자가의 피 흘리심의 용서에 반항하는 겁니다

눈물을 씻겨 주시는 자가 없기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삶을 살거든요
그것이 저주 받은 자 이다는 겁니다.

우리는 눈물 씻겨주시는 자를 말하기 위해서
눈물 흘릴 수밖에 없도록 되어 있는 겁니다

눈물 씻겨주시는 자가 먼저 있었고
우리는 눈물 흘리는 자로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었고
우리는 죄인으로 태어난 겁니다. 의인이 아니라 건강한 자가 아니라 말이죠(그럼 눈물 흘리는 삶을 살면 복 받은 자 인가? 아니다는 겁니다
눈 물 흘리시게 하는 괴롭히는 전능자를 말하기 위함이다는 겁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요 취할이도 여호와요, 그가 찢으셨으나 그가 다시 싸매어 주시는
여호와를 말하기 위해서 신랑을 말하기 위한 신부이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우는 자가 복 되도다 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죄인-되기를 실천하는 자도 위선자이다는 겁니다
자기 숙제가 아닌 예수님의 숙제로써 죄인 만들기, 우는 자 만들기 이시거든요.)

의사의 자신의 특기 곧 소유한 의료기술을 자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무리 의인이요 건강한 자가 되고 싶어도 안됩니다
의사를 그들은 부를수가 없어요

오로지 환자요 죄인이요 눈물 흘리는 자 만이 의사를 부르짖거든요
눈물을 씻겨 주시는 자를 말하기 위해서 말이죠
(주의 숙제로써 눈물 흘리기 만드시고 다시 눈물을 씻겨 주시는 겁니다
이 간극을, 이 삼일의 간극, 꼬끼오 꼬끼오 꼬끼오는 
인간의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을 단절 시키는 
성령의 소욕으로써(육의 열매와 대비되는) 성령의 열매로써 
예수님 자신의 십자가의 피 용서의 증상물로써 열매로써 잉태케하여서 낳은 겁니다 
주님이 직접 낳아서 태어나게 한 창조물 새피조물이다는 겁니다.
고로 맏아들이 아닌 탕자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는
십자가 곧 7에 70번의 용서가 낳은 열매입니다 십자가가 잉태한 열매요 자녀입니다
맏아들은 반대로 선악의 나무가 낳은 저주의 자녀이구요)

고엘을 곧 기업 무를자를 말하기 위해서
고아 과부 나그네가 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뭐 되어야 한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지만
기업 무를자가 그렇게 만들고야 말겠다 라는
주님의 소원이 바로
자신의 복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사단의 깊은 것
죄의 소원을 거쳐서 펼치시겠다 라고 하는데

이 질투의 사랑인 아들의 소원 땜에
이 십자가의 사랑을 말릴수가 없는 겁니다

말리는 놈인 마귀를 끌어와서, 애굽왕 바로왕을 소환해서
말리다가 왜 저주 받는 것 까지 다 보여주시면서 말이죠
죄의 소원이 이렇다 라는 그 차이로써
아들의 소원을 드러내시는 겁니다

너의 그 공포
두려움과 겁냄
그 저주
그 병
그 죽음 

내가 대신 다 짊어지고 가마
내 죽을께 너 살아라 라는

이 사랑을 보고
우리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라지게 만드신 그 사랑을 보고

도리어 이 사랑을 놓칠까봐 두려움과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분을 보게 하시는 겁니다

간담이 다 녹아서 물이 될 정도로 말이죠

그야말로 말도 안되는 극과 극의 표현입니다

극초 초 초 초초초초 과잉이 진리이듯이

사도바울이 복 된 자 곧 행복한 자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성령을 받아서 말이죠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이 행복한 자는 누구인가를 고백한 것을 다시 사도바울이 다윗이 말한 행복한 자를 복된 자를 언급하면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나를 더 이상 내가 이끌고 갈 필요가 없는 인생이 된 것이 바로 행복한 자 라고
오늘 본문처럼 하나님의 복된 자의 자손이라 라고 말이죠

아무것도 한 것이 없이 용서 받았기에

이 용서가 먼저 있었고
그 증상물이 되었기에 말이죠

후사 후사 오늘 본문에 나오는 자손 말이죠

(롬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 개역)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롬 4:2, 개역)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롬 4:3, 개역)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롬 4:4, 개역)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롬 4:5, 개역)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롬 4:6, 개역)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롬 4:7, 개역)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롬 4:8, 개역)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 4:9, 개역)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롬 4:10, 개역)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할례시가 아니라 무할례시니라』
(롬 4:11, 개역)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니 이는 무할례자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 저희로 의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 4:12, 개역)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나니 곧 할례 받을 자에게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니라』
(롬 4:13, 개역)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롬 4:14, 개역)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롬 4:15, 개역)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4:16, 개역) 『그러므로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니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롬 4:17, 개역) 『기록된 바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세웠다 하심과 같으니 그의 믿은 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
(롬 4:18, 개역)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롬 4:19, 개역)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롬 4:20, 개역)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21, 개역)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롬 4:22, 개역)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롬 4:23, 개역)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롬 4:24, 개역)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롬 4:25, 개역)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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