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사함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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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5일 21시 48분 38 초 에 저장하였습니다.


답변 : 080206 10:10

죄 사함이란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하죠 간단하죠

자 그럼 죄와 용서라는 의미가 성립이 되어야 죄사함이 되겠지요
같은 식으로 원수를 사랑하라처럼 원수와 사랑이 성립이 되어야 합니다.

먼저 죄란 죄 스스로 정립이 불가능 합니다.
그 죄라는 것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기준이 생겨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이 죄라는 것을 규정하기 위해서 율법이 가입합니다.
율법은 모세때입니다. 그 이전에는 죄를 죄라고 규정할수 있는 법적인 기반이 없습니다.

(롬 4:1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느니라』
(롬 5: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래서 법적인 기반이 되도록 즉 심판 아래에 두도록 율법이 가입하는 겁니다.

심판 아래에 둔다는 의미는 벌을 집행할 집행자에게 초점을 맞추기 위함이지
심판 받는 인간이나 심판 받지 못하는 인간을 염두한게 아닙니다.

고로 구원받는 인간 구원받지 못하는 인간을 염두하시면 안됩니다.
구원문제는 아무 상관 없습니다.

심판자에 대한 초점 뿐입니다.

자 그래서 율법이 가입합니다. 왜죠? 죄 아래에 가두기 위함입니다.
즉 죄 아래에 갇힌 나 라는 인간이 되었다 라고 또 인간에 두지 마시고
죄 아래에 가두는 분인 심판자가 초점입니다.

자 이렇게 로마서는 심판자만을 염두합니다.

(롬 5:20)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

자 이렇게 심판자는 율법을 통해서 모든 인간을 범죄 아래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원수가 성립이 되어야 사랑이 의미가 있습니다.

원수가 성립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사랑이 표현이 될수 있겠습니까?

마치 심판이 성립이 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가 성립이 되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 5장은 은혜가 뭔가를 말하기 위해서 죄가 왕 노릇한다는 의미를 부각하는 겁니다.

(롬 5: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롬 5: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롬 5: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을 인하여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롬 5:17)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롬 5: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롬 5:19)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래서 은혜가 왕노릇 하는 겁니다. 결국 은혜란 죄가 왕노릇하는 의미에서만 증거 됩니다.
마치 생명나무는 선악과 나무가 없으면 설명 불가입니다. 사랑은 원수가 없으면 설명불가이듯이 말이지요

(롬 8:3)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육신에 죄를 정하사 (3절) 죄를 육신에 정하지 않으면 영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은 육신에 죄를 정하는 개념을 모르면
예수 안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의미를 모르는 겁니다.

결국 성화론자들은 육의 가능성을 늘 열어둔다는 의미는
예수님이 왜 죄 없는 분이 죄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와야 함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마치 우리가 성화론자들처럼 바리새인들처럼 의의 길로 갈려고 할때에
예수님은 그 반대로 십자가 라는 저주의 길로 가시는 것과 같습니다.

죄 있는 육신이 의의 길로 가버리면 예수님이 율법을 준 이유가 의미가 없습니다.
죄가 왕노릇 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의의 길로 못 가야만 합니다. 가두었는데 빠져나오다뇨?

그래서 예수님은 반대로 행하십니다. 저들이 죽어도 가기 싫어하는 죄의 길로 갑니다.
십자가의 길로 가야만 저들의 의의 길이라는 것이 거짓임을 밝히시는 겁니다.

자 여기서 율법은 인간이 선택한 길이고 예수님은 십자가 길을 가십니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써 이제 죄의 기준이 달라져 버립니다.

죄의 기준이 달라졌다는 말은 의의 기준도 달라졌다는 겁니다.
이런 이유로 율법은 율법의 역할을 제대로 행했고
율법이라는 의문에 적힌 증서는 모든 인간을 가두는데 성공함이 명확해 집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했기에 이제야 비로서 율법을 그 이전에는 제대로 행할수 없었으나 이제부터는 제대로 할수 있다 라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 문제로 늘 사도바울과 충돌이 된 겁니다.
전 남편을 죽었는데 이제는 더 골치 아프게 죽은 전남편의 허상에 놀아나는 겁니다.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로마서 7장은 전 남편과 새 남편의 권세 개념으로 표현되어 있지 여기에 신부인 인간은 어떤 권리도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9장에서는 관계성 이라는 의미가 권리가 없는 인간에게 부어지는 약속의 끊어지지 않는 관계성을 증거합니다.

자 그럼 죄의 기준과 의의 기준은 곧 예수님의 편애와 미움인 겁니다.

여기서 모든 인간은 나자빠집니다. 인간의 어떤 권리도 없고
일방적으로 선택당해야만 할 입장이기 때문입니다. 누구는 천국 누구는 지옥이라는 것이
자신의 행동 여부에 일체 달려 있지 않고, 율법의 행위와 전혀 상관이 없이
예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버림에 달려 있으니 말이지요.

이것은 로마서 9장에 명백하게 나옴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신학은 거부하는 내용이고
인간의 모든 종교 모든 신학과 교리는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인간이 끼여들 여지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칼빈의 5대 교리 중에 (무조건적 선택)
1. 전적 부패(total depravity)
2. 무조건적 선택(unconditional election) 
3. 제한적 구속(limited atonement).
4.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
5. 성도의 견인(perseverance of the saints)

칼빈 본인도 이 교리를 형성하고서는 본인 스스로가 이 교리에 모순 되는
자신들의 교회 권력에 제한적 구속을 두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 속에 칼빈은 빠지는 식입니다. 이것은 후대에 칼빈 정치에 줄을 선 모든 개신교 신앙의 모순을 미리 보여주는 식입니다. 결국 그들에게 남은 것은 트릭이라는 정치만이 그들 교회를 이끌어 오는 겁니다. 그 트릭이 예수님만을 이용하자 오직 믿음 오직 성경만 이용하자 라는 트릭으로 대중을 속여 온 겁니다.

그 트릭의 내막은 간단 합니다. 그냥 자기 교회와 자기 목사에 길들여진 영원한 목사의 종이 되라는 말 밖에 없는 식입니다. 이것은 바로 천주교가 이미 다 보여준 사상입니다.

루터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년 전 까지만 해도 교회와 씨름 했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루터도 교회를 넘어서질 못합니다.

칼빈은 교회정치에 성공했기에 줄 쓴 자들이 많았고
루터는 교회정치를 부정했기에 줄 쓴 자들이 적었고 또 말년에 그런 싸움도 실패 했기에
교회가 목사 정치세력 중심으로 힘을 쓰지 못하는 입장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성화론자들의 특징은 트릭을 쓰는 것이
개혁정신은 루터의 용감한 전투의식을 차용하고
교회정신은 루터를 따르면 교회 말아먹기 때문에 그때는 또 칼빈의 교회정치를 따릅니다.

주님이 이렇게 기가막히게 인간의 죄성을 저들 스스로 감추도록 하시는 이유는
죄란 주님이 직접 본인이 다루지 않는 이상 해결 못한다는 겁니다.

아무리 루터 뒤에 칼빈 뒤에 숨겨본들
주님이 들추어낸 자는 편애 받은자요
루터와 칼빈 뒤에 숨겨둔 것을 들키지 않았다고 성공했다고 착각하는 자는
그 생각 대로 내버려 두시는 겁니다. (롬 1장)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여기서 그들의 우상은 피조물인 교회를 교회의 주인되신 예수님 보다 더 경배하시는 식이지요. 그 교회라는 피조물과 그 속의 목사라는 피조물이 그들의 경배 대상입니다.
자기가 없으면 교회를 운명 못한다고 하거나, 교회를 교회 되게 개혁할수 있다고 세뇌시키죠.

그렇기에 죄의 기준과 의의 기준은 교회나 인간 목사가 될수 없습니다.
그들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를 진 적이 없고
나의 죄 때문에 피 흘린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기준이란 내가 죄에 감염이 되어서 괴로워 한 그 입장에서
내 죄를 뒤짚어 쓸려고 나와 같은 죄인의 모습으로 왔고
그것을 오해한 (죄 때문에) 내가 내 손으로 죽이고 내 손에 죽은 그 하나님만이
나에게서만 저주를 받은 그 예수님 만이 내 죄를 깨뜨릴 의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실용주의를 역으로 생각 해 봅시다. 내가 없으면 예수도 의미 없다라는 인간의 선악사고에
반대로 나의 죄 나의 손에서만 죽는 예수님만이 진짜 내 죄를 깨뜨리는 겁니다.

여기서 구체적인 나 라는 존재성에 맞짱 뜨시는 분은 나를 상대로 오신 예수님이지
보편적인 인간이라는 대중은 아닙니다. 죄란 구체적인 겁니다.
나 라는 의식에서 못 벗어나는 이상 나 라는 구체적인 나 뿐인 의식속에 쳐들어 오신 예수님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모든 인간은 나 라는 자기만의 입장에서만 십자가가 구체적인 자기만의 사건으로 다가오는 겁니다.

자 그런 입장에서 이제 이 십자가의 사건은 우주적입니다.
곧 예수님의 편애와 미움 뿐인 겁니다.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롬 9:21)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자 지금껏 길게 이야기 했습니다만 위의 내용 다 잊어버려도 상관 없습니다.

딱 하나입니다. 죄 사함이란 무엇인가?

예수님이 죄인으로 왔다는 사실이 죄사함입니다. 왜 죄인으로 왔는가?

(롬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약속 성취 때문입니다. 여기서 교회와 목사는 죄 사함에 어떤 개입도 못합니다.
예수님만이 독자적인 행위인 십자가로 피흘렸습니다. 교회는 피도 흘린적 없으면서 돈은 잘 타 먹고요, 목사는 내 죄로 제물이 되어 본적 없으면서도 앵겨붙어서 돈달라고만 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뭔가 부족해서 돈 달라고 하신적 없이 오히려 주시고픈 마음 뿐이십니다.

결국 죄사함이라는 의미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에게만 바라보도록 하기 위한 사랑의 관계성이지

(롬 8:35)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
(롬 8: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이것 외에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일부러 여기에 온갖 잡다한 것들이 거머리처럼 달라 붙는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십니다.

죄사함 자체가 목적이 되도록 교회와 목사들이 달라붙지요. 어느새 예수님은 죄사함이라는 목적을 달성해 주는 도구가 되고
죄사함 자체가 목적이 되는데 교회와 목사가 구원장사를 하는 면죄부파는 적그리스도가 되는 거죠

주님이 일부러 그러시는 이유는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의 가치성이 인간과의 차이가 부각이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죄사함이라는 구원이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버림받아도 상관 없는 그 사랑의 관계성이기에
예수님만 살아만 계셔도 족합니다. 왜 ? 다름아닌 내가 예수님을 죽였거든요
그러니 나는 지옥 가도 상관 없습니다 라는 그 관계성이
예수님의 피의 공로인 원수를 사랑하는 말씀을 말씀(예수님) 스스로 완성하시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Posted by 김 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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